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자. 코로나로 뒤덮인 하늘은 어두움만 보이지만 사이사이 별빛이 존재한다. 그 별은 우리 눈엔 작지만 실제 곁으로 가보면 지구보다 훨씬 크다.

부모를 떠나 살지만 가까이 가보면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깊은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지구의 재난 속에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지금, 멀리 있었던 것들에게 다가가 보자. 작아 보였지만 가까워질수록 짙은 감동을 만날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는가?

‘같이’의 가치를 강조하던 사회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스크에 나홀로 산책, 혼밥은 필수, 다른 사람과 물리적 거리 2미터가 생활 수칙이 되었다. 재택근무, 화상회의, 온라인 쇼핑으로 하루의 흐름이 달라지고 학교도 온라인 수업으로 갈아타기에 진통을 겪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신체에 반응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삶과 죽음, 경제적 위기감, 사회적 상실감으로 이어져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전염시키고 있다.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의 민낯이 드러나는 법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생필품수급에 큰 문제는 없으나, 미국 영국 일본 호주 등지의 마트는 사재기 열풍으로 진열대가 텅 빈 상태라고 한다.

얼마 전 유튜브 영상에 호주의 대형 마트에서 화장실용 휴지를 놓고 두 여성이 육탄전을 벌이는 모습이 올라오고, 대형 카트에 닥치는 대로 물건을 쓸어담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정신없이 사는 걸 보면 왠지 나도 덩달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데, 불안감이 군중심리와 만나면 논리와 이성은 자리를 잃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감은 사람들을 날카롭게 만들고 두려운 공포감을 조장하기에 이른다.

두려움은 소리 없이 퍼져 가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다. 마음에서 발생한 두려움은 몸으로 반응이 나타난다. 식은땀을 흘리거나 부들부들 떨거나 눈을 감아버리려는 행동들이 그 예이다. 그런 신체적 반응은 두려운 존재를 인정할 때 작동을 시작한다. 즉,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도둑이 들었다고 치자. 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두려움 없이 잘 잔다. 내 몸에 암세포가 퍼진 줄 모르고 건강한 줄 알다가 우연히 건강검사 때 암이 발견되면 그 순간부터 죽음이 옆집으로 이사와 사람 속을 두려움에 몰아넣는다. 마치, 자전거 뒤를 아버지가 잡아주고 있는 줄로 알고 신나게 달리다가 아버지의 손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두 바퀴가 공포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두려움은 우리 마음에서 먼저 받아들여야 힘을 발휘하는 감정이다. 그 말은 공포의 대상이 존재해도 내 마음에서 두렵다고 인정하지 않을 때엔 떨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려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위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라는 책에서 저자 박옥수는 두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더워서 체온이 올라갈 때 “체온이 37도로 올라갔어요.” 하는 것처럼 마음을 그 크기에 따라서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음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크기나 무게나 농도에 상관없이 오로지 “내가 많이 두려워요. 많이 무서워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견딜 수 없이 무서운 것도 ‘무섭다’라고 이야기하고, 조금 무서운 것도 ‘무섭다’라고 이야기한다. 무서움의 농도나 슬픔의 농도나 기쁨의 농도나 절망의 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도 없고, 달 수 있는 저울도 없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위조차 없다. 그냥 슬프면 “나 슬퍼요.”라고 하고, 많이 슬프면 “아주 슬퍼요.”라고 하고, 무지무지하게 슬퍼도 “나 너무 슬퍼요.”라고 할 수 있을 뿐, “나 지금 9,292,000만큼 슬퍼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강도를 표현할 단위가 없으니까 굉장히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이 슬퍼도 전달할 길이 없다. 숫자가 있어서 단위를 만드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데, 마음의 세계는 측정할 방법이 없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각기 얼마만큼 두려움에 잡혀 있는 것일까? 두려움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 상태인 걸까? 어쩌면 심각한 상황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두려움에 매이지 말고 생각을 좀 바꿔보자. 어차피 우리는 코로나 말고도 매일매일 걱정과 싸우고 두려움과 씨름하며 산다. 건강, 학업, 취업, 처세, 친구, 가족, 종교,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말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한 이야기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했다. 사막은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다. “목 마르고 지쳐서 힘들어요.” 아들의 투정에 아버지는 격려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니? 얼마 안 가면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올 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 걸었고, 길에서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저것 보세요.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서 죽었을 거예요.” 두려워 주저앉아 우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아니야.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다는 거야.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는 거란다.”

무덤을 보고 죽은 사람을 떠올린 아들과 무덤을 보고 산 사람을 떠올린 아버지. 두 사람은 똑같은 것을 반대편에서 보고 있다. 아버지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눈이 있다면 삶은 크게 달라진다.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고마움을 느끼자

두려움 박멸에 좋은 묘약은 마음속에서 고마움이라 적힌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안전을 위해, 나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집밖에 나오지 말라면서 수도를 끊고 전기를 차단하면 어떨까? 집은 갑자기 감옥이 될 것이다.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몰라도 막상 없으면 불편한 게 물과 전기다. 물이 많다고 행복이 비례하진 않으나 물이 없으면 당장의 삶에 고통이 온다. 물과 전기의 정상적 가동을 위해 일하는 분들께도 감사하자.

목숨을 걸고 코로나를 막는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방역단, 백신 개발을 위해 밤새우고 있을 연구원들, 필요한 물품을 제때 가져다주는 택배맨,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지역 자원 봉사자들…. 이들에게도 감사하자. 정상 상태로의 신속한 귀환을 위해 애쓰는 이 사회 누군가를 위하여 우리는 고맙다는 표현을 널리 전파하자. 아무리 불행한 상황에 있더라도 고마워할 줄 알면 행복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 그 힘을 마음에 키우는 것, 그걸 우리는 마음을 바꾼다고 말한다.

일상의 속도를 늦춰 걷기 시작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선생님께, 부모님께 편지를 써 보자. 친지들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집에서 지내는 동안 가족들의 이야기도 들어 보자. 늘 바쁘다며 종종걸음쳤던 일이 뭐였지 싶다. 무엇이 우리 삶에 중요한가? 단순하게 지내지만 자기에게 집중할 시간이 생기면서 작고 소소한 것들에 대해 들여다보게 된다.

사흘마다 마스크를 갈아 쓰고 2미터 거리를 두며 사는 일이 나를 위한 것 같지만, 좀 더 시각을 넓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질병에서 지켜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강요해서 하는 게 아니고, 소중한 가족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불편이다.

알베르 카뮈의 책 <페스트>가 다시 유행이다. 페스트를 극복한 도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리유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환희의 환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이 기쁨이 언제든 위협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듯 기뻐하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 데 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 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균 같은 재난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 또 찾아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덤에서 생명을 본 아버지처럼 재난 속에서 행복을 찾아보자. 캄캄한 밤이 오더라도 어두움만 보지 말고 사이사이 별빛에 주목하자. 그 별은 우리 눈엔 작지만 실제 곁으로 가보면 지구보다 훨씬 크다. 지금 코로나로 뒤덮인 하늘은 어두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먼 동편에서 어스름 여명이 일기 시작할 것이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느끼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며 고마움을 느끼는 일, 그것이 시공을 넘어선 행복이다.

글=조현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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