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바이오텍(주) 윤영중 회장

열정과 의욕만으로 환경산업에 뛰어든 지 33년 만에 연매출 500억 규모의 건실한 중소기업을 일군 윤영중 회장. 세계적 봉사단체인 국제로타리의 3750지구 총재로도 취임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그의 성공스토리가 궁금해 찾아갔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실패를 거듭한 이야기들뿐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어떻게 이겨냈는가?’ 거기에 성공비결이 숨어 있었다.

성공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1979년 2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윤영중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짐이라고는 옷가방 하나에, 현장실습에서 받은 봉급을 모아 어렵사리 마련한 경기공업전문대 한 학기 수업료 8만 8천 원이 전부였다.

“낮에는 온갖 막노동에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밤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방학이면 구로공단에서 두어 달씩 일했는데, 사장님들한테 ‘학교 다닌다’는 이야기는 못했어요. 그럼 써주지를 않거든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어깨 너머로 기술만 배워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상원 엔지니어링이라는 환경업체에 취업했습니다.”

사장은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으로 일을 시켰다. 하도 일이 많아 학교에 제때 가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학생임을 밝히고 평일에 못한 일은 주말에 출근해 하는 조건으로 겨우 회사에 다녔다. 주말이나 공휴일도 일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은 이때 생겼다.

“제대하고 복직했더니 사장님이 ‘너 설계실 갈래, 생산부 갈래?’ 물으시더군요. 도면 그리는 일은 충분히 했다 싶어 생산부에 가기로 했죠. 그런데 생산부장님이 술을 좋아하셔서 낮 12시에야 나오시는 거예요. 윗 분들이 ‘부장 어디 갔냐?’고 물으면 ‘출장 갔습니다’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죠. 부장님이 할 작업이나 업무보고가 자연스레 제 몫이 됐습니다. 덕분에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죠.”

그러다 뜻하지 않은 일로 그는 생산부장과 독립해 회사를 차렸다. 생산부장이 사장, 그가 공장장을 맡았다. 그런데 부장은 사장이 된 뒤에도 좀처럼 술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영업·설계·생산을 다 도맡았다. 그즈음 그는 서점을 시작했다. 구청에서 근무하던 아내가 유난히 책을 좋아했기에 구청을 그만두고 서점을 하게 한 것이다. 사람들 왕래가 잦은 길목을 골라 연 서점은 정말 잘되었다. 하지만 6개월쯤 되니, 길 건너편에도 위쪽 정거장에도 서점이 생겼다. 결국 서점을 접었다. 책은 모두 반품하고 책값으로 받은 어음을 선배한테 맡겼는데, 그만 선배가 어음을 갖고 사라져 버렸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큰 실패였다.

“500만 원이나 되는 빚만 남고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형집에 얹혀살며 ‘투잡’을 뛰었어요. 지인이 부산에 와서 환경오염 방지시설 설계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토요일 오전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저녁 비행기 타고 내려가 밤새 공장 설계하고, 도면 그리고, 견적까지 낸 뒤 일요일 마지막 비행기로 올라오곤 했지요. 이틀을 밤새고 월요일 첫 비행기로 올라올 때도 많았어요.”

그렇게 1년을 꼬박 일해 빚을 갚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그후 새로운 동업자를 찾아 인바이오텍을 설립해 함께 경영하던 중, 그 동업자가 따로 회사를 차리고 영업담당자 등 핵심인력을 빼가려 한 적도 있다. 1991년에는 구미공단에서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이 터지면서 환경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환경업체들로서는 크게 성장할 좋은 기회였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환경사업에 잠재력이 있다고 여긴 기업체들이 너도나도 이 일에 뛰어들었어요. 환경사업은 수요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급자가 많아지니 경쟁이 심해져 덤핑사태까지 벌어졌어요. 문을 닫는 환경업체가 속출했지요.”

1997년에는 IMF 금융위기가 한국을 강타하면서 또 한 번 수많은 동종업체들이 쓰러졌다. 인바이오텍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남보다 두세 배 더 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인재육성, 기술혁신, 인화단결, 책임완수가 인바이오텍의 사훈이다. ‘경영자라면 일 잘하는 인재,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인재를 길러내야한다’는 것이 그의 경영자론이다.
인재육성, 기술혁신, 인화단결, 책임완수가 인바이오텍의 사훈이다. ‘경영자라면 일 잘하는 인재,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인재를 길러내야한다’는 것이 그의 경영자론이다.

