밖으로부터 지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에 더 이상 휩쓸리지 않는다.

절친한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며 한 독자가 고민을 보내왔다.

“대학에 입학해 사귄 동갑내기 친구와 마음이 잘 통했다. 3년 동안 붙어 다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인은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내 성격 탓이 컸다. 나는 기분이 좋으면 ‘내일 굶어도 오늘은’ 하면서 한턱을 내고 친구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러다 뭔가 기분 나쁜 날은 온갖 짜증을 부렸다. 가끔 친구가 나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면 욱 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쏘아붙이는 말을 퍼붓고….

그러는 순간에 후회가 밀려왔지만 상황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며칠 냉랭하게 지내다 기분이 나아지면 친구에게 다가갔다. 친구도 못 이기는 척 다시 말을 걸고…. 이런 반복이 계속되었는데 얼마 전부터 친구가 나와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불편하기보다는 불안했다. 나는 그 친구가 좋다. ‘앞으로 안 그럴게’ 말은 해도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도 더 이상 내 감정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남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을 기분파라고 부른다. 문제는 그 충실한 기분이 항상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의 기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지만, 본인은 그 상황을 감지하지 못한다. 누구나 감정이 있고 감정에 영향을 받으며 살기 마련인데, 기분파는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이 많이 뒤떨어진다. 인정받으면 즐거워하고 무시당하면 불쾌해하며 그는 자신을 향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기분파가 외부의 평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아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자아정체성이란 나 자신에 대해 일관성 있게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신념과 가치관은 무엇인지 등이 분명하면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크게 요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안다. 딱히 드러낼 게 없어서 조용히 있지,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작 살면서는 모자라거나 초라하거나 편협하거나 뒤틀린 자신을 본다. 위대한 존재를 꿈꾸지만 실제 모습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신뢰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안전하며 불확실한 것임을 깨닫는다. 자연히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기분도 신뢰할 게 못된다.

내가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나에게 없는 지혜를 밖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삶의 형태가 이렇게 갖춰지면 롤러코스트 같은 감정에 더 이상 휩쓸리지 않는다. 기분파로 살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새롭게 정돈된 자아정체성 아래, 나의 감정은 삶의 기쁨을 늘려주는 감미료 역할을 한다.

그 감정을 가족, 친구와 공유할 때 또 다른 행복을 교감하게 된다. 기분파 독자에게 ‘내가 누구인지, 내 가치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냐고 묻고 싶다. 실제로 ‘나’라는 사람에게 ‘괜찮은’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주위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눈이 뜨인다고 말하고 싶다.

‘Think twice before you answer’라는 올드 팝송이 있다.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한다면, 멀어져 가던 친구가 곧 다시 찾아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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