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상담 수업에서 만난 어떤 부인

오래 전, 대학원 집단상담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날 모인 20여 명의 사람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젊은 30대 여군,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는 40대 남성, 어린이집 원장을 하고 있는 50대 부인 등 연령도 직업도 달랐다. 처음 분위기는 서먹했지만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했던 분들이라 그런지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공감하며 금세 가까워졌다.

사회자 역할을 하는 교수님은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순간 강의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부인은 시어머니 병수발을 1~2년 정도 해드렸는데 몇 해 전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를 너무 그리워해서 큰형님도 원하지 않는 제사를 자청해서 맡겠다고 했고, 매년 어머니 기일에 작은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은 제삿날만 되면 너무 괴로워서 제발 이 제사를 그만두자고 남편에게 사정사정을 해도, 남편은 눈물까지 보이며 자기가 꼭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지내기는 하는데, 자기가 너무 싫어하니까 남편이 직접 장을 보고 음식도 하고 상차림까지 하고, 자신은 제사에 참여만 하면 되는데도 그마저 너무 싫다며 훌쩍거렸다.

부인이 울먹임으로 마무리를 짓자, 여기저기서 “어휴, 고생이 많으시네요.”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도 그 고통 알아요.” “정말 착한 분이시네요.” “절대로 못한다고 하세요.” 등등 발표자를 위로하고 이해하고 격려하는 말들이 오갔다.

나는 그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부인에게 질문했다.

“혹시 남편 분께서 평소에 부인을 어떻게 대해주세요?”

“남편이 자상하긴 해요. 아이들한테도, 저한테도 잘해요. 그리고 지금까지 애들 키우며 고생했다고 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라고 대학원까지 보내주고… 제사 지내는 것만 빼면 흠잡을 데 없는 남편이에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1년에 딱 하루인 어머니 제사를 지내면 어떨까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남편 마음 앞에 부인의 싫은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남편은 너무 행복하고 또 아내를 더 사랑할 텐데요.”

사람들은 내 말에 공감하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박했다.

“잘 모르셔서 그렇지,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만큼 힘든 일이에요.”

“어떻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세요?”

내가 말한 건 희생이 아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바꾸는 것이었는데, 참석자 아무도 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 강의실 안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남편의 이야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면 신혼의 단꿈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임신을 하고, 부부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보며 ‘아가야~ 엄마 아빠가 많이 사랑해~’ 하고 속삭이며 태어날 아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면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론 아기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초보 엄마에게 육아는 지금껏 겪은 어떤 시험보다 어렵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의 연속이다.

우유는 왜 이렇게 자주 먹여야 하고, 잠은 왜 그렇게 안 자는지… 겨우 재우고 이제 잠들었구나 싶어서 밥 한 술 뜨려고 하면 뒤척이면서 ‘으앙~’하고 깨고 기저귀를 쉴새 없이 갈아야 한다. 밤에 졸리면 자면 되는데, 족히 한 시간은 꽥꽥 소리를 지르다 지쳐 잠든다. “어떡해!”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외쳤을까? 집은 치우기가 무섭게 엉망이 되었고 집안일이라고 해도 청소와 젖병 설거지, 빨래 뿐인데도 왜 이렇게 하루는 짧고 팔다리는 저린 건지… 결혼하기 전에는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직장생활 하면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고 살았는데, 이 작은 생명체를 24시간 돌보는 게 정말 엄청난 일이 되었다. 옛날 엄마들은 어떻게 천기저귀 빨아쓰면서 밭일도 했는지 존경스러움이 밀려온다.

아기를 낳고 한 달 정도 됐을 때, 사람도 못 만나고 아기랑 둘만 있으니까 몸도 마음도 지쳐갈 때쯤, 이상하게 모든 화살이 남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기를 낳고 모든 것이 변했어. 배도 늘어나고 몸도 아프고 이까지 시리고… 밖에 못 나가니 사람도 못 만나고 인간관계도 너무 좁아졌다구. 내가 하는 일들은 이제 집안일과 육아에 국한되어버렸는데… 남편은 아내도 생기고 아기도 생기고 더 좋아지기만 했잖아!’ 하필 그때 남편의 출장이 유난히 잦았다. 남편은 출장 중에도 시간마다 아내에게 연락했다. ‘아기는 잘 있어?’ ‘여보, 뭐해? 밥 먹었어?’ 집에 돌아와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편이지만 모든 것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출장을 다녀와서 피곤해서 쉬는 남편을 보면 자신은 좀처럼 쉬지 못하는데 남편이 세상 편하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은근히 화까지 났다.

“여보! 나 너무 힘들어. 몸도 아프고 애는 울지. 정말 우울해. 당신은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는데 나는 집에 갇혀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나 끼니 챙겨 먹기도 힘들어서 매일 배고프다고… 제발 나 좀 도와줘!” 말을 하다 보니 설움이 더 북받쳐오고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남편은 아내 옆에 앉아서 한참을 말없이 듣다가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여보, 미안해. 내가 도와줄게.” 남편의 미안하다는 말에 눈물이 더 났다. ‘일부러 도와주지 않는게 아니란 걸 나도 아는데…’

그리고 남편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하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보한테 너무 고마워. 나도 사실 힘들 때가 많아. 직장에서 일을 잘 못해서 혼나고 또 잘하려고 하는데도 잘 안되네. 근데 여보가 지금 나 도와주고 있잖아. 나한테 귀여운 아들도 낳아주고, 내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내가 밖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자기를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 어리둥절하고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힘들어하며 겨우 해가고 있는 일들이 남편을 도와주는 꽤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전혀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우리 남편도 사실 힘들었구나…’ 남편이 우리 가정을 위해 지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가 조금 전해져 왔다.

