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예방,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다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얼마 전, 화재보험협회에서 발간한 <방재와 보험>이란 잡지가 회사로 배달됐다. 건물 방재 업무를 하다 보니 관심을 갖고 읽던 중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를 소개한 글이 내 눈길을 끌었다. 2017년 6월 14일 밤, 런던 서부의 그렌펠 타워Grenfell Tower에서 발생한 이 화재는, 불길이 불과 15분 만에 외벽을 타고 건물 전체를 태워버렸으며 사망자 79명, 중상자 20명, 실종자 79명 등 인명피해도 컸다.

기사내용 중 특히 내 관심을 끈 건 화재의 원인이었다. 그렌펠 타워 화재의 원인은 4층 입주자 가정의 냉장고 폭발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전기 누전이나 방화放火, 실화失火가 아닌, 냉장고가 폭발해 발생한 화재라는 점이 의외였다.

2017년, 냉장고 폭발로 인해 발생한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 불길이 15분만에 번져 건물 전체를 태웠다.ⓒNatalie Oxford
2017년, 냉장고 폭발로 인해 발생한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 불길이 15분만에 번져 건물 전체를 태웠다.ⓒNatalie Oxford

화재의 원인은 우리가 전혀 예상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원인을 정확히 밝혀내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방시설은 예방보다 발생 후 효과적으로 상황을 전파하고, 화재를 진화하며, 사람을 대피하게 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즉 소방시설들은 화재를 예방하거나 억제할 능력이 없다. 화재의 예방 및 억제는 전적으로 우리 인간들의 몫이다.

올 2월 발표된 ‘화재통계’에 따르면 가스누출, 과열, 연료누설, 정비불량, 빨래 삶기, 음식조리, 가연물 근접방치, 과전류, 누전, 자연발화, 금수성禁水性 물질과의 접촉 등이 화재의 가장 큰 원인들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불을 사용하다 저지르는 실수와 더불어, 일반인이 제어할 수 없는 기계적·화학적·전기적인 원인도 화재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임을 알 수 있다. 그렌펠 타워 화재의 원인인 냉장고 폭발도 결국 정비불량이나 과열 때문이었을 텐데, 일반인인 우리가 이를 사전에 막을 방법이 있을까? 우리는 화재를 예방하려 노력하지만, 제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골든타임, 무지, 안일: 매년 화재참사가 계속되는 3가지 이유

2015년, 전염병 메르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해 6월 1일 메르스로 첫 사망자가 발생했고, 11월 25일 마지막 38번째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하루에 0.2명씩 목숨을 잃은 셈이다. 반면 올 2월 발표된 화재통계를 보면 지난해 국내 화재발생 건수는 41,124건이며, 이로 인한 사망자는 309명, 부상자는 2,221명에 이른다. 매일 112건의 화재가 발생하고, 0.84명이 사망하며, 6명이 부상당하는 셈이다.

2015년을 계기로 메르스는 우리 뇌리에 강렬히 각인되었고, 이후 비슷한 전염병이 발생하면 우리는 매우 신속히 대응하고 있다. 화재는 피해규모가 훨씬 크고, 같은 사고가 계속 발생한다는 점에서 전염병보다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는데도 예방 및 대응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재참사가 매년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다. 전염병은 발생과 동시에 수 분 내에 번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부에서 대응팀을 꾸려 대처할 수 있다. 화재는 다르다. 화재가 발생하면 플래시오버flashover(화재로 발생한 가연성가스가 축적되었다가 한순간에 발화하며 맹렬히 타오르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데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플래시오버 이후 화염이 최고조에 달한 화재를 끄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단 화재가 발생하면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뉴스 등에서 보고 듣는 대형 화재는 대부분 플래시오버까지 도달한 시간(골든타임)이 짧아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래서 소방관들은 어떻게든 5분 내에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 시간과의 싸움을 벌인다. 이 5분은 정부도, 소방공무원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특히나 소방차가 달려가는 길인데도 차들이 비켜주지 않고, 불법 주정차로 골목에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재를 가벼이 여긴다. 건물에서 화재 비상벨이 울려도 ‘오작동이겠지’ 하고 넘어간다. 만에 하나 오작동이 아니라면, 5분 이내에 큰 화재로 변해 내가 탈출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교육을 받아왔지만, 화재 비상벨이 울리거나 안내방송이 나올 때 바로 대피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비상벨이 울렸을 때 즉각 대피하지 않는 것은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 화재가 아니면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고 자기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 화재가 일어났다면? 그 다음은 없다. 이겨도 남는 것이 없고, 지면 그 결과는 참혹하다. 사람들은 화재로 숱한 인명이 죽거나 다치는 뉴스를 봤을 텐데도 정작 자기가 있는 건물에서 비상벨이 울리면 움직이지 않는다. 화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완벽한 화재 대응법, 답은 매뉴얼에 있다

필자는 건물 방재 업무를 하며 ‘화재로 인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막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방화구획을 관리하고, 방재설비가 정상작동하도록 유지·보수를 하더라도 정작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을 구할 수 없다. 또 화재 예방을 위해 교육과 훈련을 계속해도 참석자들이 귓등으로 흘려들으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불이 나면 도망가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화재 희생자들이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몰랐거나, 건물 관리자가 제때 비상벨 등을 울려주지 않아서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대형 화재참사 중에는 관리자의 착오나 한둘의 잘못으로 사람들이 희생된 경우도 적잖다. 하지만 방재 현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비상벨이 울리는데도 대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아, 사람들이 화재의 특징을 모르고 자기 생각을 따라 안일하게 대처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위력의 화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화재에 완벽히 대응하는 방법은, 바로 내 판단을 내려놓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불을 발견하면 무작정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소화기로 끄고, 그래도 안 되면 주변에 화재를 알리고 119에 신고 후 대피해야 한다. 비상벨이 울리면 ‘설마 화재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반사적으로 대피해야 한다. 설령 오작동이나 비화재보非火災報라 할지라도 소방훈련을 하는 마음으로 바로 움직여야 한다.

막상 화재가 닥치면 미처 생각지 못한 돌발상황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매뉴얼은 나보다 화재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킬 수 있도록 간단하고 정확하게 만든다. 위급상황일수록 생각보다 매뉴얼을 따른다면, 우리는 화재로부터 완벽하게 생명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재 발생시 대응 요령

1. 화재를 발견하면 “불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쳐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화재 경보 비상벨을 누릅니다.
2. 최초 화재 발견시 소화기를 사용하여 진화하고, 초기 진화가 어려운 경우 즉시 대피합니다.
3. 엘리베이터는 절대 이용금지, 계단으로 대피합니다.
4. 문을 열기 전 손잡이를 만져보고 뜨거우면 열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 이동합니다.
5. 아래층으로 대피가 불가능한 경우 옥상으로 대피토록 하며, 물에 적신 담요나 수건으로 목과 호흡기를 감싼 상태로 이동합니다.
출처 | 대한산업안전협회

도움말=박준호
경기바이오센터 소방안전관리자. 방재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안전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고 강연 활동도 하고 있다. 화재사고 방지를 위해 평소에 안일함을 버리고 매뉴얼대로 행동해야 함을 강조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