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며 살기 어려워진 현대 사회, 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면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는 걸까?

손원평의 장편소설 <아몬드>는 선천적으로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가지고 태어난 윤재와 문제아 곤이가 서로 화해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따뜻한 이야기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는 괴물 취급을 받던 윤재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으로 변모하는데, ‘윤재와 곤이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 과정을 찾아가본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 윤재

윤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린 시절, 그는 선천적으로 외부의 자극을 느끼는 *편도체(뇌의 변연계에 속하는 구조의 일부로서, 감정과 학습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크기와 생김새가 아몬드와 유사해서, 윤재 엄마는 아몬드를 많이 먹으면 윤재 머릿속 아몬드도 커질 거라 생각해 삼시 세끼 아몬드를 식탁 위에 올린다)의 크기가 작아서 기쁨도 슬픔도 공포감도 느끼지 못하는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손을 데여도, 큰 검둥개를 보아도, 심지어 자동차가 달려와도 멍하니 그대로 서있다. 누가 넘어져 다치거나 힘들어해도 그냥 바라볼 뿐 감정 표현을 못한다. 엄마는 이런 윤재에게 행복할 때나 슬플 때 어떻게 감정 표현을 해야 하는지 그 대응법을 미리 가르쳐 주고 연습을 시킨다.

이러한 윤재의 병을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된다. 엄마가 유치원에 윤재를 데리러 가지 못한 날 6살 윤재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놀랄 만한 사건을 목격한다. 여러 명의 아이들에게 맞아서 죽어가는 한 아이를 보았는데 윤재는 놀라움, 두려움, 슬픔이라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태연하게 말한다. “골목에 누가 쓰러져있어요. 죽을지도 몰라요.” 윤재의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늑장을 부리고 신고도 늦어진다. 결국 다친 아이는 죽고 마는데, 그 죽은 아이가 바로 가게 주인의 아들이어서 윤재는 더 큰 원망과 비난을 받는다.

더 참담한 사건은 윤재의 16살 생일에 일어난다. 가족끼리 외식하러 나갔다가 엄마와 할머니가 괴한을 만난다.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범인은 자신의 삶을 비관해 그날 행복하게 웃는 사람과 함께 저승길을 가겠다며 망치와 흉기를 무차별로 휘두른다. 이 사건으로 윤재의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엄마는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윤재는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괴물 취급을 받는다. 엄마가 하던 헌책방을 운영하며 지내던 어느 날, 윤재는 책방을 찾아온 대학교수 ‘윤 박사’로부터 병이 들어 죽어가는 자신의 아내 앞에서 13년 전 잃어버린 아들 역할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딱히 해가 되지 않는다면 도와주는 편이 좋다’라고 말씀하시던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언을 떠올리며 윤재는 윤 박사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 일을 계기로 윤박사의 진짜 아들인 ‘곤이’를 알게 된다.

괴물이 괴물을 만나다

곤이는 윤재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오고, 센 척하는 곤이는 윤재를 괴롭히고 자신의 괴롭힘에 끄덕하지 않는 윤재에게 흥미를 느껴 헌책방에 자주 들른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된다. 곤이를 만난 윤재는 ‘괴물인 내가 또 다른 괴물을 만났다’라고 표현한다. 윤재가 감정 표현 불능이라면 곤이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고 모두 표출하는 아이다. 극과 극인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시작은 싸움이었지만 함께 지내며 서로를 이해한다. 윤재는 곤이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후 보호시설 등을 전전하며 받은 상처로 인해 자신을 강하게 보이려 하고 자신의 분노나 감정을 여과없이 표현하게 되었음을 알고, 그런 그에게 오히려 친근감을 느낀다. 윤재는 곤이의 풍부한 감정을 그대로 느끼면서 곤이와 친구가 된다.

윤재는 “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곤이가 필요했다. 곤이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단순하고 투명했다. 나 같은 바보조차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라고 말한다. 체면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진솔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윤재에게 와 닿았던 것이다. 그런 곤이의 진솔하고 풍부한 감정을 만나자 윤재는 조금씩 반응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곤이는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더 강해지겠다며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윤재는 곤이를 찾아나선다. 센 척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렇게 말다툼을 하던 사이, 곤이 소년원 선배이자 그를 괴롭히는 ‘철사 형’이 등장하고 곤이를 데려가려던 윤재는 철사 형에게 칼을 맞는다. 다행히 윤재는 깨어나지만 곤이는 쪽지 하나만 남겨두고 다시 떠난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 곤이는 떠났지만 뭉툭한 글씨로 쓴 곤이의 마음이 윤재의 감정 표현 불능의 마음에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쪼그라진 편도체가 무한대로 부풀어오른 것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가 다시 깨어나는데 감정 표현 불능의 윤재가 엄마를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괴물 같았던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만나며 감정을 느끼고 고마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괜찮은 척’ 말고 ‘괜찮은 삶’을 살자

아몬드를 읽으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후천적으로 감정 표현 불능자들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정말 괜찮은 삶을 살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괜찮아 보이는’ 삶을 살아갈 때가 많다. SNS에 멋진 사진과 좋은 이야기를 올리고, 다른 사람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는 건 쉽지만, 오늘 내가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섭섭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어렵다. 마음을 숨기며 사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가족 사이에도 모르는 척 넘어갈 때가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일을 하거나 살아가다 보면 서로 부딪히고 상처 받는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괜찮은 척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사는 존재가 아닌가. 피하고 괜찮은 척 내 마음을 숨기고 살아가다 보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순 있지만 ‘고마움’ ‘미안함’ ‘기쁨’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고립되면 작은 상처가 어느새 쌓이고 쌓여 눈덩이처럼 커지고, 마음이 무거워져 우울해지기도 한다.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를 해친 끔찍한 사건도 고립된 한 평범한 시민이 자신만 불행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저지른 일이었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다가 그 마음이 커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다.

‘괴물’이라 불리던 윤재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곤이의 진심, 마음을 만나고 소통하면서부터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곤이처럼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자주 표현하고,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못해도 한 사람에게라도 자신의 고민과 아픔과 미안함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머릿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마음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만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글쓴이 심문자

도서관에서 북클럽 멘토링과 한국 마사회 문화센터에서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라디오 ‘북적북적 북클럽’ 진행자이다. 독서지도사, 청소년상담사, 독서논술교사 등 책과 관련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몬드> 2017년 3월 출간 후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이다. 최근 영화감독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작품이며, 2020년 일본 서점 대상 번역 소설상을 최초로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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