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무대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박성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최고 점수로 졸업하고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며 신예 피아니스트로 주목받는 박성영. 그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남다른 아이가 아니었다. 우연히 간 음악회의 객석 한 구석에서 전율을 느끼며 들었던 음악이 그에게 꿈을 주었고, 꿈은 그를 피아니스트로 만들었다. 작고, 내세울 것이 없었기에 자신을 비우고 꿈만 품을 수 있었던 연주자. 박성영의 첫 독주회는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꿈을 그린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로 시작되었는데, 그의 인생 이야기만큼이나 감동을 주었다.

피아니스트 박성영이 피아노에 입문한 계기는 여느 여자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엄마 손에 이끌려 동네 피아노학원에 등록하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학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노래수업을 받았는데, 동요를 배우는 날이면 집에 오자마자 악보를 펴고 더듬더듬 건반을 누르며 그날 배운 노래를 복습했다.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 앞에서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좋아하는 동요의 멜로디를 피아노 소리로 듣는 게 흥미로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아노와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가 최정상의 합창과 클래식 공연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연주하는 성가곡을 들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홀을 가득 채우고 객석에 앉아 있는 한 여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성가곡들은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에 휩싸인 그는 그 자리에서 신기한 생각을 했다. ‘나도 저렇게 연주할 수 있다면…. 피아노로 저 곡을 쳐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 합창단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 피아노를 전공해야겠구나!’ 좋아도 싫어도 유별스럽게 내색하지 않는 딸이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선언하자 부모님은 놀란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딸의 의견이라면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뒷바라지 해줄게!’가 부모님의 훈육방침이었기 때문이다.

박성영은 부산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와 피아노 연습을 병행하며 누구보다 고된 3년을 보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지원한 대학에서 모두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때 박성영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열여덟 소녀의 생애 첫 위기였다. 피아노를 전공해서 그토록 소원하던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뒤 가슴을 울리는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꿈은 점점 희미해졌다.

입시에 실패했지만 앞길을 피아노와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실감과 좌절감에 가로막혀 힘을 잃은 그는 새 돌파구가 필요했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인생의 악보를 새로 쓰겠다는 심정으로 해외봉사를 가기로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가 지원한 나라는 러시아, 그중에서도 예술의 도시이자 북해의 베니스라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공교롭게도 다섯 명의 봉사단원 중 그를 포함한 네 명이 음악전공자였다. 본의 아니게 연주로 봉사할 기회가 많았고 한국어수업을 하거나 인근 마을들을 방문할 때면 조촐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은 박성영으로 하여금 다시 꿈을 떠올리게 했다. 10개월간 봉사활동을 하며 마음을 정돈하고 학창시절 가졌던 피아노를 향한 열정과 의욕을 회복한 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준 러시아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현지인들과 친숙하게 지내며 언어를 익히고 유학을 대비한 덕에 1년의 예비과정 없이 곧바로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림스키코르사코 프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러시아 하늘 아래에서 눈물 흘리다

러시아에서의 봉사활동은 입시에 실패해 좌절한 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러시아에서의 봉사활동은 입시에 실패해 좌절한 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한국에서 음악을 배우던 시절 박성영은 기계처럼 완벽하게 연주하는 데 치중할 때가 많았다. 실수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는데, 러시아에서는 그런 방식을 통째로 버려야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부총장을 지낸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베젭을 사사한 그는 음악원 수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교수님들은 실수하거나 틀리는 걸 문제 삼지는 않으셨어요.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죠. 연주에 느낌을 담아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레베젭 교수 님은 특히 표현을 다양하게 할 것을 강조하셨어요. 비슷한 악절이라도 절대로 비슷하게 연주해서는 안 되죠. 교수님은 자신만의 표현을 담아 연주하시는 데 탁월한 분인데, 그런 분에게 배울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죠.”

박성영은 러시아 공훈 예술가인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베젭을 사사했다.
박성영은 러시아 공훈 예술가인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베젭을 사사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처럼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다고 한다. 악보를 외워 연습해 가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음표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이해해 표현하기란 그에게 어렵기만 한 과제였다. 그러다 눈을 돌려 러시아 학생들을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배우지만 그들은 학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월등한 기량을 갖춘 연주자들이었다. 연습이 아닌 ‘연주’를 하는 그들의 피아노 소리에 박성영은 자신이 너무도 작게 느껴졌다.

“음악원이 5년 과정인데, 4년 동안 많이 울었어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힘들었죠. 연주 경험이 적다 보니 시험을 보거나 무대에 오르면 긴장한 탓에 집중이 안 됐어요. 페달을 밟는 발이 어찌나 떨리는지 피아노가 진동할 정도였죠. 그러다 결국 실기시험을 망쳤는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얼 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크리스천인 제가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더라고요. ‘하나님, 제게 피아노를 좋아하는 마음만 주시고 재능, 유연성, 담력은 안 주시면 어쩝니까?’라고 말이죠. 단 한 번의 실수로 죽도록 연습한 것이 허사가 된다 생각하니 더 이상 못하겠다는 심정이 되더군요.

