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코 해외봉사 수기-스리랑카 ②

권신영의 핑퐁이야기

2018년에 처음 스리랑카로 해외봉사를 떠났다는 권신영 씨는 아름다운 바다와 한국에서 맛볼 수 없는 과일, 순수하고 따뜻한 스리랑카 사람들을 잊지 못해 1년 더 봉사경험을 쌓으려고 2019년 다시 스리랑카를 찾았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21일, 굿뉴스코 봉사단 숙소와 불과 1km 떨어진 곳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IS 단체가 부활절을 겨냥해 일으킨 사고였다.

총 9군데에서 터진 폭탄으로 인해 297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다쳤다. 사상 최악의 폭탄테러로 인해 평화롭던 스리랑카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곳이 되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폭탄테러가 스리랑카를 완전히 바꿔놓았네요.

스리랑카에서 해외봉사를 하면서 사귄 현지 친구들이 많았어요. 2019년에 다시 만났을 때 정말 반가웠고 모두들 따뜻하게 반겨줬어요. 친했던 스리랑카 친구와 만나기로 연락했는데, 3일 뒤 폭탄테러로 그 친구가 희생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 친구는 고작 15살이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게 정말 한순간이라는 걸 눈으로 목격했지요.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다치거나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들을 보며 제 마음에도 두려움이 생겼어요. 너무나 많은 게 변했으니까요.

그곳에서 활동의 제한이 많았겠네요.

스리랑카는 손님을 맞이하는 문화가 있어요. 문을 두드리고 인사를 하면 집 안으로 초대해서 물을 주지요. 잠시나마 더운 날씨를 피하고 목을 축이며 집주인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요. 그런데 그 테러 이후로는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누가 테러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로를 경계하게 됐습니다. 거리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현저히 줄고, 큰 배낭을 멘 사람을 보면 경계하고 경찰들이 와서 가방과 몸을 수색했어요. 봉사활동을 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죠. 그리고 스리랑카 친구들 사이에선 ‘더 이상 여기에 못 살겠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스리랑카를 떠나라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친구들이 충고했죠.

그런데도 스리랑카에 남아 있었던 이유가 있었나요?

(주머니에서 탁구공을 꺼내 보이며) 저는 중학생 때 탁구선수였는데요. 스리랑카에 머문 모든 날들을 이 탁구공과 함께했어요. 매일 아침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탁구공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제 소개를 했어요. ‘탁구경기를 할 때 내 쪽으로 공이 넘어오면 공을 받아쳐야 그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며 스리랑카의 지부장님이 저에게 알려주신 ‘탁구를 하듯이 생각을 쳐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저는 몸으로 탁구를 쳐보긴 했지만, 생각으로 탁구를 쳐보진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폭탄테러 이후로 밀려드는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더 이상 봉사활동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받아치기 시작했어요.

생각을 받아치다니... 매우 신선합니다.

그랬더니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부정적인 생각들을 받아치면서 슬픔에 잠긴 스리랑카 사람들을 위로할 방법을 하나씩 찾았습니다. 함께 간 단원들이 각기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서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를 연주하며 공연을 했습니다. 특히 2명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면 스리랑카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스리랑카 사람들도 잘 모르는 현지 언어로 노래를 하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한국으로 치면 삼성에 해당하는 대기업들을 찾아가서 스리랑카 사람들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제안했습니다.

대기업들을 찾아가 기획한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공연을 한 이들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결과는 놀랍지만 그 과정은 분명 가시밭길이었으리라’는 생각에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이었는지, 아니면 없던 길을 새롭게 개척했는지 말이다.

-굿뉴스코 해외봉사 수기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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