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꿈을 키우는 3가지 방법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취업난 때문인지 꿈이 ‘사치’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투머로우>는 꿈 이야기를 더 하려 합니다. 신은 인간이 꿈꾸는 데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꿈이어야 한다고 다그치지도 않았죠. 그럼에도 여러분 스스로 ‘꿈이 없는 사람’이 되길 자처하지는 않았는지요? 새해에는 ‘꿈꾸는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먼저, 꿈꾸는 사람들부터 만나봅시다.

1.꿈을 말하라

출처: jtbc ‘아이돌룸’ 홈페이지
출처: jtbc ‘아이돌룸’ 홈페이지

2003년, 개그맨으로서 슬럼프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PD가 제게 이런 조언을 했죠. “영철아, 너만이 할 수 있는 개그가 있어. 캐나다에서 열리는 ‘Just for Laugh저스트 포 래프’ 코미디 페스티벌에 나가보는 건 어때?” 전 마법에 홀린 듯 곧바로 캐나다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12박 13일간,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했어요. 너무 답답해서 달을 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10년 뒤에 다시 올게. 꼭 국제 코미디언이 될게.”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저는 제 꿈을 동료와 가족에게 말했고 방송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꼬박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인데, 코미디 페스티벌에 나가겠다는 제 꿈을 기억하는 방송작가 한 분이 제게 ‘호주 멜버른 국제 코미디 페스티벌’에 참가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멜버른 무대에서 6분간 이야기하고 내려오면서 생각했죠. “꿈은 내뱉어야 하는구나!” 그때부터 누구를 만나든 꿈을 가슴속에만 품고 있지 말고 말하라고 합니다. 말하면서 꿈은 시작되니까요. 김영철(코미디언)

2.하루에 15번씩 꿈을 적어라

저는 낮은 임금을 받는 공장의 말단 직원이었어요. 하지만 제겐 꿈이 있었습니다. 늘 책상에 앉아 ‘나는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유명한 만화가가 될 거야’라는 문장을 하루에 15번 이상씩 적었습니다. 신문사로부터 수백 번 거절을 당했지만 종이에 꿈을 기록하며 꿈을 놓지 않고 계속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신문사와 만화 연재계약을 맺었죠. 그 후에 저는 새로운 문장을 썼습니다. ‘나는 세계 최고의 만화가가 되겠다.’ 이 문장 역시 하루에 15번씩 쓰고 꿈을 이룬 모습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1989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풍자만화 <딜버트>는 전 세계 1여 천종의 신문에 실릴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요즘 저는 ‘나는 퓰리처상을 받는 만화가가 될 것이다’라는 문장을 다시 적고 있습니다.

꿈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글로 쓰며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꿈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스콧 애덤스(만화가)

3.끊임없이 도전하라

‘제네럴아이디어’ 대표 최범석의 도전기

옷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 최범석.(사진제공| 제너럴아이디어)
옷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 최범석.(사진제공| 제너럴아이디어)

동대문 출신으로 뉴욕, 파리를 거쳐 세계무대로 나아간 디자이너 최범석. 그는 늘 다음 단계를 꿈꿨다. 꿈을 꿀 땐, 계산보다 실천이 늘 먼저였다. 스무 살, 지붕 있는 가게에서 옷장사 하고 싶다던 그의 꿈은 커져, 어느새 그를 의류회사의 어엿한 대표이자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만들어 놓았다.

지붕 있는 가게에서 옷장사 하고 싶어

17살 때,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그만뒀다.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가 ‘옷을 떼다 팔면 어떨까?’ 생각했다. 먼저 원단에 대해 배우고 싶어 원단시장에서 일을 했다. 월급만 타면 광장시장에서 구제 옷들을 조금씩 샀고 홍대 길거리와 대구, 부산을 다니며 노점으로 옷을 팔아 돈을 모았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지붕 있는 가게에서 옷장사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렵게 3천만 원을 모아 의정부의 어느 식당골목에 옷가게를 열었다.

동대문에 매장을 내고 싶어

쪽잠을 자며 일을 해도 너무 기뻐서 힘든 줄 몰랐다. 장사가 생각보다 잘됐고, 식당골목이 어느새 옷가게 거리가 돼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파는 옷과 똑같은 옷을 더 싼 가격에 팔았다. 차별화가 필요했기에 그때부터 옷을 디자인하기 시작해 나중에는 의정부 가게를 정리하고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동대문 상가의 문을 두드렸다. 21살 짜리를 못 미더워하는 상가 운영진에게 매일 찾아갔고, 마침내 ‘무’라는 브랜드를 열었다.

동대문 판매율 꼴찌, 언젠가 1등이 되고 싶어

3년 동안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독학으로 악착같이 노력한 끝에 직접 제작한 옷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고, 동대문 매출 꼴찌에서 1등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연한 계기로 디자이너 홍은주의 파리 컬렉션 스태프가 되어 일을 했는데, 난생 처음 패션쇼를 보며 가슴이 뜨거워진 나는 ‘디자이너가 되리라’ 결심했다.

옷장수가 아닌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나는 ‘이런 내가 어떻게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누가 나를 도와줄지, 내가 어떤 옷을 만들게 될지 궁금했을 뿐이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당시 패션디자인협회 회장이었던 디자이너 박윤수 씨를 찾아가 나만의 패션쇼를 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중졸 학력뿐인 나의 능력을 의심했지만, 나는 밤새 옷을 만들며 그가 낸 미션을 통과했고, 결국 2003년 서울 컬렉션에서 디자이너 데뷔 쇼를 치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뉴욕 컬렉션에 도전, 세계 시장을 휘잡고 싶어

이후 회사가 잘되는 듯했지만 인기는 금방 사그라졌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자 고민하던 중 뉴욕 컬렉션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직접 발로 뛰어 어렵게 첫 뉴욕 컬렉션을 열었는데, 시작은 초라했지만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매년 쇼를 열던 중에 4회째부터 매체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뉴욕에서 16번째 컬렉션 쇼를 진행했다. 이는 한국 디자이너로서는 최다 기록에 해당한다. 요즘은 출판, 방송,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향수 브랜드인 ‘더블유 드레스룸’을 런칭하는 등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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