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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벗어났을 때 보이는 것들 '사람 사는 맛'
김선자 | 승인 2020.06.17 09:03

“센 베노. 센 베노.”

‘이게 무슨 말이지?’

“센 베노”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센베이 과자가 생각났다. ‘센 베노’라는 말은 “안녕하세요?”라는 몽골 인사다.

2019년 5월, 나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남편 직장을 따라 몽골에 왔다. 몽골에 와서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산등성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르촌, 그곳에는 수도가 들어오지 않기에 20리터 통에 물을 나르는 아이들, 낡은 버스에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타고 가는 많은 사람들….

한번은 오래 기다려서 버스를 탔는데,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갓 걸음마하는 동생을 안고 탔다. 어린 동생은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졸린 건지 계속 울어댔다. 형은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동생의 짜증을 묵묵히 받아주고 있었다.

비좁은 버스 안에서 나는 어린 두 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어릴 적 모습이 스쳐가면서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3층으로 창문 너머 놀이터가 보인다. 몽골의 7, 8월은 백야 현상으로 저녁 9시가 되어도 깜깜하지 않아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떠들면서 노는 아이들의 소리, 그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들의 소리…. 깔깔대면서 웃는 아이들의 소리가 귀에 들리면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아이들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도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신다. 그 놀이터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삐그덕거리는 놀이기구 3개가 전부인, 아주 허름한 놀이터다.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내 마음이 편해진다. 특별한 것도 없고, 꾸며놓은 좋은 것도 없고, 그냥 사람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고 아이들은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왜 나에게 잔잔한 편안함을 줄까?

몽골은 한국보다 가난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있지만, 문명으로 인해 빼앗겼던 ‘사람 사는 맛’을 이곳에 와서 다시 느낀다.

2019년 8월, 나는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7시간 떨어진 ‘에르데넷’으로 가야 했다. 마침 그때 도로를 공사하고 있어서, 같이 가는 분이 지름길을 안다며 그 길로 가자 해서 지도를 출력했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가기에 차안에서 먹을 음식도 잔뜩 준비했다. 새벽 3시에 출발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비포장 길을 달렸다. 새벽 이슬에 날개가 젖은 독수리, 자동차 소리에 놀라서 도망가는 작은 여우,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는 수만 마리의 소와 양과 염소, 그리고 말들이 차창 밖으로 지나갔다.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초원에서 컵라면에 밥을 말아 아침을 먹었다. 물이 뜨겁지 않아서 라면이 과자처럼 씹히기는 했지만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짧게 끝나버렸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초원 깊은 곳에 들어가니까 GPS도 잡히지 않았다. 가던 길을 몇 번이나 다시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산을 스무 개도 넘게 넘었다.

몽골은 땅이 한국보다 15배나 넓다. 그런데 인구는 300만 명밖에 안된다. 우리 눈에는 넓은 초원만 보일 뿐 사람이나 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차에 휘발유가 얼마나 있지? 그리고 양식은…?’

꼭 우주에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과연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이렇게 산 정상에 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쉬면서 사진이라도 찍자’고 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감탄했다.

“와! 이거 무슨 냄새지? 이 산 속에 무슨 향수를 뿌렸나?”

허브였다. 몽골 초원의 풀들은 대부분 허브다.

“이야! 몽골의 양이나 염소가 이렇게 좋은 허브를 먹고 자라는구나.”

그리고 연한 보라색 꽃이 엄청 많았다.

“어머, 이거 부추잖아! 세상에 부추가 이렇게 많다니….”

우리는 정신없이 부추를 뜯었다. 부추는 꽃이 피었는데도 이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그때 갑자기 말을 탄 목동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순간 나는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목동은 우리에게 말을 타보았느냐고 하면서 자기 말을 타보라고 고삐를 건넸다.

‘말 안장도 없는데 어떻게 탈 수 있지?’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 말은 아주 순하게 길들인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순식간에 목동의 친구 여러 명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몽골 사람들은 시력이 대단히 좋다. 목동들은 멀리서도 친구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궁금해서 단숨에 달려온다고 한다.

그 목동은, 식사를 대접할 테니 자기 집에 가자고 하며 우리를 초대했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는 게 쉽지 않은데, 몽골은 땅은 넓고 사람은 적기에 손님을 대접하는 문화가 아주 자연스럽다.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서로 도와주고 또 도움을 입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편이다. 식당에 가거나 물건을 구입할 때 내 요구 사항과 맞지 않으면 조목조목 따진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불만을 갖는다. 그런 나를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몽골에 와서 30년을 다시 뒤로 돌아가서 사는데, 이제는 이런 삶이 그다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태껏 살아왔던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얼마나 조급했는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 ‘아! 내가 그동안 작은 기쁨들을 문명 속에서 빼앗기고 살아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에르데넷으로 가는 길에 정말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산에서 타이어라도 터졌더라면, 혹은 차가 고장나서 서버렸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 속에서 만난 목동의 도움으로 드디어 길을 찾았다. 꾸불꾸불한 흙길을 지나 마침내 포장된 도로를 만났다. 정말 기뻤다. 몽골의 도로는 군데군데 구멍이 많이 나 있다. 그래서 전방을 주시하면서 운전해야 하고, 한시라도 긴장을 풀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흙길에 비하면 움푹 파인 구멍이 많아도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이 정도면 최상급 도로다.

드디어 목적지인 에르데넷에 도착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보쯔(양고기를 넣은 만두), 호쇼루(튀김 만두), 삶은 양고기, 수태차(우유차)는 정말 진수성찬이었다. 그날 밤 나는 깨끗한 물로 샤워할 수 있었고, 침대에 누워 잠들 수 있었다. 그날은 지난 50년 동안 만났던 어떤 밤보다 정말 감사한 밤이었다.

글쓴이 김선자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독서라고 답한다. 투머로우 잡지 콘텐츠로 독서토론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지에 기고를 하게 되었다. 지난해 몽골에서 새로운 삶의 둥우리를 튼 그는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으로 그곳 삶의 색다른 맛을 정감어린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독서 외에 플루트 솜씨도 뛰어나다.

김선자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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