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욕망에 사로잡혀 달려가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이 있다. 톨스토이는 단편소설에서 그런 사람들의 결말을 짧고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소설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흠이 사는 시골집에 하루는 그의 처형이 놀러왔다. 남편이 무역상인 처형은 도시에서 호화롭게 사는 이야기를 소작농의 아내인 동생에게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값비싼 명품 옷들과 보석, 극장 구경, 마차를 타고 즐기는 여행, 고급 술을 마시며 즐겼던 파티 이야기로 언니는 동생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끝도 없는 언니의 자랑에 동생의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동생은 당당하게 ‘부자도 하루아침에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언니에게 말했다. 화가 난 언니는 “더러운 돼지와 소들 속에 사는 네가 호화롭게 사는 내 인생을 알기나 해? 너는 소똥 냄새나 맡으며 살고 너희 아이들도 그렇게 살고 말 거야!”라는 소리를 내뱉고 가버렸다.

난로 뒤에 누워서 두 자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흠은 ‘가난이 문제야. 내가 많은 땅을 가졌다면 악마도 무서워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그때 벽난로 뒤에서 그의 말을 들은 악마가 ‘옳거니. 그럼 너와 대결해 보자. 너를 땅의 포로로 만들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후에 바흠은 소원대로 땅 소유주가 되었고 더 열심히 일해 땅을 늘려 나 갔다. 그는 자기 땅에 씨앗을 뿌려 경작하고 목장에서 가축도 길렀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돌아보며 기쁨에 겨웠다. 이처럼 바흠이 즐거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바흠은 항상 이웃과 하찮은 문제로 골치를 앓고 격렬하게 다투기도 했다. ‘많은 땅을 가져야지’라는 그의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볼가 강 유역에는 비옥한 땅이 굉장히 저렴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바흠은 즉시 있던 땅과 재산을 모두 팔아 새 땅으로 ​이사를 갔다. 새 땅은 이전보다 더 비옥해 생활이 훨씬 더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그 생활에도 익숙해지자 차츰 좁게 느껴졌고, 더 광활한 땅을 사서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때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상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시키르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불과 1천 루블만 있으면 땅을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게다가 바시키르 사람들은 양처럼 순해서 거의 공짜이다시피 땅을 준다고 덧붙였다. 바흠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즉시 하인을 데리고 3백 마일 이상 떨어진 먼 곳을 찾아갔다.

바시키르에 도착한 바흠이 마을 사람들에게 기념품과 차를 선물하자 그들은 바흠을 환영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했다. 비옥한 땅을 사고 싶다고 소원을 말하자, 촌장은 하루 동안 부지런히 다니며 땅에 표시를 하면 그 땅 전부를 1천 루블에 주겠다고 했다. 단, 해가 뜰 때 떠나서 반드시 해지기 전에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와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땅에 반드시 표시를 해두어야 자기 소유가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너무 쉬운 조건에 바흠은 흥분해서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녘에 잠시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문 밖에서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바흠이 문틈으로 보니 바시키르의 촌장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서 “왜 웃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 순간, 촌장이 아니라 이 땅을 소개해준 행상으로 보였다. 한 발 더 바짝 옆으로 다가가자 뿔과 발굽이 달린 악마가 배꼽을 잡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옆에는 맨발의 어떤 남자가 내팽겨져 있었다. 이미 죽은 그 남자는 바흠 자신이었다. 오싹해진 바흠은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러나 ‘꿈은 한낱 꿈에 불과하지’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드디어 아침이 왔다. 촌장은 자신의 털모자를 벗어 바흠 앞에 놓고 말했다.

“여기가 출발점이오. 반드시 해지기 전에 이곳으로 돌아와야 당신이 하루 동안 표시해 놓은 땅이 모두 당신 몫이 될 것이오.”

태양이 떠오르자 바흠은 물병과 빵 봉지를 챙겨 평생 원하던 광활한 농토를 향해 떠났다. 될 수 있으면 비옥한 땅, 강과 가까운 땅을 얻기 위해 열심히 뛰고 또 뛰었는데, 가도 가도 온통 좋은 땅이고, 끝이 없었다.

가도 가도 탐나는 비옥한 땅, 해지기 전까지 돌아가야 하는데...

바흠은 걸어가며 군데군데 막대기를 세워 표시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날씨가 점점 뜨거워졌다. 하지만 더 좋은 땅들이 계속 앞에 나타나서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뒤돌아보니 언덕 위에 서 있는 바시키르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이쯤해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비옥한 땅을 보고 돌아설 수 없었다. 태양은 슬슬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언덕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아이쿠, 큰일이네.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끝장이야. 땅은 이제 충분해!’

