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1살 때 이혼을 하시고 나를 쭉 혼자 키워 오셨다. 너무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릴 땐 남들도 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가 많이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아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우리 엄마는 늘 바쁘셨다.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고, 출장을 가고, 수업 준비며 시험 채점이며, 일과를 마치고 매일 밤 10시가 되서야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엄마의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날 늦게 귀가해 몸이 고단해도, 내가 소풍 가는 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항상 참치김밥을 싸주셨다. 내가 학교 체육대회 때 공 체조를 한다고 하면 일찍 일을 마치고 내가 공연하는 모습을 꼭 보러 오셨다. 그리곤 “400명 아이들 중에 우리 은우 머리 위에서만 별빛이 막 쏟아지더라!” 하며 행복해하셨다.

엄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유일한 가족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엄마 말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엄마와 부딪히는 일도 잦아졌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들로 엄마 마음에 못박는 말들을 쏟아냈고 그때마다 엄마는 우셨다. 나는 엄마가 힘들겠거니 싶으면서도, ‘나도 힘들어. 엄마는 엄마니까 나를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면서 마음에 힘든 엄마를 외면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늘 바빴다. 학교 공부에, 잡지사 인턴 일에,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 엄마와의 관계는 항상 뒷전이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섭섭해하셨다. 엄마가 소중하지만, 어쩌다보니 엄마에게 연락하는 일이 소원해졌다. 내 핑계는 항상 ‘바빠서…’, ‘어쩌다보니…’ 였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 다녔던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사느라 바쁜 건데, 이 정도는 엄마가 이해해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학 4년을 보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 개월 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얼마 뒤 임신을 했고, 작년 4월에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다. 병실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 애를 쓰는데 젖 물리는 나도 미숙하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젖을 물어보는 아이도 힘들어 낑낑대는데 눈물이 터졌다. 내 앞가림도 잘 못하는 내가 이 작은 아기를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엄마였다. ‘엄마는 그동안 어떻게 혼자서 이걸 다 해온 거지? 아, 엄마…’ 그때는 일 때문에 함께 있지 못한 남편보다 엄마가 더 보고 싶었다. 엄마가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고 위대해 보였다. 엄마는 남편도 없이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보내온 걸까… 엄마께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 우리 엄마가 지난 1월 11일에 결혼식을 올리셨다. 내게 있어 엄마는 언제나 ‘우리 엄마’였는데, 결혼식 날 엄마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며 예쁜 신부였다. 한 남자의 아내로 새로운 시작 앞에 서있는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지난 20년간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느라 쉬지 못했던 우리 엄마, 이젠 새아버지가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다고 약속했다. 엄마가 기대어 쉴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다.


글=김은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야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는 김은우 씨. 어머니에게 늘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했던 이야기를 기고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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