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하상욱

시밤, 시로, 서울 시… ‘초입부터 웬 욕설에 비속어냐?’고 오해해선 곤란하다. ‘시밤=시를 읽는 밤’ ‘시로=시로 위로받기’ ‘서울 시=서울 사는 도시인의 심정을 그린 시’니까 말이다. 하상욱 시인이 지금까지 펴낸 시집들이다. 흔히 말하는 ‘아재개그’로 여기거나 피식 웃고 넘기기에는 대중,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의 호응이 심상찮다. 하상욱이 전자책업체 리디북스를 통해 무료로 배포한 시집들은 10만 건 넘는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며 인터넷과 SNS를 타고 퍼져나갔다. 온라인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종이책으로 발간된 <서울 시> 1권은 6개월 동안 2만 5천 부가 팔렸다. 시집은 국내 출판계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외면받는 장르임에도 말이다. 이유가 뭘까? 실제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를 살펴보자.

이걸 시라고 해야 할까, 언어유희라고 해야 할까? 그의 시는 언뜻 경계가 모호하지만, 읽고 나면 절로 무릎을 탁 치며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뜻이 통할 때가 많다. 광고카피처럼 귀에 착착 감기는 감각적인 운율과 단순명료한 어휘는 읽는 재미까지 선사한다. 물론 그 뒤에는 유쾌하고도 진지하게 현실을 꼬집는, 예리한 관찰력이 자리하고 있다.

마침 하상욱 시인은 기자의 같은 과 선배이기도 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니 대학 시절, 광고공모전에 응모하려고 몇 날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며 디자인과 카피와 씨름하던 모습이 겹쳐보이는 듯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 지난 10여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디자이너 지망생이던 그가 어떻게 시인으로 변신했는지 듣고 싶어졌다. 그렇게 연락이 닿아 지난 5월말, 홍대 근처의 카페에서 ‘선배이자 시인’인 하상욱을 만날 수 있었다.

잘하는 일 vs. 하고 싶은 일, 하상욱의 선택은?

‘상욱 선배’는 졸업 후 5년 동안은 웹디자이너로 일했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틈틈이 인터넷에 취미로 올린 글이 유명세를 타면서 전직轉職을 생각했단다. ‘시인이 되면 어떨까?’ 마침 인터넷에 올린 글을 엮어서 낸책이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여러 곳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서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시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로 한것이다. ‘물론 예술가로서 성공하거나 거창한 걸 이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제 시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인세와 강연료로 수입이 들어오면서 내린 결정이었어요. 기본적인 생계도 보장이 안 되어 있는데 무작정 ‘꿈을 좇겠다’며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가혹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잘 아는 화가 반 고흐 또한, 살아생전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해 물감을 살 돈조차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꿈을 접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언론이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안정된 환경 속에서 시인으로 자신의 꿈을 펼쳐가려고 했던 하상욱의 선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우리 취준생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잘하는 일을 할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분방한 문체의 비결은 만화책?

다음으로 국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하지도 않았는데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비결이 궁금했다. 혹시 독서를 업으로 삼고, 시 습작을 하며 글솜씨를 갈고닦은 건 아닐까? 하상욱은 고개를 저었다. ‘10대 때 봤던 몇천 권의 만화책이 독서라면 독서고, 20대 때 인터넷에서 접한 댓글들 정도가 짧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 지식’이라고 했다. 그는 정제되고 다듬어진 책 속 문장들을 기피한다고 한다. 정형화된 문체를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기에 오히려 실제 삶과 더욱 가까운 비유를 찾아내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었단다.

그만의 개성이 빛나는 시를 쓰는 비결을 묻자, 그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단어나 문장을 머릿속에서 확장해 나가며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령 시집 <시로>처럼, 직장생활을 소재로 하는 시를 쓸 때는 출근부터 퇴근까지의 하루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체적인 스토리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 그만의 시 작법이라고 했다.

