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은 나직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소설에서 주인공 스티븐스는 6일간 여행을 하며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본다. 기억의 촛대 위에 하나하나 불을 켜고 간 사람들과 때늦은 재회를 하며 그는 말한다. “이제 와 무엇을 숨기리오.” 인생의 황혼녘에 떠난 낯선 여행길에서 그는 비로소 눈물을 쏟는다.

스티븐스는 영국 달링턴 가문의 대저택을 35년간 관리해온 수석 집사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달링턴가는 높았던 명망을 잃고, 대저택은 패러데이라는 미국인에게 팔린다. 대저택의 새 주인 패러데이는 스티븐스를 불러 자신이 여름휴가 때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차를 빌려줄 테니 어디든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한다. 스티븐스는 정중히 사양하지만, 그가 오래 전에 사랑했던 여인 켄턴에게서 7년 만에 온 편지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그는 편지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녀가 있는 서부 지방으로 6일간의 짧지만 긴 여행을 시작한다.

품위 있는 위대한 집사가 되고 싶었던 스티븐스는 달링턴 저택에서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느라 나이가 지긋해질 때까지 집에서 가까운 관광지 한번 둘러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집사로서 주인의 활동을 뒷바라지하며 ‘담장 안에서 영국의 진면목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일을 마치는 시간이면 스티븐스는 동료들과 하인 전용 홀의 난롯가에 둘러앉아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몇 시간씩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는 것이 최고의 집사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저택 홀에서 중요한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하느라 아버지를 돌아볼 수 없었다. 이틀 후에 아버지가 깨어나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했지만, 스티븐스는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좋아지신 걸 보니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바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고,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그 시절, 스티븐스 곁에는 가까이에서 일하던 총무 켄턴 양이 있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스티븐스는 꽃을 가져다주는 켄턴의 마음도, 켄턴을 향한 자신의 마음도 모른 척한다. 최고의 집사로서의 삶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달링턴 저택을 떠나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날, 달링턴가의 주인 달링턴 경은 열심히 일하던 두 하녀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하라고 지시한다. 동료들은 해고가 부당하다고 집사인 스티븐스에게 항의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주인의 말에 복종한다. 당시 스티븐스가 무조건 믿고 따랐던 달링턴 경은 나치 추종자가 되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스티븐스를 통해 달링턴 경에게 진실을 알리기 원했지만, 그는 “죄송하지만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스티븐스는 다만 식탁을 말끔히 치우고 식사에 차질이 없게 준비하고, 은그릇을 반짝이게 닦아 유명 인사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등 일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처리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달링턴 경을 섬기는 일이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이라고 자부했고, 그것이 위대한 집사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 일들이 다 지나가고, 어느 날 집사의 일상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스티븐스는 자기 삶의 궤적을 조금씩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만난 켄턴에게서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며 피할 수 없는 진실과 마주한다.

“어쨌든 꼭 답변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당신도 말씀하셨듯이 이제 우린 오래도록 다시 못 볼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지금의 남편을 사랑합니다.”

켄턴은, 달링턴 저택을 떠날 때에는 그것을 스티븐스를 약 올리기 위한 하나의 책략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처음에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괴로웠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자상함과 성실함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켄턴은 곧 첫 손자를 보게 된다고 하며, 스티븐스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가요. 달링턴가로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스티븐스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지만 “일, 그 다음에 또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요.”라고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나서 반가웠다고, 부디 남아 있는 나날 동안 행복하자는 인사를 남긴 채 헤어진다.

해질녘 선창에 홀로 남겨진 스티븐스. 그는 전직 집사였다는 낯선 노인과 대화하다 눈물을 쏟는다.

“돌아가신 지 3년째라고 했죠? 그 나리인가 뭔가 하는 양반한테 애착이 컸던 것 같군요.”

“달링턴 나리는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는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시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그렇게 한 것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때 어두워진 선창의 가로등들에 불이 들어오고,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환호한다. 노인은 스티븐스에게 자신이 쓰던 코 묻은 손수건을 건네며 말한다.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 일을 끝냈어요. 이제 다리를 쭉 뻗고 즐겨요.”

저녁은 사람들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스티븐스는 새롭게 마음을 먹는다. 이제 열심히만 살지 않고, 새 주인이 감탄할 만큼 농담 기술을 발전시키겠다고.

자신의 삶이 편협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야 해.’ ‘저렇게 살아야 해.’ 그런데 그 소신은 종종 스스로를 얽어매는 규칙과 법이 되어버린다. 그것을 따라서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어느 날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편협했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스티븐스가 황혼의 어느 날 자신의 지난 삶이 빈껍데기와 같았음을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티븐스는 ‘품위 있는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그 목표가 그를 어떤 틀에 가두어 곁에 있는 사람이 아플 때 슬퍼할 수 없었고, 그리울 때 그리워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마음도 그리운 마음도 모두 정갈히 접어 없는 척 살았다. 그로 인해 그는 유대인 하녀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가 마음을 다해 섬겼던 달링턴 경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이 최고의 집사라고, 잘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는 그런 자신을 고백하며 눈물을 쏟는다. 스티븐스는 낯선 노인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젠 돌아가 농담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겠다고 말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고, 실없는 농담에도 함께 웃으며 살겠다고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가둬두었던 틀에서 나오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달링턴 저택으로 돌아가서 어떤 삶을 살지 상상해 보았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겠지만, 주인과 꽤 자연스레 농담을 주고받고 동료들의 즐거움과 아픔에 공감하며 웃기도 하고 눈물도 흘리는 날이 오지 않았을까.

책을 덮으며, ‘지금 나는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해본다. 나 또한 잘해야 한다는 나름의 규칙 속에서 살며 소중한 것들을 잃었던 적이 있고, 그 사실을 발견하고 불필요한 삶의 규칙들을 많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내 삶에는 불필요한 규칙들이 곳곳에 소소하게 배어 있어서 삶을 편협하게 만든다. 나는 잘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그런 사실들을 느끼지도 못한 채 말이다.

어쩌면 스티븐스가 오랜 세월 이어온 삶의 방식을 바꾸기 어렵듯 나 또한 그럴것이다. 그래도 한 번씩 스티븐스를 떠올리며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하고, 옆 사람의 슬픔에 함께 울기도 하고,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고, 그리운 마음도 표현하며 살려고 한다.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면 삶이 아름다울까? 남아 있는 나날을 우리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라고 <남아 있는 나날>은 말한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쓴이 심문자

도서관에서 북클럽 멘토링과 한국 마사회 문화센터에서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라디오 ‘북적북적 북클럽’ 진행자이다. 독서지도사, 청소년상담사, 독서논술교사 등 책과 관련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일본 태생의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1989년에 발표해 문단과 독자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장편 역사소설이다. 4년 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영화로 제작했으며, 1989년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부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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