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세안센터 정보자료국 김용희 대리

고등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6개월 간 미국에 머문 적이 있다는 김용희 씨.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입안에서 맴도는 영어를 쏟아내고 싶어서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시즌 1부터 시즌 10까지 100번은 더 봤다고 한다. 그의 강한 집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인생을 다 쏟을 꿈을 찾았다고 한다. 꿈을 향해 달려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김용희 씨를 소개한다.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떠나다

2008년, 아프리카에서도 가난한 나라로 손꼽히는 부르키나파소로 김용희씨는 해외봉사를 떠났다. 해외봉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과 아프리카가 궁금하다는 호기심이 한데 모여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 ‘부르키나파소로 해외봉사를 갔더니 살이 많이 빠졌다’는 선배 단원의 이야기에 주저함 없이 부르키나파소를 택했다. 불어를 사용한다는 점도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그의 바람과 맞아떨어졌다.

사하라사막 바로 아래,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부르키나파소는 숨을 들이 마시면 뜨거운 공기가 폐를 한껏 데우는 나라였다. 그런데 한증막 같은 더 위보다 그에게 더 어려웠던 것은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였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그는 유난히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자주 걸렸다.

“120kg에 육박했던 제가 1년 동안 6번의 말라리아, 5번의 장티푸스에 걸려 몸이 반쪽이 됐습니다. 살을 빼고 싶다는 목적만큼은 제대로 달성했죠(웃음). 한번은 말라리아에 걸려 체온이 40도를 넘어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갔어요.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할 만큼 아팠죠.”

2013년도에 방학을 이용해 필리핀으로 짧게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왔다.
2013년도에 방학을 이용해 필리핀으로 짧게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부르키나파소의 시골마을인 코나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부르키나파소의 시골마을인 코나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부르키나파소에 도착한 후 끊임없이 아팠지만, 봉사활동을 하러 와서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봉사단 지부장이 ‘쉬고 싶은데 의무감 때문에 마음에 없는 일을 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고 이야기해주었고, 그는 행동만이 아닌 진심으로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을 위한 봉사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한번은 작은 시골 마을인 코나에 갔는데, 마을 입구에 네다섯 개의 작은 흙구덩이가 파여 있고 아이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그 아이들이 저를 향해 달려왔어요. 그러더니 작고 하얀 필름 통을 내미는데, 그 안에 손톱 끝만 한 사금들이 몇 개 들어 있었어요.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금을 찾으러 구덩이에 들어가 저녁이 다 되도록 그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는 건기라서 풀 한 포기도 찾을 수 없었기에, 아이들이 캐낸 사금이 가족들을 먹여 살릴 유일한 길이었죠. 처음엔 그런 아이들이 불쌍했습니다. 그리고 의문들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들은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 ‘이 아이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그런 질문들을 던지며, 앞으로 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삶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많은 경험으로 기반을 다지다

1년의 해외봉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용희 씨는 대학에서 개발학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개발학은 수업 내용의 대부분이 ‘어떻게 하면 저개발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저에게 정말 필요한 학문이었죠. 그리고 저에게 또 필요한 것이 국제적 감각이었습니다.”

2014년도에 열린 부룬디의 날 행사에서 사회를 봤던 김용희 씨.
2014년도에 열린 부룬디의 날 행사에서 사회를 봤던 김용희 씨.

그는 국제적 감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여러 국제회의와 포럼 등을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웠다. ‘세계 대학총장 포럼’에서는 통역으로 봉사하면서 배웠고, ‘한-카리브 고위급 포럼’에서도 장관 수행 및 통역을 하며 배웠다. ‘리더스 컨퍼런스 포럼’에서는 직접 포럼을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대학생으로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국제적인 감각을 익혔고, 덤으로 인맥도 쌓았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저개발국가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이 생겨, 그 후로는 여러 나라의 상황들을 경험하고 파악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습니다. 특별히 2011년에 한국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부 장관 포럼’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온 청소년부 장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교육, 질병, 마약 등의 문제에 대해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는 아이티에 다녀왔습니다. 지진이 발생하고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전염병으로 고통하고 있는 아이티 난민들을 보며 국제 구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을 그의 대학생활이 그려졌다. 그 외에도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몽골에 있는 ‘한국남부발전 몽골사무소’과 NGO 단체인 ‘아시아 교류협회’에서 각각 6개월 간 인턴 생활을 하며 국가 발전과 교류에 대한 기본기를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카리브 해에 있는 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으로 2년 동안 일하며 공공기관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도 배웠다고 한다.

꺼내고 다듬어 스토리를 만들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공부의 필요성이었다.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기반을 다져주는 부분을 배우기 위해 그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고, 개발학이 가장 선진화된 영국의 서섹스대학교에 진학했다. 개발대학원에서 빈곤과 개발을 전공한 그는 1년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꿈을 펼치기 위해 취업을 준비했다.

“이왕이면 외국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UN에도 지원하고 외국에 위치한 대사관의 연구원으로도 지원했는데, 제 바람과 달리 취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조바심도 났지만, 덕분에 제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지요.”

2019년에 명지대에서 열린 취업특강에서 강연하는 모습.
2019년에 명지대에서 열린 취업특강에서 강연하는 모습.

그는 취업을 준비하면서 해외봉사를 다녀온 일, 대학을 다니며 경험한 것들,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되짚어 생각해보았다. 시간이 흘러 흐릿해져 가던 일들을 다시 꺼내보니, 스케치되어 있던 밑그림에 물감을 톡톡 떨어뜨리듯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선명해졌다고 한다.

“제가 이력서를 쓸 때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사금을 찾던 아이들’ 이었습니다. 저의 꿈과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대학 시절에 경험한 대외활동과 만난 사람들은 꿈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을 보여주었지요. 제가 지나온 시간들을 정리해보니, 제 인생 스토리가 꽤나재미있었습니다. 그 스토리를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저를 보는 가치가 결정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행복한 미래를 꿈꿉니다

그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고 국제기구 중 하나인 한-아세안센터의 문을 두드렸고, 현재 그곳의 정보자료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직접 개발을 하는 기구는 아닙니다. 하지만 교류를 통해 국가 간의 이해를 높이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생 교류 사업을 맡고 있는데, 여러 나라 학생들의 문화 및 학술 교류를 진행하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에 공감하는 학생들을 만납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 미래사회는 지금보다 다양성을 인정하며 풍요로움을 나누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깁니다.”

학생들에게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무척 보람되다고 하는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하며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부르키나파소로 돌아가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꿈을 꾼다. 현장에서 직접 뛰기 위해서는 분야에 맞는 경력도 필요하고, 개발학 공부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김용희 씨. 몇 년 뒤 그가 써내려갈 이야기가 추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만드는 행복한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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