하상욱의 시에는 중의적인 단어나 표현이 자주 등장 한다. 도저히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들,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문장과 단어들이 그의 시에서는 쉽게 하나가 된다. 더구나 그 시는 짧으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법한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흥미를 끌고 뇌리에도 오래 남는다. 일상에서 간과하기 쉬운 경험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는, 치밀한 사고와 촘촘한 구성력에서 나온 그의 시들은 아재개그나 얕은 말장난으로 치부되지 않고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

사고의 즐거움, 소통의 기쁨을 아는 시인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라면 늘 좋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수없이 고민하며 다양한 시도를 한다. 하상욱 또한 처음에는 그동안 쌓아둔 이야깃거리들을 풀어 시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으로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이야깃거리가 바닥난 것이다. 그 후로는 글감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저장해두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짧게 끝나느냐, 롱런하느냐는 ‘내 것 이외에서도 답을 찾는가’에서 결정된다고 봐요. 지금의 제 지식이나 경험만 갖고는 시로 정리할 수 없는 소재도 일단은 저장해 놓고 답을 찾아 나가요. 나중의 ‘저’는 시로 써낼 수 있을 테니까요.”

하상욱은 창작의 고통을 감당하며, 대중의 기대치를 지속적으로 만족시키는 사람만이 프로로 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SNS에 매주 서너 번 꾸준히 시를 올린다.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틀에 한 번꼴로 남들 앞에 보여줄 만한 시를 쓰려면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 봐야 한다는 사실을. 그런 시 쓰기 작업을 지난 7년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으로 그는 ‘독자’를 꼽았다. SNS에 시를 올리며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소통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고 행복했단다.

“저는 남보다 앞서나가고 싶지는 않아요. 왜, 같이 걸어가면 옆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제 시도 특별히 새롭기보다, 사람들이 읽으면서 ‘나도 그 생각 한 적 있는데’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낸 네 권의 시집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특별한 해석 없이 쉽게 와닿고,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일상의 경험들을 소재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하상욱의 시는 판타지나 드라마 같은 극적인 얘기가 아닌, 살면서 느끼는 감정을 재밌게 풀어내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진부하거나 부정적일 수 있는 내용을, 반전이라는 요소를 넣어 재치있게 표현한다.’ 네이버에 올라온 어느 독자의 평이다.

때로는 불안감이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던 사람들과 시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하상욱. 글을 써서 먹고사는 ‘글쟁이’들의 수입원은 원고료, 외부 강연료, 책판매로 얻는 인세 등 크게 세 가지다. 하지만 글이나 강연 청탁이 늘상 있는 것은 아니고, 인세 수입 또한 일정치 않기에 하상욱 역시 ‘일거리가 끊어지면 어떡하지?’라는 현실적인 고민과 슬럼프에 봉착하곤 한다.

“그런데 불안이 극도로 커지면 슬럼프가 극복되더라고요. 현실에 완전히 집중하게 되니까요. 애매한 두려움이 완전히 발등에 불이 떨어질 정도로 커지면 슬럼프고 뭐고 없어요. 스스로를 채찍질해서라도 벗어나게 됩니다.”

그 채찍질의 결과물이 바로 노래 작사·작곡과 방송출연이다. 밴드 ‘십센치’와 공동작업한 노래 ‘다 정한 이별’을 발표하는가 하면, 듀오 ‘옥상달빛’과도 ‘좋은 생각이 났어, 니 생각’을 불렀다. 6월

지난 달 2일 방영된 SBS 스페셜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작은 습관’ 편에는 재연배우로 출연해 유머러스한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혹시 천성이 부지런한 건 아닐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긍정의 힘만 사람을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불안감도 큰 힘이 돼요. 뭔가 익숙지 않은 일을 하면 불안해지고, 그때 집중력이 100퍼센트까지 올라가고 잠재력도 발휘되거든요.”

여유로운 삶은 자칫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스스로 만족스러운 시보다, 자신의 글을 소비해주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시를 쓰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언제까지 자신의 시를 좋아해줄지 알 수 없지만, 힘닿는 데까지 시를 쓰며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기자는 그를 시인으로 소개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시가 기존 시문학의 범주에 포함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다. 실제로 온라인에서도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하상욱의 시를 좋아하고 즐겨 퍼나르는 사람들 못지않게 ‘표현이 가볍다’ ‘뜻을 음미하고 되새길 만큼 깊은 맛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만나본 하상욱은 결코 얕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한 가지 시제詩題를 놓고 꾸준히 고민해 글을 가다듬는, 생각하는 글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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