꿈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 겸비하게

IMF 위기도 극복하고 경영도 본궤도에 오른 지난 2000년, 윤영중 회장은 회사 내에 특급조치를 단행한다. 별도의 법인을 설립해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에 활기와 긴장을 불어넣는 한편, 수익을 내지 못하는 부서원들을 모아 신사업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직원들 앞에서 그는 폭탄선언을 했다. “저는 여러분과 새 회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회사가 수익을 낼 때까지 급여를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회사를 바꿔놓겠다는 각오를 내비친 것이다. 인바이오텍에서 분사한 새 회사의 이름을 그는 ‘환경기계공업(주)’라고 붙였다.

“적자를 거듭한 기존사업에서는 절대 이익을 낼 수 없습니다. 트렌드가 중화학공업에서 반도체 등 정밀산업으로 옮겨가면서 난분해성 액상 폐기물과 폐수가 점점 많이 발생합니다. 그걸 수집·운반해서 안전하게 처리하는 사업을 해 봅시다. 거래업체에 지어준 폐수처리장을 운영·관리하는 일도 합시다.”

그렇게 시작된 환경기계공업은 뜻밖에 성장을 거듭하며 순익이 인바이오텍을 뛰어넘는 알짜기업이 되었다. 덕분에 인바이오텍은 화성, 안산에 공장을 신축하며 중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발전은 커녕 생존도 어려웠을 겁니다. 직원들도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안주했을 테고요. 변화는 자신을 찢는 고통 없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산전수전을 겪으며 웬만한 문제는 거뜬히 뛰어넘을 내공을 터득한 윤 회장도 딱 한 번 못 견딜 만큼 힘들었던 적이 있다. 2011년 화성공장 폭발사고다.

“당시 저는 해외출장 중이었습니다. 허겁지겁 귀국해 달려가보니 2천 평 규모의 공장이 몽땅 불에 탔고, 인접한 32개 업체들도 큰 피해를 입었더군요. 직원 중 하나는 전신화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고요. 슬픔에 빠질 겨를도 없이 팔을 걷어붙여 20여 일 만에 현장을 수습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은 바닥을 쳐도 쉽게 일어설 수 있다. 이후 인바이오텍은 남들이 안 하는 분야, 못 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일감을 수주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윤 회장은 자녀에게도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쓰러졌을 때 새로 도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말한다.

“지인 중에 사고로 두 팔을 잃은 분이 있어요. 그분을 볼 때면 마음에 말할수없이 큰 위로를 얻어요. ‘저런 분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데, 그에 비하면 난 정말 행복하구나’ 싶죠. 제 문제가 너무도 작게 느껴집니다.”

지난해 4월 준공된 인바이오텍 당진사업장 내부의 모습.
지난해 4월 준공된 인바이오텍 당진사업장 내부의 모습.
안산에 위치한 인바이오텍 본사 외관.
안산에 위치한 인바이오텍 본사 외관.

도면은 베껴도 경험은 베낄 수 없다

윤영중 회장은 낯선 것을 즐기며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미다. 똑같은 문제도 기존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다르게 풀 방법은 없을까?’를 철저히 고민한다. 사실 환경사업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폐수처리장을 설계해도 피혁공장이냐 반도체공장이냐에 따라 발생하는 폐수의 종류와 특성이 다르다. 수십 가지 물질을 측정·분석하고, 처리방법을 찾아 철저한 테스트를 거친 뒤에 어떻게 설비로 구현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경영자가 된 뒤에도 윤 회장의 몸과 마음은 늘 현장을 향해 있었다. 신기술을 도입하는 데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1987년 인바이오텍을 시작할 때도 컴퓨터와 프린터부터 장만했어요. 단가와 수량만 입력하면 바로 견적서가 나오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는 종이에 표 그리고 계산기 두드려 견적서를 쓰던 시절이었죠. 이듬해 설계 프로그램인 캐드CAD가 나왔을 때도 컴퓨터 두 대까지 5천만 원을 들여 구입했습니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돈이었죠.”

이렇게 일해 온 덕분에 윤 회장은 국내최초 타이틀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안양의 평촌 쓰레기소각장이다. ‘쓰레기를 소각할 때 나오는 매연과 유해가스를 동시에 잡을 수 없을까?’ 고민하던 그가 독일 기술을 국산화해 적용한 곳이 평촌소각장이다. 특히 그가 사용한 다이옥신 핵심 저감설비인 반건식 백필터bag filter는 현재 노원, 목동, 부천, 다대포, 송도 쓰레기소각장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여느 업체들이라면 철저히 보안을 지키는 폐기물 처리설비 설계도면도 아낌없이 공개합니다. ‘우리 것을 베낄 때 우린 한 발 앞서간다’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경쟁사에서 발주처에 낸 도면이 우리 것과 똑같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저는 발주처에 ‘여기는 이러저러한 원리가 적용된 거다. 경쟁사 담당자에게 물으면 대답을 못할 거다’라고 합니다. 원리도 모른 채 무작정 베낀 거죠. 도면은 베껴도 경험은 절대 베낄 수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이 기회도 살릴 수 있다

인생이든 사업이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윤 회장의 지론이다. 준비된 사람은 언제든 앞설 수 있다는 얘기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머리 좋은 사람도 열심히 하는 사람 못 이깁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 못 이기고요. 즐기는 사람도 운 좋은 사람은 못 이겨요. 그런데 운도 준비하고 있어야 기회를 살릴 수 있어요.”

