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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걷고 뛰고 춤추고 싶다
안효진 | 승인 2020.04.07 14:25

어린 시절, 갑작스런 사고로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걸을 수 있었고, 건강해진 몸으로 불가리아로 해외봉사를 떠났다. 그런데 실수로 다시 다리를 다쳐 치료를 받으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불가리아에서 만난 천사 같은 아이들이 내가 뛸 때마다 나를 응원해주었다. 나에게 “세계 최고의 선생님”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준 아이들과 보낸 행복한 순간을 전하고 싶다.

트럭에 깔린 왼다리

빠아앙- 콰앙!! 세상이 무너질 듯 귀를 울리는 경적 소리와 함께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눈부신 자동차 불빛…. 나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정신을 차려보니 약 냄새가 진동하고 하얀 천장이 보이는 응급실이었다. 15톤 트럭에 왼쪽 다리가 깔리는 큰 교통사고였고, 고작 8살인 나는 앞으로 걷는 것이 힘들 거라는 판정을 받았다.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창밖을 내다보는 일뿐이었다.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을 넋 놓고 보다가 다시 내 다리로 시선을 옮기면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다.

“엄마, 나 오늘 창밖을 봤는데 뛰어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울음을 꾹 참고 있던 엄마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엄마가 나 때문에 고생하고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같이 울었다.

“엄마, 너무 미안해.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효진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넌 걸을 수 있어. 그렇게 믿자.”

다리를 붙잡고 기도도 해보고, 재활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다. 재활치료와 한의원 치료를 병행하며 걷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가족들과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통했던 걸까? 5년 후 나는 기적적으로 일어섰고, 시간이 흘러 다른 아이들처럼 두 다리로 자유롭게 뛸 수도 있었다.

다시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또래보다 다리뼈가 약하긴 했지만 건강하게 자랐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나는 해외봉사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동유럽에 위치한 불가리아에서 1년을 지내기로 했다. 유럽은 1년 동안 여러 나라를 가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육로를 통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기 때문에, 유럽에 있는 21개의 굿뉴스코 센터는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한 나라에 모여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해 음악이 나오면 어디든 춤을 추었다. 사진에서 오른쪽이 안효진 단원.

2019년 3월, 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는 청소년 교류 행사인 ‘월드캠프’를 돕기 위해 독일로 이동했다. 캠프에 참석한 수백 명의 청소년들은 마인드교육을 받고, 명사 특강을 듣고, 서예나 K팝 등 한국 문화를 체험한다. 나는 봉사자들의 여러 역할 중 댄스 그룹인 ‘라이쳐스 스타즈’의 멤버로 활동했다.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하다 보니 댄스를 할 생각에 신나 있었다.

그런데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내게 우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캠프 진행을 총괄하는 분이 유아교육을 전공한 나에게 꼬마 산타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긴 것이다. 예닐곱 살 된 꼬마 아이들을 캐럴에 맞춰 율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이었기에 나는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좋아서 진학한 유아교육과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섭섭함을 뒤로한 채 나는 아이들과 함께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얘들아, 팔은 이렇게 하늘로! 발끝은 반대로!”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을 혼내기도, 달래기도 하면서 춤을 가르쳤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조급한 마음에 빗길을 뛰어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무릎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 느낌이 이상해. 무릎이 너무 아파….’ 다음날 아침, 불길한 예감이 적중해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발로 절뚝절뚝 걸을 수는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였다.

컵에 물이 가득찼다고?

다리를 다치면서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 쓰는 일이 늘었다. 막연하게 ‘다시 걷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독일의 여러 병원을 찾아가봐도 의사들이 못 고친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2주 동안 꼼짝도 못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있어야만 했다. 내 마음은 자꾸만 자꾸만 더 어두워졌다. 어릴 적 병실에 누워 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창밖의 아이들을 지켜보며 부러워하던 내 모습,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 모습, 그때 내 모습이 딱 그랬다.

‘이러다가 정말로 못 걷는 거 아냐? 봉사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긴 싫어.’ 답답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갑갑하고, 순간 숨이 막히기도 했다. 먹구름 같은 내 모습을 보고 독일 괴팅겐 지부장님이 자주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셨다.

“효진아, 요즘 얼굴 표정이 많이 어둡다. 무슨 일있니?”

“지부장님, 저 요즘 너무 무서워요. 어렸을 때 사고 난 기억이 계속 떠오르고, 다리 때문에 다시 한국에 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또 못 걷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요.”

“그렇구나. 많이 힘들겠네. 그런데 효진아, 너는 지금 너의 상황을 절망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어. 그러니 무섭고 힘들고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 올라올 수 밖에 없어. 관점을 바꿔 긍정적인 눈으로 봐봐. 그러면 너의 문제가 언젠가 기회가 될 거야. 알았지?”

힘들 때마다 지부장님과 나눈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불가리아에 파견되기 전 해외봉사 워크숍에서 들었던 교육 내용이 떠올랐다.

“똑같이 컵에 물이 반 들어 있어도 부정적인 사람은 ‘반밖에 없네?’ 합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차 있네!’라고 하죠.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컵이 가득 찼네!’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믿는 방법 외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컵에 물이 가득 찼다고? 그럼 아픈 것도 다 나았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원래 하던 대로 댄스를 가르쳐야겠다.’ 넘어진 지 2주 뒤 나는 연습실로 향했다.

“우와! 우리 선생님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은 큰 박수와 함성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불편한 다리로 내가 분주하게 뛰어다니니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내가 뛸 때마다 아이들은 응원을 해주었고, 덕분에 희망이 생겼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다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평상시처럼 무릎을 붙잡고 일어나는데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기적처럼 완쾌한 것이다!

선생님은 세계 최고의 선생님이에요!

드디어 꼬마 산타들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날, 나는 무대를 볼 자신이 없어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꼬마 산타들과 함께. 안효진 단원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활짝 웃고 있다.

“브라보~!”

환호성에 살며시 눈을 뜨자, 가장 환한 미소를 지은 작은 천사들이 박수갈채 속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한 달 동안 다리를 다쳐 크게 낙담하기도 했고, 아이들을 이끄는 게 힘에 부쳐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끝날 땐 다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꼬마 산타들의 공연도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본 한 아이가 다가와 그 작은 품으로 나를 안아주면서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세계 최고의 선생님이에요!”

살면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들을 겪는다. 그럴 때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나 뛰면 돼!”라고 손을 내밀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한때 나도 아픈 다리를 보며 ‘왜 내가?’ 하고 원망했지만, 지금은 날 세계 최고의 선생님으로 만들어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내 다리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앞으로도 쭉 이 다리로 걷고, 뛰고, 춤추고 싶다.

글=안효진
구미대학교 유아교육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안효진 단원은 봉사활동에서 배웠듯이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절망의 눈이 아닌 소망의 눈으로 어려움을 계속 넘어가고 있다. 자신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글을 기고했다.

안효진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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