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무시하고 부정적인 면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필터를 끼우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퇴계와 맏며느리 봉화금씨

조선시대의 유학자 퇴계 선생의 맏아들 이준의 아내는 봉화금씨奉化琴氏였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갔는데, 사돈댁 집안 사람들로부터 미천한 가문이라며 외면과 홀대를 받았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이어져 명성이 드높은 집안이었다. 퇴계가 맏아들의 혼례를 끝내고 사돈댁을 떠나자, 봉화금씨 일가 친척들이 몰려와 이렇게 따져 물었다.

“우리 가문의 규수는 어느 명문가에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진성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을 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그러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모욕감을 느낀 퇴계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다. 그때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았으니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두시지요.”

퇴계는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과 덕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시다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금씨의 묘는 지금도 퇴계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시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복한 봉화금씨는 내조의 덕을 쌓고 지극한 효행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퇴계 선생의 비문은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금씨 집안의 금보(琴輔, 퇴계 선생의 백형 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 후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梓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퇴계와 둘째 며느리 류씨

퇴계 이황 선생은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내를 잃었다. 아들은 경상도 의령의 외가에서 키웠는데 몸이 워낙 약했다. 결국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던 때에 아들은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 며느리 류씨는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퇴계 선생은 홀로 된 어린 며느리가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유교적 규범에 얽매여 남은 인생을 쓸쓸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며느리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고, 둘째 며느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었다. 자신 역시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홀어머니가 평생 7남매를 뒷바라지하느라 당신을 희생하며 살아오신 것을 보았기에 더욱 측은했는지도 모른다.

애처로운 며느리에 대한 퇴계의 근심은 점점 깊어갔다. 게다가 당시에는 ‘보쌈’이라는 일종의 약탈혼도 종종 있던 시대였다. 홀로 된 여인을 강제로 보褓에 싸서 납치해 아내로 삼던 풍습이었는데, 퇴계는 혹시라도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사돈집 양쪽이 다 난처해질 것 같아서 밤이 늦도록 며느리가 기거하는 후원 별당을 돌면서 보살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이었다. 후원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며느리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며느리가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깊은 밤, 홀로 된 어린 며느리 방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야심한 밤에 며느리가 외간 남자를 불러들인 것일까? 우리 며느리가 그럴 아이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퇴계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퇴계는 며느리의 방 안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며느리 방 앞까지 가서 창호지 틈으로 방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며느리는 짚으로 만든 남편 모양의 허수아비 인형에 옷을 입혀 놓고는 그 앞에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인형과 마주앉아 산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보, 한 잔 드세요.”

며느리는 한참 동안 그 남편 인형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다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밤, 퇴계 선생은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사람이 만든 규범에 갇혀 저 젊은 며느리가 밤마다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며 평생을 수절해야 한단 말인가? 윤리와 도덕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을 잃은 저 아이를 평생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규범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 선생은 ‘저 아이를 가두고 있는 윤리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며칠 뒤 퇴계는 사돈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며느리를 친정에 보냈다.

‘아가, 그 동안 남편 잃고 마음이 많이 어렵고 힘들었을 텐데, 친정에 가서 푹 좀 쉬려무나.’ 그것은 사돈에게 좋은 신랑감을 물색해 새 삶을 살게 해주라는 시아버지의 묵시와 배려였다. 물론 양 집안간 사돈의 인연이 끝나는 일이라서 한편 서운하기도 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퇴계와 둘째 며느리의 해후邂逅

여러 해가 흐른 뒤, 어느 날 퇴계 선생이 한양까지 먼 길을 가게 되었다.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는데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다행히 산촌 한 인가의 불빛이 보여 그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룻밤 묵는 신세를 져야 해서 문을 두드렸다.

“한양으로 가는 과객過客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 노인께서 이 밤에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아래채 방이 하나 비어 있으니 주무시고 가십시오. 저 아랫방에 이부자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도 못 하셨겠군요.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제 아내를 시켜 저녁상을 차려 드릴 테니 찬은 변변찮지만 식사하시고 주무십시오.”

“고맙소이다.”

인심이 후한 젊은 남정네가 친절하게 하룻밤 묵어가라고 방을 내주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여장을 풀고 잠시 쉬고 있는데, 저녁상이 들어왔다. 시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음식 하나하나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간이 입에 아주 딱 맞아 너무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해서 또 밥상을 받았는데, 신기하게도 전날 저녁처럼 밥상 위의 반찬들이 퇴계가 평소에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로다. 우연히 들른 집 음식이 어찌 이리도 내 입맛에 잘 맞을까?’ 밥상을 물리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서려는데, 젊은 남정네는 가시는 길에 신으라며 자기 안사람이 만들었다는 버선 한 켤레를 가져다주었다.