경영자로서 시장을 주시하다 보면 산업의 판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한때 그의 주요거래처는 섬유와 염색 공장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지산업 붐이 일었다. 제지의 뒤를 이어 자동차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도금업체들과의 거래실적이 확 늘었다. 이후 휴대폰 부품을 거쳐 지금은 반도체 업체가 가장 큰 거래처가 됐다.

“저희 회사가 꾸준히 성장한 건 이런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준비했기 때문이죠. 위기도 준비하면 기회가 됩니다. 인생은 상대성 게임입니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돋보일 수 있습니다.”

그는 취업이 지상과제가 된 젊은이들을 향해서도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똑같이 취업이 힘든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힘들다’고 푸념만 하며 부정적인 생각에 자신을 가둔다. 반면 ‘내가 힘들면 남도 힘들겠네. 그럼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오겠구나’ 하고 마음에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직원이 둘 있는데 한 사람은 정장 차림으로, 다른 사람은 대충 차려입고 출근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갑자기 출장을 보낼 일이 생겼어요. 윗사람이라면 누굴 보내겠어요? 당연히 정장 입고 온 사람을 보내죠. 다음번에는 누굴 출장 보낼까요? 지난번 다녀온 그 사람을 보낼 겁니다. 작은 태도의 차이가 기회의 차이를 낳고 결과의 차이로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준비하지 않고 시키는 일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태도로는 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윤영중 회장은 일찍부터 ‘기업이윤 사회 환원’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외에서 장학금 및 학용품 지급, 불우이웃 및 노인 돕기, 기술인 양성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윤영중 회장은 일찍부터 ‘기업이윤 사회 환원’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외에서 장학금 및 학용품 지급, 불우이웃 및 노인 돕기, 기술인 양성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세상에 영원한 내 것은 없다

인바이오텍 본사에 마련된 윤영중 회장의 집무실 한편은 그가 지금까지 받은 상장, 표창장, 감사장들로 빼곡 채워져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표창, 환경부 장관 표창, 경기도지사 표창, 경기도환경 그린 대상, 자랑스런 한국인 인물 대상 등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수원검찰청 안산지청 형사조정위원장, 안산시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위원장, 우리사이장학회 회장 등 그동안 맡았거나 맡고 있는 직함도 많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해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충실히 납부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은 기업인의 책무입니다. 나아가 불우이웃 및 노인 돕기, 에너지 절약사업, 장학금 지급, 후배 기술인 양성 등을 통해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지역사회가 잘되어야 기업도 발전할 수 있거든요.”

‘내가 가진 재물뿐 아니라 재능, 시간까지 다른 사람들과 나눠 쓴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신의 시간까지 남들과 나눠 쓰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지인들 사이에서 ‘밥을 가장 빨리 먹는 사람’으로 통한다. 그렇게 아낀 1분 1초를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쓰겠다는 의도에서다.

“사람은 모름지기 태어나서 세상 것을 잠시 빌려 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환경오염 방지사업을 꾸준히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사는 자연은 후손들의 것을 빌려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깨끗이 써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윤 회장은 지난 7월부터 세계적인 봉사단체인 로타리클럽 3750지구의 총재로 취임해 활동하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나눔으로 기적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회원들의 기부 및 봉사를 부지런히 독려하고 나섰다. 그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3750지구는 7월에만 104만 달러(약 12억 7천만 원)라는 막대한 기부금이 국제로타리재단에 기부되었다. 한 달 만에 이 정도 금액을 모금한 일은 전 세계 로타리클럽을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

로타리클럽 지구 총재까지 맡으면서 전보다 몇 배는 바빠진 윤영중 회장. 회사를 경영하는 틈틈이 지역 로타리 회원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밤 10~12시가 된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밀린 회사업무를 처리하고 국내 및 해외 로타리클럽에서 온 메일들을 확인하고 답신을 작성한다. 내년이면 환갑이지만 그는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의욕과 열정으로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정확히 40년 전, 주경야독의 꿈을 품고 서울로 향했던 청년 윤영중도 어쩌면 저런 모습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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