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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 한끼
이상한 | 승인 2020.04.14 11:31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책을 싼 보자기를 풀어 휙 집어던지고 신발은 거의 내동댕이치듯 하고 부엌문을 열고 외친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시다가 보는 둥 마는 둥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야! 배 고프재?”

“안방 이불 밑에 밥공기 있대이. 얼른 먹어라.”

군불을 지펴서 뜨끈뜨끈한 안방 아랫목 이불을 들쳐보면 예외 없이 뚜껑 닫힌 은색 밥공기가 식구 숫자대로 빼곡히 놓여 있었다.

어쩌다 “엄마!” 하고 불렀는데 아무도 없는 빈집일 때면, “엄마! 엄마!” 하면서 텃밭에 갔다가 산 밑에 있는 큰 밭이 보이는 못 둑에 달려 올라가서 저 멀리 큰 밭에서 밭두렁을 매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고 손을 흔들고 내려오곤 했다.

초등학생 시절,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형형색색의 책가방이 있지만 그때는 책과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을 보자기로 둘둘 말아 어깨에 대각으로 척 메고 달리던 시절이었다. 밥을 먹기 전에는 도시락이 조용하지만 하교할 때면 빈 도시락에 넣어둔 젓가락들이 달릴 때마다 달가닥거리며 악기처럼 소리를 내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도시락에서 김치 국물이 흘러서 책에 얼룩이 져도 아무렇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교실 한가운데에서 연통을 달아 올린 커다란 난로에는 장작이나 조개탄이 은은하게 타고 있었고, 그 위에 켜켜이 쌓은 도시락에서 밥 타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벌름거리게 하곤 했다. 난로 위 맨 아래에 놓은 도시락은 난로 열이 너무 세서 까맣게 탄 고슬 밥이 되었고, 두세 개를 건너뛰어 얹어놓은 도시락은 그래도 힘깨나 있는 아이들 차지였다.

유난히도 추웠던 70년대 초 겨울이었지만 힘든 기억이 없는 것은 왜일까? 보리쌀 섞인 밥에 반찬 한두 가지였지만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이었다. 자기 도시락은 미리 다 까먹고 젓가락만 들고 여기저기 다니며 맛좋은 반찬만 얻어먹던 아이, 숫기가 없어서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먹던 아이, 부잣집 친구 도시락에 빼곡히 쌓인 소고기 절임을 힐끗 보면서 군침을 삼키던 아이, 집에 가서 애꿎은 엄마에게 “나도 소세지 반찬 해줘!” 하고 떼쓰던 아이, 계란말이를 빼앗길까봐 밥과 밥 사이에 끼워넣어 온 아이 등 천태만상이었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열악하고 화려한 것 하나 없는 흑백텔레비전 같은 시대였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리 유복하지 못한 농군 가정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음에도 허리도 굽지 않고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고 생활에 흐트러짐이 전혀 없는 분이셔서, 유난히도 어머니에게 야박하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은 분이셨는데, 술을 아주 좋아하셔서 이웃 동네에서도 아버지가 오셨다 하면 잔치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장구 치고 춤추며 노래를 부르시다가 으레히 거나하게 취해서 집에 오시면, 술이 깰 때까지 가족들을 앉혀놓고 일장훈계를 하셨다. 밖에 나가면 호인 소리를 들으셨는데 집에 오면 그러지 못하셨다.

아버지와 반대로 유난히도 키가 작고 부족한 부분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무시를 당하실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완벽을 추구하시던 시어머니와 그에 동조하던 남편이 그리 야속했는지, 자주 자식들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푸념을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며느리를 타박하시는 모습, 남편이지만 아내 편을 들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이 너무 싫어서 ‘나는 커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곤 했다. 술을 드시고 가족을 힘들게 하시던 아버지가 밉고 싫어서 말도 섞기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포항 죽도시장에서 친구 분들과 같이 회를 드시고 오는 저녁 무렵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시절이었다. 티코를 역 주차장에 대기시키고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별 생각 없이 술 취하신 아버지를 모셔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차가 도착한 후 마을 어른들이 대합실에서 빠져나오시는데, 술기운에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과 광대뼈가 드러나 홀쭉해진 초췌한 아버지가 걸어나오고 계셨다. ‘아…, 아버지가 언제 저렇게 늙으셨지?’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늘 인상을 쓰고 계셨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한 순간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셨다. 다른 사람들 가족은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의 막내아들이 뜻밖에 기다리고 있어서인지 그렇게 즐거워하셨다.

‘아! 아버지가 많이 외로우셨구나! 젊은 청춘에 결혼해서 4남 2녀를 건사하시며 당신의 꿈과 야망도 다 포기하고 사셨겠구나!’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라서 조근조근 말씀하시지 못했지만, 내 마음에 아버지를 향한 앙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가끔씩 코를 골며 곤하게 주무시는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짜박된장을 가장 좋아했다. 매운 고추를 숭숭 썰어 넣고 매콤하게 보글보글 끓인 후에 다진 마늘이며 멸치, 다시 물을 넣고 짜박하게 뚝배기에 내어오는 된장찌개! 비싼 식재료를 넣지 않고도 어머니의 손맛으로 감칠맛이 나던 짜박된장은 소위 원조 밥도둑이었다. 큰 대접에 뭉텅뭉텅 상추를 손으로 뜯어 넣고 짜박된장 몇 숟갈 넣고 참기름 한두 방울이면 어느새 밥공기가 비곤 했다. 김이 솔솔 올라오는 따뜻한 밥 한 공기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결혼을 하고서도 입맛이 없을 때면 고향집이 생각났다. 가끔씩 고향에 가서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를 얻어오는 날이면 기분이 흐뭇했다. 어쩌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가면, 어머니는 자식 얼굴 보기도 전에 냉장고로 가셔서 냉동실에 켜켜이 모아둔 봉지를 챙기기 시작하셨다. 냉동 고기며 밑반찬이며 시래기 얼려놓은 것 등을 담은 비닐봉지들을 큰 봉지에 넣으셨다.

“어머니! 얼굴 좀 봅시다! 안 가져가도 돼요! 어머니 드셔요!” 하면 “내가 많이 먹나? 가져가거라!” 하며, 자식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신다. 그러고는 “밥 안 먹었재?” 하며 가스레인지로 가서 된장을 끓여내신다. 80킬로그램 가까이 몸이 불어난 막내아들을 보면서 “살 빠졌대이!” 하시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15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지난 2월에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 너무 갑작스런 병으로 제대로 인사 한 번 못하고 보내야만 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으시고 잿더미 같았던 대한민국의 어느 시골에서 젊은 청춘이셨던 두 사람! 꿈 많은 젊은시절을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서 소진하시고 6남매를 건사하느라 당신들의 몸을 제대로 살필 여유가 없으셨던 이 시대의 우리 부모님들.... 유난히 바람이 부는 오늘 같은 날이면 어머니가 준비해주시던 따듯한 밥상과 냉장고에서 찬거리를 챙기시던 어머니가 그립다.

글=이상한
이상한 님은 한국원자력환경공단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월,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낸 후,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글을 기고했다.

이상한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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