“아니, 낯모르는 과객에게 버선까지 지어주다니 너무 고맙소이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하리이다.”

버선을 신어보니 너무 편안하고 발에 꼭 맞았다. ‘꼭 우리 둘째 며느리가 지어주던 버선같이 발에 꼭 맞고 편안하군.’ 퇴계가 주인과 작별하고 길을 떠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담 모퉁이에 서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여 공손히 배웅하는 여인이 있었다. 한눈에 둘째 며느리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 선생도 그 자리에 석상처럼 멈추어 서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며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어쩐지 음식이 이렇게도 입에 잘 맞을까? 그리고 버선도 어찌 이리 줄로 재어 만든 것처럼 발에 잘 맞더라 했더니 아가, 너였구나. 주인의 사람됨을 보니 이제 내 마음이 다 놓이는구나. 저렇게 착하고 심성 좋은 남편을 만나 오붓하게 사는 걸 보니 앞으로는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아가,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고맙다. 너를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몰랐는데, 하늘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었구나.’

행여 재혼한 며느리의 결혼 생활에 방해가 될까 싶어 모른 체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리며 한양으로 향했다. 퇴계의 마음은 너무나 행복하고 가벼웠다.

며느리 또한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아버님,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한번 뵐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뜻밖에 이렇게 아버님을 뵙게 되다니 더 이상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종종 아버님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평생 모셔야 할 아버님이신데, 자상하게 저를 보살펴 주시고 배려해 주신 아버님께 따뜻한 진지라도 손수 지어드리고 싶었는데,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까지 오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큰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아버님 덕분에 저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남편은 비록 많이 배우거나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착하고 후덕한 사람입니다. 아버님, 남편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지만 안녕히 가세요. 부디 건강하시고 제 걱정은 마세요.’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꿀 때

마음에 어혈처럼 뭉쳐 있는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으면 그것들은 한이 되고 아픔이 된다. 마음을 모를 때, 마음이 막히고 닫혀 있을 때 마음에는 응어리가 생긴다. 마음에 응어리진 한과 슬픔, 마음의 모든 병과 통증은 사랑으로 치료된다.

퇴계의 며느리들이 시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만났을 때 그 사랑에 마음이 눈녹듯이 녹아내리고, 모든 응어리가 풀어지듯이.

가난해도 때때로 슬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를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진심으로 배려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고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어려움을 너끈히 이겨낸다. 마음이 교감交感되면 마음의 한이나 슬픔은 눈 녹듯 사라지고, 감사와 행복이 만들어진다.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영약은 바로 사랑이고 진심어린 배려다.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의 상처는 빨리 아물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해진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소중한 마음의 세계를 잃어가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고, 가슴 뭉클한 감동이나 가슴 저린 그리움을 종종 맛보면서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행복과 사랑, 감사와 기쁨은 마음에서 느끼는 것인데, 마음을 빼앗기고 마음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음이 메말라가는 것보다 불행한 일이 없고, 마음이 윤택하고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다. 마음의 세계가 무르익어 잘 발효되면 겨우내 땅 속 장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먹는 김치처럼 깊은 맛이 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첨단 기기들의 편리함을 선호하면서 이런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이 삭막해지고 까칠해졌다.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은 테크놀로지 세상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마음의 세계를 하나하나 되찾고 지켜나가야 한다. 마음이 담긴 것들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이다. 마음이 실린 것들이 의미있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우주를 정복한다고 큰소리치고,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참된 행복은 머나먼 우주에서 찾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싹튼다. 우주를 개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깊은 내면의 세계를 개척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영혼의 정원이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 아름답다. 마음은 나누고 흘러야 맑아지고 촉촉해지고 행복해진다.

요즘 학생들을 만나 보면 마음에 없는 인사,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행복은 마음에 고이며, 마음에서 느끼는 것이다. 바쁜 일상에 쫓겨 소중한 마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옛 선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의 세계를 반추해 봄직하다.

글쓴이 이한규
현재 링컨하우스원주 교장이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들을 토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 철학에 대해 집필하고 있다. 전국 대안학교 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지냈고, 청소년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자녀교육 특강을 자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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