바흠은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걷기 시작했으나 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맨발엔 상처투성이였다.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 욕심을 너무 부린 건 아닐까? 늦기라도 하면 어쩐담?’

태양은 야속하게도 서산을 향해 기울어갔다. 마음이 불안해진 바흠은 이제 달리기 시작했다. 조끼도 물통도 허리에 묶은 신발도 다 벗어 던지고 필사적으로 뛰었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이러다가 모든 수고가 허사로 끝나겠다!’ 바흠은 낙담했지만 언덕에서는 바시키르 사람들이 손짓을 하며 아우성을 쳤다. 바홈은 숨이 차고 죽을 것 같지만 넓디넓은 땅을 가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털모자 앞에 앉은 촌장은 배꼽을 잡고 크게 웃고 있었다. 새벽의 꿈을 떠올린 바흠은 깜짝 놀랐지만, 결국 촌장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 모자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바흠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촌장이 소리쳤다.

“와, 대단하군! 좋은 땅을 얻었소!”

바흠의 하인이 급히 달려와 주인을 안아서 일으키자,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숨을 멈췄다.

바시키르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며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하인은 삽으로 주인이 묻힐 땅을 파 내려갔다. 바흠의 발에서 머리까지 묻힌 땅은 겨우 6피트에 불과했다.

욕망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낫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삶일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도 필요하지만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어리석게 인생을 망치는 바보들이 많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려갈 때는 달려가야 하지만 멈추어야 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바흠이 달려가다가도 태양이 중천에 있었을 때 ‘여기에서 돌아가야 한다. 앞에 보이는 땅이 아무리 좋아도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하루종일 수고한 것이 허사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돌아서야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이유는 바흠이 돌아가야 할 때를 놓치고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하듯이, 과도한 욕망에 취해서 살다가 죽는 현대판 바흠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말을 남겼다. “재산의 수준을 높이기보다는 욕망의 수준을 낮추도록 애쓰는 편이 오히려 낫다.”

불행으로 이끄는 인계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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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에 있으면 신나는 음악이 흐르면서 잭팟이 터져 동전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하면서 대박의 꿈을 꾸게 만들고, 마음을 흥분시켜 도박욕을 더욱 자극한다고 한다. 슬롯머신에서 돈을 딴 뒤 나오는 축하 음악은 다시 게임에 도전하도록 부추기는데, 그 맛에 빠지다 보면 결국 수중의 돈을 다 잃게 되고 말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 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대박이 터질 것 같은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가 누구든지 이미 준비된 고도의 심리전에 말려드는 것이다.

도박에 빠진 도박꾼들은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예측하려고 애쓰며, 대박에 대한 환상을 꿈꾸고 스릴을 즐긴다. 그 대가로 자신의 돈과 건강, 인생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뿐 아니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2차적 피해와 고통을 준다.

나는 도박이나 게임에 빠져 인생을 망친 사람들을 적잖이 만난다. 내가 아는 한 부인은 아주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인데, 남편이 도박에 빠져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도박의 유혹에 빠져 가진 돈을 탕진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당시엔 잃은 것을 만회하려는 심리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그 열매는 너무나 쓰다. 낚시꾼의 미끼 안에는 무서운 바늘이 들어 있지만 어리석은 물고기는 그 안에 든 바늘이 안 보인다. 덥석 물어버린 유혹의 미끼로 인해 잠시 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라오고 매운탕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물고기는 모른다. 작은 유혹과 방심은 파멸의 신이 놓은 끔찍한 덫일 때가 많다.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은 ‘난 딸 수 있어’라고 하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자기 암시에 기대를 둔다. 그리고 돈을 자꾸 잃으면서도 ‘아직은 괜찮아, 기회는 다시 올 거야. 한 번만 기회가 오면 금방 만회할 수 있어’라는 자기 생각을 믿는다. 그 생각을 못 버리면 결국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든다. 계속 돈을 잃으면 ‘아, 나는 도박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계속하면 할수록 더 많은 돈을 잃겠구나’ 하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 모습이 정확하게 보이면 자기 판단을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자기를 끌고 가는 유혹을 향해 “Time to say goodbye” 하고 마음에서 작별을 고할 수 있다. 그 유혹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끄는 달콤하고도 무서운 인계철선(引繼鐵線·trip wire)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한규

고향이 경북 성주인 그는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뒤, 교단에서 여러 해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경험들을 토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 철학과 부모의 역할에 대하여 꾸준히 글을 써 오고 있다. 전국 대안학교 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지냈고, 최근에는 청소년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교육 특강 및 개인 상담을 온라인으로 하고 있다. 본지 외에 신문에도 칼럼을 연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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