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특집 ⑦ 어차피 보낼 2년이라면 남다르게

대한민국 청춘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생애를 통틀어 특별히 알바를 한 적이 없다. 부모님이 모두 교직에 계셨기에 학비나 생활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인생에 그나마 알바 경험이 있다면, 군대가 아닐까 싶다. 국방의 의무의 신성함은 여기서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테니 여기서는 접어두고, 행정병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보직을 맡아 여러 가지 일들을 했던 내 경험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2001년 12월 입대한 내가 신병교육대를 거쳐 약 2년 동안 복무한 곳은 경기도 파주의 육군전진부대였다. 전진부대 예하 보병연대 본부의 인사과 행정병이 내 보직이었다. 육군 최초로 창설된 사단답게 전진부대는 최전방에서 휴전선 및 강안 경계를 담당하는 ‘빡센’ 부대였다. 각종 훈련도 많았다. 행정병들은 훈련에서 열외할 때도 많지만, 그만큼 평소에 처리하는 업무량이 상당했다. 과에서 근무하는 병사는 5명이지만, 컴퓨터는 3대뿐이라 막내인 나는 낮에는 컴퓨터 앞에 앉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남들 다 자는 한밤중에 생활관에서 사무실로 내려와 밀린 업무를 처리할 때가 많았다.

당시 내 시급은 얼마였을까?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내가 제대하던 2004년 기준 병장 월급은 3만 9,600원이었다. 월~금요일은 아침 6시에 기상해 저녁 6시에 저녁을 먹으며 일과가 끝났고, 토요일은 아침 6시에 기상해 낮 12시에 점심을 먹으며 일과가 끝났다. 한 달에 264시간이다. 여기에 닷새에 나흘 꼴로 하루 2시간씩 경계근무를 나갔으니 한 달 평균 근무시간은 총 312시간이다. 시급 127원인 셈이다.

급여는 적었지만 하는 일은 다양했다. 사무실에서는 청소, 전화 받기, 커피 타기, 서류 복사 같은 잔심부름부터 공문 작성, 병력현황 관리, 부대원 급여처리, 표창장 제작, 휴가증 발급 등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큰 차질이 생기는 고난도 업무까지 처리했다. 그밖에 틈틈이 부대 차원에서 하는 진지공사(삽질+제초작업), 취사지원(요리), 수해복구, 대민지원(벼베기)까지 했으니 내 인생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대할 쯤에는 주위 간부나 후임병들이 ‘김성훈 병장은 직업군인 해도 되겠다’고 할 만큼 군생활이 몸에 배었지만, 신병교육대를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을 때만 해도 ‘여기서 어떻게 2년을 보내지?’ 하는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코치도 없던 내게, 말 한마디도 맘놓고 하기 힘든 선임병만 30명 넘게 즐비한 소대 분위기는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웠다.

선임들과의 관계도 관계지만, 제대를 한 달 앞둔 말년 ‘김 병장님’께 업무까지 완벽히 넘겨받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눈물이 쏙 나올 만큼 호된 꾸지람을 날마다 듣는 등 호된 조련 아래 워드프로세서와 엑셀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혔다. 덕분에 워드프로세서는 제대 후 곧바로 1급 자격증을 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하루 평균 3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야근을 거듭하다 보니 업무도 조금씩 숙달되었다. 소대원이나 간부들과의 관계도 차츰 돈독해졌다. 우리 소대는 서울·부산·대전 등 대도시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심지어 제주도까지 출신지역이 다양했다. 저마다 성격도 취미도 다른 고참들 기분 맞추기가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게 인생살이다’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까지 나는 부모님, 교수님 등 어른들을, 우리 마음은 몰라주면서 무작정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꼰대’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해가 풀린 곳도 군대였다. 입대하고 1년 동안 나는 휴가를 딱 1번밖에 가지 못했다. 업무에 여러 모로 미숙한 나를 못 미덥게 여긴 인사과장님이 번번이 내 휴가를 취소시켰기 때문이다. 그때 나선 분이 중대장님이셨다. 개인면담 과정에서 우연찮게 그 사실을 아신 중대장님은 그 자리에서 9년이나 선배인 과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성훈이가 일을 암만 못하더라도 규정에 명시된 휴가를 차단하시는 건 곤란합니다.”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주는 분이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휴가를 다녀온 것보다 마음에 더 큰 힘을 얻었다. 중대장님뿐만 아니라 내가 군생활을 하며 만난 지휘관들은 대부분 어떻게든 장병들의 걱정을 해결해주고, 의욕적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분들이었다.

흔히 군대 하면 무조건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상명하복 문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군시절 만난 지휘관들 중에는 부당한 지시로 부하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전투력을 낭비하는 분은 단 한 분도 없었다. 물론 처리하기 힘들고 복잡한 일들을 시키실 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리더로서 부대 운영에 꼭 필요한 합리적인 지시를 내린 것뿐이었다. 참모를 비롯한 부하들은 지휘관의 작은 음성도 크게 듣고 그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가 절대 나쁘기만 한 게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언젠가 JSA 공동경비구역에 다녀온 적이 있다. 불과 몇 미터 앞에 남북한 군인이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마주 선 모습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넘어 살 떨리는 기운이 엄습했다. 문득 우리 인생도 끝없는 싸움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대 장병들은 아침점호 때마다 1.5km씩 뜀걸음을 했다. 그런데 일직사관의 재량에 따라 뜀걸음을 생략할 때가 있었다. 당장 몸은 편했지만, 그렇게 며칠 뜀걸음을 거르다 보면 금방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아침에 뜀걸음을 하지 않는 날은 개인적으로 뜀걸음을 했다. 업무도 실력이 조금씩 붙을수록 좀 더 어렵고 방대한 업무도 해낼 수 있었다. 하루하루 부담과 싸워 이기고 한계에 도전하던 그 시절은 내 평생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건강하던 시기였다.

아무리 국토 방위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빼고 논한다 해도 내 2년여의 군생활을 ‘시급 127원짜리 알바’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군생활을 통해 나는 참으로 귀한 것들을 얻었다. 지칠 때 떠올리면 힘이 되는 소중한 추억과 사람이란 자산이 남았고, 조직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똑같이 보낼 2년인데, 이왕이면 편하게 지내자’라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2달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생활 경험이야말로 내 인생의 방향을 잡아준 가장 유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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