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 좋지만 환자들에게 호통 치는 의사선생님, 좋은 선생님일까? 나쁜 선생님일까?

나는 오랜 세월 병을 달고 살았다. 태어나 첫돌도 안 되었을 때에 급성패혈증을 앓아 코와 귀의 기능이 많이 망가졌고 만성 비염과 중이염에 시달려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 병원 저 병원 추천해줬지만 모든 병원에서 나는 완치할 수 있는 길이 없는 특수한 경우라고 결론지었다.

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고 다른 귀에도 진물이 계속 생겨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찾아가 진물을 빼주어야 했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 일쑤였고, 내게 유일하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은 병원에서 만나는 간호사들이었다. 나도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어 간호대학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간호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방황하던 그때, 나는 새로운 삶을 찾아 아프리카 말라위로 해외봉사를 떠났다.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들리지 않는 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현지인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못났다 여기고 나만 지키려 했던 ‘좁은 마음’이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지내며 ‘아프리카를 위해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 나는 정말로 몇 년 후 아프리카로 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실, 내가 수 년간 해외에 나가 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언제 귀가 안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선생님께서 ‘언제나 길은 있다’고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따라 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기 위한 진단서가 필요해 우리나라에서 귀를 제일 잘 치료한다고 알려진 병원을 찾아보았다.

인터넷으로 어떤 병원에 대해 알아보니 평판이 굉장히 엇갈렸다.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봤지만 이렇게 환자를 혼내는 의사는 처음이네요.”

“설명 굉장히 자세하게 해주시고 실력 좋아요.”

정확한 진단과 최고의 치료라는 리뷰가 있는 반면, 그 반대 댓글도 많았다.

그래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 병원을 방문했고, 진료실에서 드디어 악평과 호평이 공존하는 원장님을 만났다. 내 귀를 살피신 원장님께 곧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며 진단서를 부탁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날카롭게 말씀하셨다.

“말이 돼요? 이 귀로 어떻게 아프리카에 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척 불쾌했다.

‘무슨 말을 이렇게 하지….’

순간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 읽었던 부정적인 리뷰가 떠올랐다. 그런데 한편으론 틀린 말이 아니다 싶었다.

“무슨 소린지 아니까 진단서만이라도 주세요.”

그런데 그때, 선생님이 예상치 못한 답을 하셨다.

“지금 환자분 귀는 유양동이라는 큰 공간에 진물이 가득 차 있어요. 이곳에 진물이 차지 않고 흘러나오도록 수술을 하면 돼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내 귀를 의심했다. 26년 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고 수술도 해봤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장님은 새로운 수술법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수술을 받아 나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진료를 받던 날, 원장님이 내게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해주셨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원장님은 내게 불쾌한 의사가 아닌, 큰 은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프리카로 떠났고, 3년 동안 귀에서 진물이 자연스레 빠져나와 병원에 가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었다. 내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최근, 수술을 받았던 기관이 아닌 귀의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겨 다시 잘 들리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는 치료가 되지 않기에 한국으로 왔고,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다. 병원에 들르기 전, 방문자 리뷰를 한 번 확인하니 혹평하는 환자들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원장님은 내게 “아프리카 잘 다녀왔어요? 또 나가실 건가요?”라고 물으며 각별히 진료를 해주셨다. 그리고 고심하다가 다른 수술을 하자고 하셨다. 수술 당일 원장님은 내 수술을 위해 아침 일찍 나오셨다. 수술을 받은 후에는 밤늦은 시각에 선생님이 병실에 있는 나를 찾아오셨다. 병원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마지막까지 환자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시는 것 같았다.

문득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몇 건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선천성 난청으로 말을 못 하던 아이가 수술 후 처음으로 말을 하던 날 느꼈던 감동은, 마치 제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행복과 맞먹는 것이었어요. 그날 저는 평생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남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원장님은 2008년부터 동남아 일대로 꾸준히 의료봉사 활동을 다녀오고 있었다. ‘자신이 필요한 곳에 남고 싶다’는 그는 동남아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나에게 그토록 마음을 써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후 진료를 받던 날 내가 선생님에게 슬쩍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정말 좋은 의사인데, 호통만 안 쳐도 사람들이 참 좋아할 텐데요.”

그러자 선생님은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만난 듯 즐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러면 병원은 잘 되겠지만, 저는 그것보다 병을 잘 고치는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 가끔 환자분들이 잘못된 의료 상식을 가지고 올 때가 있어요. 병원에 와도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치료가 어려워요. 환자 자신이 만든 편견을 깨야 정확한 진료 및 치료가 가능하죠.”

“사람마다 맛이 다르다. 나의 옳음을 버리면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종종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생각할수록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 말 같다. 나는 말라위에서 내가 굉장히 고립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것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자 마음의 폭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이전에는 속이 좁고 감정싸움이 빈번해 각가지 문제를 일으켰는데, 내 생각과 다른 생각들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혜롭고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만약 내 기준 안에 살았다면 나는 원장님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났다 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혹독한 비평 리뷰를 남긴 사람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원장님은 내 은인이 되었다. 최근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은 나는 재정비를 한 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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