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가족과 행복한 가족

매일 만나기만 하면 싸우다시피 하는 한 가족이 있었다. 남편과 아내는 무슨 말만 하면 트집을 잡고 상대편 탓을 했으며, 지난 잘잘못을 하나하나 들추어내어 서로를 공박했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싸웠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아이들도 원망하고 불평하느라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상처를 받아 마음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덧나기 일쑤였다. 그 가족들은 모두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가족의 바로 옆집에는 항상 웃음꽃을 피우며 행복하게 사는 다른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그 마음에는 언제나 믿음과 평안, 기쁨과 행복이 가득했다.

매일 싸우기만 하던 불행한 가족이 어느 날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가족은 행복하게 사는 옆집 가족을 찾아가서 어떻게 그처럼 행복하게 사는지 비결을 물어보기로 했다.

드디어 행복하게 사는 집에 찾아가서, 그 집의 부부가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행복하게 사는 집의 아들이 부엌에서 아주 비싸 보이는 도자기를 만지다가 와장창 깨뜨리고 말았다. 그 집을 방문한 불행한 가족은 다들 속으로 ‘큰일을 저질렀구나. 저 비싼 걸 깨다니! 조심성 없는 저 아들 놈은 혼꾸멍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있었다.

그 아들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 다치지는 않았니? 내가 도자기를 넘어지기 쉬운 자리에 올려놨구나. 미안하다. 많이 놀랐겠네? 우리 아들!”

그러자 아버지가 나섰다.

“아니오. 도자기를 거기 두는 게 아무래도 불안해 보여서 내가 다른 데로 옮겨놓아야지 했는데 미처 치우지를 못했으니 내 잘못이 크오.”

이번엔 아들이 말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어머니! 제가 조심성이 없어서 귀한 도자기를 깨뜨리고 말았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가 정말 아끼시던 도자기였는데 너무 죄송해요.”

내가 화를 내는 순간 그 도자기보다 훨씬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을 깨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건 바로 우리 가족의 행복이랍니다.
내가 화를 내는 순간 그 도자기보다 훨씬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을 깨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건 바로 우리 가족의 행복이랍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불행한 가족은 뜻밖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불행한 가족의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저 비싼 것을 깨버렸는데 화가 나지는 않습니까?”

그러자 상대편 아버지가 말했다.

“화를 내서 도자기가 원래 상태로 되돌아온다면 화를 내겠지요. 화를 낸다고해서 깨진 도자기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화를 내는 순간 그 도자기보다 훨씬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을 깨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건 바로 우리 가족의 행복이랍니다.”

칠레에 등을 돌린 예수상

아르헨티나의 멘도자Mendoza와 칠레의 산티아고Santiago를 잇는 국경 부근의 옛 도로에서 가장 높은 곳이 우스파야타 고개다. 해발 3,832미터나 되는 이곳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조각가였던 마테오 알론소Mateo Alonso가 만든 7미터 높이의 예수님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안데스의 예수님상’이라고 불리는 이동상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분쟁이 평화롭게 타결된 것을 기념하여 1904년에 제막되었다.

오랫동안 국경 분쟁으로 인해 무력 충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두 나라 사이에 외교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고 평화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전투태세에 있던 3,000명의 칠레인과 아르헨티나인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산 정상에 올라 함께 축포를 쏘았다. 양국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두 개의 명판이 제막되었는데, 명판 중 하나에는 스페인어로 “구주 예수의 발밑에서 끝까지 유지하기로 서약한 평화를 만약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깬다면 즉시 이 산의 바위들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동상의 방향 때문에 모처럼의 평화가 와해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이유인즉, 산세와 지형을 따지다 보니 예수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 쪽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칠레 국민들 사이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는 등을 돌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만 바라보는 거야?” “예수님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만 복을 주시는 거야?”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는 등을 돌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만 바라보는 거야?” “예수님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만 복을 주시는 거야?”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는 등을 돌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만 바라보는 거야?”

“예수님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만 복을 주시는 거야?”