남편이 도와주겠다는 말은 매번 하지만 사실 아내에게 대단한 도움은 못된다. 일주일에 어쩌다 한 번 물걸레 청소포로 10분만에 방청소하는 것, 아내가 피곤해서 잠들어 있으면 널려 있는 물건을 치우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내의 마음이 예전과 다르다. 하루 종일 아기 뒤치다꺼리하며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산다고 여겼는데, 그날 이후로 ‘지금 나는 남편을 도와주고 있는 거야. 난 좋은 아내야.’ 하는 생각이 다른 마음을 갖게 한다. 설거지를 해도 빨래를 해도 행복하고, 아기가 많이 우는 날에도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힘들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마음에 나를 고마워하는 남편의 사랑스런 마음이 들어오니까, 어느새 남편을 도와주는 행복한 아내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 산을 즐기는 남편

얼마 전 들은 강연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산에 가자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한다. 산에 가자는 사람이 남편이라고 했을 때, 아내는 생각한다. ‘산이 뭐가 좋아. 바다가 더 좋지. 파도가 철썩거리는 걸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질거야. 산은 오를 때 힘들기만 하잖아!’ 그렇다고 부부가 놀러가면서 산과 바다로 따로 갈 수는 없으니 아내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따라 산에 갔다.

이럴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난 바다가 좋은데…. 어쩔 수 없이 따라가지만 정말 산은 별로야.’라는 생각을 고스란히 가지고 가는 사람과 ‘남편이 산이 좋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나도 산을 같이 즐겨야지!’ 하고 산이 싫다는 생각을 접어놓고 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산을 오를 때부터 불평스러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등산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흙먼지도 날리고, 팔에 모기도 물리고… 산 중턱 정도 가면 숨이 목까지 차면서 ‘어떻게 끝까지 올라가지?’ 하고 답답해진다. ‘아, 다리 아파! 바다에 갔다면 지금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신나게 놀고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따라가지만 앞서 가는 남편 뒤통수를 향해 ‘이래서 산이 싫어!’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대신 남편을 향해 “이제 다 와가?”를 수십번도 넘게 물어본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의 마음도 분명히 편하지 않다. 억지로 설득해서 아내를 데려왔지만 아내의 심기가 불편한 걸 느낄 수밖에 없다. 괜히 아내를 데려왔나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반면에 바다가 더 좋지만 산을 좋아하는 남편의 마음에 함께 발맞춰 산을 오르는 아내는 조금 힘들긴 해도 등산의 즐거움을 같이 느낀다.

“여보! 산에 오니까 좋지?”

“그러네. 나무향이 참 상쾌해. 어? 산에 이런 꽃이 피었구나!”

전에는 몰랐던 산의 굽이굽이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여보, 오늘 보니까 등산도 재미있네~ 나한테 이렇게 멋진 풍경 보여줘서 고마워.”

“내가 고맙지! 여보가 같이 와줬는데. 다음에는 여보가 좋아하는 바다도 가자!”

남편의 눈에는 아내가 참 사랑스럽고 고맙다.

부부가 행복하게 동행하려면

거의 20년, 30년 이상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지냈던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 생활패턴, 소비습관, 성격, 좋아하는 음식까지 똑같은 것은 없다. 교차점을 찾으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같이 가기 위해서 때로는 아내가, 때로는 남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만약 희생하고 참으려고 한다면 너무 괴롭겠지만 내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행복하게 산을 오르는 부부처럼 두 사람이 기쁘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마음을 표현하는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여전히 남편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건성으로 ‘알았어. 알았어.’ 하고 대답할 때는 결국 같은 일로 다시 부딪쳤다. 일방적으로 참으며 따라가려고 하면 모양은 내도 속은 시끄럽고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화를 통해서 내가 옳다는 기준을 내려놓고 남편의 마음을, 아내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작은 습관이나 버릇도 신기하게 고쳐진다.

오래전 집단상담 시간에 만났던 그 부인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1년에 딱 하루, 그의 어머니를 함께 그리워해주면 어떨까? 산에 오르자는 남편의 말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산의 아름다움이 보이듯,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다른 각도에서 어머님의 기일이 보일 것이다. 어머님 생전에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추억하고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하루는 더 이상 괴로운 날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모여 화합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나를 그렇게 기억해주겠지?’ 하며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아이들 마음에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나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남편의 마음에, 아내의 마음에 합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남편 또는 아내의 마음을 내 마음 속에 담으면 어떨까? 부부가 평생을 함께 걸어가는 길에, 사랑과 행복의 꽃이 더욱 짙은 향기를 내며 피어날 것이다.

글 오지영(심리상담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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