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코로나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한 해다. 나는 대구에서 치위생사로 일하고 있다. 평소 여느 사람들보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라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하자 누구보다 재빨리 마스크를 썼고, 손이 건조해질 정도로 부지런히 씻었다. 주변에서 “너는 절대 안 걸리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3월 나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 감염 위험을 피해 카페 대신 갔던 친구의 집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나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모두 정상이었다. 나만 양성이었다.
며칠간 몸살처럼 근육통으로 너무 아팠다. 격리되어 치료를 받을 생활 치료센터에 자리가 나기까지는 2~3일이 더 걸려, 나는 잠시 집에서 격리 생활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이 컸다. ‘하필이면 왜 나야?’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걱정이 올라왔다.
‘이러다 병원에서 잘리는 건 아닐까?’
‘동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원장님이 날 미워할지도 몰라.’
뉴스를 보면 볼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감염되면 폐가 망가진다느니, 평생 후유증에 시달린다느니 등등. 이런 걱정들도 나를 어렵게 했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여러 생각들이 물밀 듯 들어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는 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문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수영아! 우나? 코로나가 뭐라고 우리 딸을 이렇게 아프게 하노!”
“엄마, 여기 가까이 오지 마라!”
그날 엄마와 나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밖으로 이동해 구급차와 전세버스를 타고 전북 김제에 위치한 생활 치료센터로갔다.
일인 기숙사 안에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단조로운 생활이 반복되었다. 증상은 조금 괜찮아진 듯했지만 혼자 있다 보니 집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던 걱정과 생각들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조용히 기도를 해주셨다.
그 기도를 듣다 보면 불안했던 내 마음이 평안해지곤 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다같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떨어져 살며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내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하나둘 연락이 왔다. 그중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을 만큼 친한 사이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잘 만나지 못하던 친구였다. 나는 오랜만에 그 친구와 긴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코로나에 걸렸을 때의 심정, 이곳에서 지내며 느꼈던 부모님의 사랑이나 전에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내 일을 자기 일처럼 걱정하는 친구가 고마웠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 있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몸 컨디션이 좋아졌고, 11일 만에 나는 건강을 회복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병원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고, 원장님을 비롯해 누구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전에는 늦은 시각까지 밀리는 환자들을 보면 불평이 올라왔는데 그때부턴 환자들을 만나고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벌써 8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지난 3월에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자주 떠올린다. 작은 방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날을 생각하면 오늘 하루가 소중하고, 내 곁에 같이 웃을 수 있는 가족이 있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글=강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