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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더 큰 뜻 앞에 ‘나’를 버리다뮤지컬 ‘세종, 1446’
고은비 기자 | 승인 2019.11.07 14:02

한국인치고 세종대왕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글 창제, 측우기 발명과 <농사직설> 편찬, 영토 확장 등의 업적은 물론, 무엇보다 백성을 사랑한 애민정신 덕분에 책, 영화, 드라마 등에도 자주 등장한 세종대왕. 하지만 뮤지컬 ‘세종, 1446’은 위인전이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것 이면에 숨은,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재조명해 화제가 되고 있다.

실록에도 없던 세종대왕 이야기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이 왕이 되는 과정과 함께 뮤지컬 ‘세종, 1446’의 1막이 시작된다. 태종이 누구인가? 일곱 형제들과 피 튀기는 쟁탈전을 벌인 끝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잔인한 피의 역사’를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태종은 어떻게든 큰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 하지만 비정한 권력의 세계에 회의를 느낀 양녕대군은 왕좌를 사양하고자 주색잡기에 빠져들고, 태종은 그런 큰아들을 어쩔 수 없이 폐위시킨다.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에 책봉된 것이 충녕대군, 훗날의 세종이다.

‘세종’ 역에는 정상윤, 박유덕. ‘태종’ 역에는 남경주, 김주호, 고영빈. ‘소헌왕후’ 역에는 박소연, 김지유, 정연이 열연을 펼친다. 기자가 봤던 공연에서는 박유덕(세종), 남경주(태종), 정연(소헌왕후)이 무대에 올랐다.

세자가 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사사건건 자신을 가로막는 아버지 태종,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가인 중신들, 그리고 그에게 복수하려는 고려의 잔재 세력들이었다. 집권 초기에 무엇 하나 홀로 결정할 수 없어 한탄하던 세종은 이내 강인한 왕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다. 특히 ‘왕권을 위협하는 것들은 물어뜯고 살을 발라야 세상을 호령할 수 있다’고 믿던 아버지 태종에게, 세종은 “피가 아닌 흙으로 길을 다지겠습니다”라며 자신의 뜻이 패도가 아닌, 왕도에 있음을 단호히 밝힌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서책을 대하며 그 속에 담긴 인仁의 정신을 배우고,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가까이서 살펴봤던 세종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군주의 상像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대왕’이기에 앞서 인간이었던 세종의 면모

‘세종, 1446’의 대사에는 유독 ‘길’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장영실에게 천문관측기기인 간의簡儀를 만들라고 명할 때도 ‘이는 조선의 하늘길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뮤지컬 대표넘버의 제목 또한 ‘그대의 길을 따르리’이다.

세종의 삶은 마치 ‘백성을 위한 길’을 만들고 닦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세종 즉위 이듬해, 태종은 세종의 외척을 견제할 목적으로 그의 장인인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한다. 또한 세종은 총애하던 충신 장영실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백성 한 명 한 명까지 아꼈던 세종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런 슬픈 날에도 세종은 백성의 안위보다 사대부로서의 도리를 더 중시하는 조정 관료들과 싸웠으며, 자신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임금의 심정을 몰라주는 백성들의 불평불만도 모두 품었다.

뮤지컬 막바지, 세종은 점점 시력을 잃어가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왕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과거의 슬픈 기억들이 그를 괴롭히며, 자신이 걸어온 길이 진정 옳은 길인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한다. ‘대왕 세종’이 아닌, ‘인간 세종’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나’에게서 벗어나 백성을 향하리

고통스러워하는 세종을 찾아온 소헌왕후, 그녀의 진솔한 고백으로 세종은 다시 힘을 얻는다.

너무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순간, 암전에 가까운 무대 위에 주황빛 등과 함께 소헌왕후가 세종을 찾아온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는 역사적으로도 어진 인품으로 세종을 깊게 이해하며 내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헌왕후는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리고, 죄인의 딸로 불리며 폐위될 위기에 놓여 고통스러울 때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백성을 향한 세종의 마음을 봤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왕후와 대화를 마친 세종은 ‘나를 벗어나 백성을 향해 펼쳐가겠다’라는 대사와 함께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 한 소절 한 소절마다 ‘한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상처를 모두 내려놓고, 가야할 길을 가겠다’고 뜻을 굳힌 그의 심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사사로운 감정과 모든 시시비비를 내려놓은 세종은 시력을 잃어가는 상황 속에도 오직 백성만을 위해 한글 창제에 몰두했다.

기자는 그동안 한국 사람들이 좋은 공연, 훌륭한 연설에 박수가 인색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종, 1446’이 막을 내리고 커튼콜이 시작되자마자 관객 전원이 일어나 격한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기자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사실 ‘세종, 1446’은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공연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 작가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킬 만큼 감동적인 작품의 스토리는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고난스런 삶 속에서도 심지가 굳은 사람은 쉬이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우리는 지혜롭고 리더십이 있으며,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모습을 존경해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정 존경받아야 하는 것은 대왕大王이라 불릴 만큼 크고 강인한 그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고은비 기자  bsh002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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