누군가에게서 나온 이 말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했고, 그 말은 수많은 칠레 사람들을 자극시켰다. 마침내 이렇게 동상을 세우는 일은 칠레를 무시한 처사라는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 이런 불편한 감정이 칠레인들을 점점 격동시켰고, 양국 간에 모처럼 형성된 화해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한 기자의 재치 있는 기사가 난국을 잘 수습하고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기자는 예수님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칠레 국민들은 이미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 주님의 보살핌과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르헨티나 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읽은 칠레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쳤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한 사람의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갔는데, 한 사람의 지혜로운 문장 한 줄이 칠레 국민들의 마음에 고조되고 있던 불신과 원망을 말끔히 없애고 두 나라를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솔로몬의 잠언 중에 “모만侮慢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미련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불에 기름을 붓는 듯한 일을 하고, 슬기로운 자들은 노를 그치게 한다.

마음의 눈을 뜬 개그맨

1990년대 중반에 가수 겸 개그맨으로 활동한 이동우 씨는 신혼의 행복에 젖어있던 2004년에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다. 결혼식을 올린 지 2개월 된 이씨 부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밤만 되면 물건이 잘 보이지 않아 야맹증으로 의심했던 이동우 씨에게, 눈의 망막에 있는 세포가 변성돼 망막의 기능이 소실되면서 주변 시야가 차츰 좁아지고 결국 시력을 잃게 되는 진행성 질병이 찾아온 것이었다.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한 그는 2010년 실명 판정을 받았다. 사랑하는 아내는 물론 주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그는 “마치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다.”라고 한다. 방송을 좋아하던 그는 방송에서 자기를 해고시킬까 두려워 패닉상태가 되었고 현실을 부정하며 분노와 우울증에 빠져 여러 번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와 딸, 그리고 칠순이 넘은 노모의 얼굴이 떠올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장애를 얻고 나서 단순하고 교만했던 제가 생각도 많이 깊어지고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얻고 나서 단순하고 교만했던 제가 생각도 많이 깊어지고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생계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쓰러졌고, 한쪽 귀의 청력마저 잃었다. 이씨는 시력과 일거리를 잃었고, 아내는 청력과 운영하던 가게까지 잃었다. 이씨 곁을 떠나지 않고 “당신이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며 격려해 주던 아내였다.

그런데 어느 날, TV를 통해서 이동우 씨가 희귀병을 앓고 있고 치료법이 없다는 사연을 접한 어떤 사람이 건 전화를 받게 된다. 그는 근육병으로 몸을 서서히 가누지 못하다가 이젠 두 눈만 온전히 남은 임재신 씨였다. 그는 “나에게 남은 5%를 이동우 씨에게 주면 그의 삶이 100%가 되지 않을까”라는 말과 함께 기증의사를 밝혔다. 이씨는 기쁜 마음으로 임씨가 산다는 천안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눈을 기증받지 않고 왔다. 그냥 돌아온 이유를 묻자 “이미 눈을 기증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임재신 씨는 사지도 못 쓰고, 오직 성한 곳이라곤 눈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고 온 이씨는 말했다.

“나는 하나를 잃고 나머지 아홉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 남아 있는 것마저 저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걸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개를 가지면 두 개를 가지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인데, 임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소>로도 알려졌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이씨 부부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인 딸이 생겼다. 이동우 씨는 “소원이 있다면 단 5분 만이라도 딸 지우의 얼굴을 보는 겁니다. 아내는 예쁘다는 걸 보아서 알지만 딸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쁘게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든든한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와 딸아이와 나누는 사랑의 힘으로 시련과 절망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장애를 얻고 나서 단순하고 교만했던 제가 생각도 많이 깊어지고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행복은 마음에서, 불행도 마음에서

사고를 깊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1차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산다. 그런데 사고가 유연하고 열려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고, 남들이 갖지 못한 생각을 하며 어두움과 불행에서 벗어나 밝고 행복한 삶을 산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인생의 밝은 면을 보고 사는 사람이 있고, 늘 인생의 어두운 면을 보며 사는 사람이 있다. 의부증에 걸린 아내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지 의심하고 불신하며, 남편을 믿는 아내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대한다. ‘자살’이라는 글자를 반대로 하면 ‘살자’가 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면을 보느냐,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행, 불행을 결정한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한 황제였지만 “내 생애에 행복한 날은 6일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반면에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내 생애에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복되고, 감사할 조건이 많이 있는데도 불평하고 원망할 조건을 보며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행복은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불행도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독자들 마음밭에 밝은 생각의 씨앗을 심고, 어두운 생각의 잡초들을 뽑아내 자기 인생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게 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이한규

그는 오랫동안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들을 토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 철학에 대해 본지에 연재하고 있다. 전국 대안학교 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지냈고, 최근에는 청소년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교육 특강을 온라인으로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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