또 한 가지는 마음을 열고 지내지 못한 점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데다 속마음을 표현하길 부끄러워해서 주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오해하고 부딪히는 일이 잦았어요. 저한테 조언하거나 질책하는 듯한 말을 들으면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제 틀 안에서 갇혀 지냈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머나먼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울며 걷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음악원 졸업을 1년 앞둔 즈음에 그의 마음에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괴롭고 힘든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어느 날엔가 나에게서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를 봤어요. 그런데 ‘이런 힘든 경험 좀 하면 어때?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지적을 받을 수도 있고, 시험을 망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죠. 제 자신이 작은 사람으로 느껴져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조금씩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전 과목 만점으로 막 내린 콘서트홀에서의 졸업시험

졸업시험이 치러진 음악원 콘서트홀. 박성영은 쇼팽 콘체르토, 모차르트 소나타, 바흐 평균율을 연주했다.
졸업시험이 치러진 음악원 콘서트홀. 박성영은 쇼팽 콘체르토, 모차르트 소나타, 바흐 평균율을 연주했다.

박성영은 유학생활 중에 성경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는데, 창세기의 한 구절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말씀하신 구절인데, 마치 제게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성영아, 네 생각 밖으로 한번 나와 봐. 나는 안 된다는 절망, 더 이상 못하겠다는 두려움, 그런 것들을 박차고 나와 봐. 그리고 꿈을 기억해.’ 아브라함이 별을 바라보듯 저도 제 꿈을 떠올려보았어요. 그리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러시아에 오기까지 과정들도 생각해보았죠. 꿈이 이루어지는 데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죠.”

그에게 찾아온 변화는 졸업시험을 준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졸업시험은 피아노 전공, 앙상블, 반주법 등 세 영역에서 치러진다. 피아노 전공시험에서는 시대가 서로 다른 세곡을 선정해 연주해야 하는데, 박성영은 그 중 한곡으로 쇼팽의 콘체르토를 선택했다.

“졸업시험은 음악원 콘서트홀에서 치르는데, 15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연주자들이 그고셍서 연주했겠어요. 그런데 제게 이런 마음이 드는거예요. ‘나는 이번 시험에서 그 어떤 연주자보다 아름다운 쇼팽 콘체르토를 연주할 거야.’ 저는 절대로 이런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피아노가 흔들릴 정도로 긴장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잘 쳐야겠다는 욕심도,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다 비워지고 나니 음악만 남았어요. 쇼팽의 콘체르토만 온전히 남는데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박성영은 세 영역에서 모두 최고점인 5점을 받았다.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는 러시아 학생들도 5점을 받기가 힘든 시험에서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는 마리아 유디나 국제 콩쿠르에도 참가했다. 한계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에 꿈틀대는 마음을 따라 도전할 일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콩쿠르에서 또 한번 쇼팽의 곡에 자신을 던졌고 주목받는 피아니스트로 떠오르며 2등상을 수상했다. 그는 쇼팽의 곡을 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을 때 쇼팽 곡이 함께였고, 천재성뿐만 아니라 자신을 송두리째 음악에 던져 넣은 진정한 피아노의 시인 역시 그 어느 시기에는 티끌보다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자신을 발견했으리라 느꼈기 때문이다.

꿈꾸는 피아니스트, 첫 독주회를 열다

독주회 연주 모습. 슈만, 스크랴빈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시작해 모차르트,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 합창환상곡 등 친근하고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독주회 연주 모습. 슈만, 스크랴빈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시작해 모차르트,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 합창환상곡 등 친근하고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어느덧 5년째인 올해, 그는 꿈에 그리던 첫 독주회를 열고 청중들을 만나려 한다. 비밀을 공개하듯 독주회의 주제가 ‘꿈’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는데, 스토리가 담긴 범상치 않은 공연임을 알 수 있었다.

“무대에서 그동안 제가 쌓은 실력을 보여주려는 건 아닙니다. 평범하고, 오히려 보잘것없기까지 했던 학생에게 꿈이 심겨지고 그것이 발아하기까지의 사연과 그 과정에서 느낀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요. 꿈이 이루어지는 데는 항상 장애물이 버티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 저였는데, 제게서 한 걸음 벗어나는 지혜를 얻고 보니 꿈이 무엇보다도 커지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시는 소중한 분들이 되었어요.”

그라시아스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독주회의 레퍼토리에서 세심하게 청중을 배려하는 그의 자세가 느껴졌다. “음악으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곡으로 선정했습니다. 피아노 음악을 지루하게 느끼시는 분들이 많은데, 작곡자나 연주자가 음악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아시고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사진 | 김홍수 포토디렉터
사진 | 김홍수 포토디렉터

박성영은 ‘낮은 마음’으로 연주하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감동을 줄 수 있다고 귀띔하며, 해외공연 중에 겪은 뜻밖의 실패담을 이야기했다. “아프리카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무대에 올랐는데 에어컨 바람이 하도 세서 악보를 객석으로 날려버렸어요. 결국 연주를 중단했죠.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무대에 서는 자세가 달라져요. 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자신을 과시하는 듯한 연주는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더라고요.” 음악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가 젊은 피아니스트로부터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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