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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젊은, 오늘의 계획
문다애 | 승인 2019.11.06 14:33

이른 아침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이부자리를 벗어나는 게 힘겨워지고, 출근길 재킷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의 스산함을 느끼고, 퇴근길 터져버린 길바닥 은행의 구린 냄새와 땅거미 진 어둑한 거리가 익숙할 때쯤, 우리는 느낀다. 하루가 짧아졌음을, 기어코 한 해가 지고 있음을.

달력을 보니 벌써 두 자리로 넘어간 지 한참 된 그 숫자가 떡하니 나를 마주한다. 와 버렸다. 그 계절이, 그 달이. 반성의 채찍을 꺼내들 그 11월이.

작년 말, 보람차고 풍요로운 올 한 해를 위해 호기롭게 구입했던 스케줄러를 책상 구석에서 끄집어내 본다. 형형색색 빼곡했던 칸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점점 그 색을 잃고 몇 장 더 넘기면 텅텅 비어 있는 빈칸이, 오랜 시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서러움을 항의한다.

‘그랬지. 올해의 목표는 이거였지. 올해 계획은 이거였어.’ 운동, 자격증, 공부, 글쓰기, 책읽기 등 여기저기 한껏 힘주어 중요 표시를 해두었던 형광색의 단어들이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연말의 스케줄러를 넘겨보다 짙은 한숨과 함께 덮어버린다.

밤 11시에, 하루를 계획하는 사람은 없다. 하루를 되돌아보기 바쁘기에 대개는 하루 동안의 자신을 꾸짖고 반성하기 바쁘다. ‘아침에 좀 더 빨리 일어났어야 하는데, 그 일은 진작 했어야 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끝냈어야 했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나에게 별 효력 없는 채찍을 몇 번 휘두른 뒤에야 잠이 든다. 그것마저 하루의 일과인 것처럼.

11월이 되어서 한 해를 계획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새로 계획하기엔 벌써 11월이고, 이제껏 달려온 날들을 반성하기도 바쁜 시간이기 때문이다. 12월은 연말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친구들과 가족들과 모여 한 해를 위로하며 보내주고 이듬해를 축복하기 바쁘니 11월만큼은 온전히 반성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던 언니가 그랬다. 이맘때 쯤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벌써 11월이야?’ 유독 빠른 세월의 흐름이 박하게 느껴진다고. 세월이 흐름이 야박하게 느껴짐은 그 시간을 붙잡고 싶은 아쉬움 때문이리라. 밥을 먹던 나는 그 아쉬움의 근원지에 대해 생각하다 식사를 마치고서야 찾아냈다. 오늘 내가 살펴보고 한숨을 내쉬었던, 그 스케줄러 속에 빼곡했던 계획. 아니, 더 정확히는 이루지 못한 계획들. 시간의 흐름이 아쉬운 것은, 완벽히 이루지 못했던 나의 계획들 때문이었음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며칠 전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를 험담하기 바빴다. 29살 전에 결혼할 계획인데, 남자도 없이 혼자 결혼을 준비하게 생겼다며 조바심에 발을 굴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먼저 결혼한 친구의 임신계획으로 흘러갔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것까지 참 많은 것을 계획하고 산다. 결혼도, 임신도, 오늘 아침 내가 했던 비타민 챙겨먹기까지도.

문득 영화 ‘기생충’ 속 기택의 대사가 떠오른다.

“무계획이 계획이야. 사람이 계획을 세우면 실패할 수 있지만, 계획이 없으면 실패할 일도 없다. 그러니까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거야.”

우리가 세운 계획이 ‘정석’일 수는 있지만 꼭 ‘정답’은 아닐 텐데, 우리는 계획을 세울 때부터 실패를 두려워한다. 이루지 못한 계획에 대한 우려가 나에게, 기택에게. 우리들에게 있다.

그리고 계획 중 하나였던 회의를 위해 함께 작업하는 감독님을 만났다. 감독님은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오셨다. 재미있는 여행이었냐는 나의 물음에 재미는 있되 성공적인 여행은 아니라고 답하셨다. 미처 안타까움을 표현할 틈도 없이, 그런데 죽어도 못 잊을 여행이라고 하시며 웃기고도 슬픈 여행사를 들려주셨다. 여행 스케줄을 짜놓고 계획한 기차시간에 맞춰 타야 했는데, 시차 적응을 못한 나머지 늦잠을 자서 기차를 놓치고, 어렵게 다음 기차를 탔는데 정신이 없어 손가방을 놓고 내리고…. 작은 계획의 실패는 도미노처럼 다른 계획들도 쓰러뜨려 버린 것이다. 결론은, 감독님은 그 날 계획했던 전시도 놓쳤고 예약했던 식당도 못 가셨다고 한다. 애매하게 뜬 시간 탓에 애먼 거리를 걷다가 사진을 찍고, 아침부터 고생을 한 까닭에 배가 너무 고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제일 첫 번째 적힌 메뉴를 시켜서 먹었더랬다. 그런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대충 시킨 메뉴는 여행 중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고 적당히 시간 때우다가 찍은 사진은 인생샷이라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을 하셨단다. 완전한 ‘계획 실패’였지만, 더없이 재미있는 여행이 된 것이다. 감독님의 여행기를 들으며 성공적인 여행의 반댓말은 결코 계획에 실패한 여행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실패한 여행이란 너무나 순조로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 아닐까, 신이 나서 나에게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는 감독님을 보며 확신했다.

11월의 달력을 넘긴 나는, 우리 인생이 어쩌면 여행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획 실패가 여행을 망치지는 않듯이, 오히려 예기치 못한 일들이 그 순간을 더 깊이 새겨줄 때도 있으니.

그리고 10월의 불청객들을 찾아보았다. 평영을 마스터했고, 한국사 공부를 하고 있고, 좋은 아이템을 구상했다. 사실 이것들은 계획 실패에서 자란 것들이다. 접영 마스터를 위해 연습을 하다 보니 평영이 늘었고, 시나리오 디테일을 위해 자료조사에 매진하다보니 한국사를 파게 되었고, 막차를 놓쳐 걸어가며 사색하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아이템을 기획했다.

이제껏 계획이라는 틀에 갇혀 실패한 것들로 나를 질책하며, 계획 없이 찾아온 성과들을 미처 즐기지 못하고 보낸 순간들을 떠올렸다. ‘성과’라는 이름으로 보람을 주는 계획의 성공 못지않게, ‘선물’이란 이름으로 기쁨과 감사를 주었던 계획 없던 성공의 순간들. 그래서 이번 11월은 반성의 채찍을 꺼내드는 대신 새로운 계획을 하나 세웠다.

‘굴러 들어온 선물 찾아보기! 그리고 나의 남은 날 중 가장 젊은 오늘에게 선물하기!’

글=문다애
영화 기획자와 시나리오 작가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젊은이다.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지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인데, 11월을 보내는 마음을 글에 담아 기고해주었다.

문다애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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