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미래당 국회의원 김중로

지금 세계는 신냉전新冷戰 시대로, 강대국들의 다툼과 분열은 총성 없는 무역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정치는 과거 적폐에 머물러 있고, 사람들은 당장의 확실한 행복에 연연해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내일을 염려할 여유는 바늘만큼도 없어 보인다. 게다가 나의 삶, 나의 행복이 국가안보와 무슨 상관이 있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김중로 의원은 단호하게 일갈한다.
“국가안보가 왜 중요한지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경제는 생활이지만 안보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에 실패하면 열심히 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됩니다. 그러나 안보는 생존의 문제라서 리허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국가의 흥망은 단번에 결정되고, 국민의 사활死活도 단번에 정해집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첨단무기 시대엔 옛날처럼 피란 갈 일 없이 앉은 자리에서 그냥 끝나요.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도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취임사에서 밝히지 않았겠습니까? 국가안보는 내 생존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앞두고,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중로 의원을 만났다. 국방안보에 대해 내린 그의 명쾌한 정의에서 보듯이, 나라의 안전보장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이다. 안보엔 예행연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찍이 로마의 전략가 베게티우스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전쟁을 불사하면서 평화를 지킬 때 비로소 평화가 유지되는 것임을 우리는 역사의 고비마다 굽이마다 목도해왔다. 문득, ‘뼛속 군인’을 확신하는 그가 사단장 예편 후 정치에 발을 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66세에 새롭게 정치 인생을 시작하셨습니다. 뒤늦게라도 입문한 뜻이 있으십니까?

군생활 35년 동안 가족은 제게 항상 3순위였습니다. 국가와 국민이 전부였으니까요. 전역하고 나면 가족에게 충성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면 안보불감증에 걸린 현실을 못 본 척, 모르는 척할 수 없었어요. 고가의 절대무기絶對武器는 국가안보에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하는데 경제는 또 정치와 맞물려 있습니다. 안보를 지키려면 정치판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변혁을 위해서 발을 디뎠습니다. 장차 청소년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 국가라는 울타리가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를 지키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논쟁보다 안보가 훨씬 더 상위개념입니다. 저는 의정활동을 할 때도 국가와 국민에게 유익한지 유해한지부터 먼저 살핍니다.

의원님의 뚜렷한 안보의식과 불변의 애국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국사, 세계사 같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우리나라가 외부로부터 982회나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 우리는 침략 당해야 했지? 왜 우린 그런 수모를 겪어야 했지? 내가 커서 군인이 되면…’ 그런 마음으로 군인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우리나라 오천 년 역사에서 외세의 침략이 1천 번이라면 평균 5년마다 전쟁을 겪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잦은 침략에서도 살아 남은 우리는 역경에 강한 유전인자를 타고난 민족이지 싶다. 하지만 전쟁이 나라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에 태어난 김 의원은 1953년 체결된 한미동맹 덕분에 자신이 살아온 70년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역사관이 뚜렷하고 애국심이 남달랐던 그는, 고3때 진로를 정하는 과정에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육사를 선택했고 나라 지키는 마음으로 학업과 훈련에 매진했다.

‘군인’이라는 꿈을 이뤘을 때 무엇을 중시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전쟁을 곁에 두고 사는 군인에겐 강인한 체력 못지않게 지혜로운 판단력이 중요합니다. 전쟁은 예술이거든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최고의 예술.... 그래서 군인은 군사학 외에 심리학, 철학,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위기상황에서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생도 시절부터 전역할 때까지 1,500권의 책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도서관을 주로 이용했지만, 필요한 책은 박봉 시절에도 반드시 샀어요.

육사 졸업 후 장교가 되어서는 병사와의 간격을 없애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계급이 이등병이라고 사람도 이등병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상하소통을 원활하게 할 것인가? 거기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복무하시면서 근무지를 수십 번이나 옮기셨다고 들었는데, 새로 부임하면 부대원들을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군부대에서 지휘관을 역임하면서 김중로 의원은 무엇보다 상하소통을 강조하였다.
군부대에서 지휘관을 역임하면서 김중로 의원은 무엇보다 상하소통을 강조하였다.

지휘관이 병사들을 진심으로 대해 주면 아무리 훈련이 고되어도 탈영하거나 자살하지 않아요. 조직원들을 강제로 이끌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따라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선지 제가 부임해가면 그 부대에 봄날이 왔다고들 좋아했어요.

한 예로, 제가 사단장으로 있을 때 이등병 전입신고를 안 받았어요. 처음에는 저도 신고를 받고 큰 소리로 그들에게 일장연설을 했습니다. 끝나고 사단장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적어내라고 했더니 제대로 써내는 병사가 없었어요. 어느 보직에 들어가 어떤 사람들과 만날지만 걱정을 하느라, 아예 듣지도 않은 거예요. 형식적인 신고식이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고참 부사관에게 사단 소개를 직접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신병들이 오면 곧바로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탕 안에 목만 삐죽 내놓은 상태에서 부대가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부사관이 브리핑을 했습니다. 목욕 후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도 부사관은 부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런 색다른 오리엔테이션에 병사들의 호응도가 높았습니다. 한편, 논산훈련소에서 지급받은 신발부터 모자까지 잘 살펴서 몸에 제대로 맞는지 일일이 체크를 해주었습니다. 신발이 안 맞는다고 괴로워서 탈영하는 병사도 있었거든요. 이제 신고식의 마지막 코스로, 소대장과 군의관들을 오라 해서 건강검진을 해주었습니다. 신병 신고는 제일 말단인 소대장에게만 하고 끝냈습니다. 신병들이 바짝 긴장하고 왔는데 사단장은 얼굴도 안 내밀고 목욕에서부터 건강검진까지 다 해주니까 병사들 마음이 다 녹아요. 그들이 긴장을 풀고 마음이 편해지면 절대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문무의 겸비를 위해. 그는 육사 생도 시절에 서울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문무의 겸비를 위해. 그는 육사 생도 시절에 서울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육사 외에 서울대 사범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신 걸로 압니다.

고려 말기에 문무 갈등이 심하지 않았습니까? 문인은 무인을 무시하고, 무인은 문인의 차별에 맞서다가 나라가 혼란에 빠졌지요. 저는 문무를 겸비한 장교가 되고 싶어서, 육사와 서울대 두 곳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칠십 평생에 고비도 있으셨을 텐데, 어려웠던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육군3사관학교 교수부장 시절, 그는 100킬로미터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을 여러 차례 완주했다.(사진 가운데)
육군3사관학교 교수부장 시절, 그는 100킬로미터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을 여러 차례 완주했다.(사진 가운데)

살면서 힘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중령 때까지는 세상 말로 거침없이 잘 나갔어요. 사관생도일 때 ‘총장감이다’ ‘장관감이다’라는 말도 들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주변으로부터 권총 아닌 눈총을 맞았고, 견제와 압박의 상황을 겪어야 했어요. 잘 나가던 인생이 부러지기 직전이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마라톤과 줄담배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를 40회, 100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도 네 번을 완주했어요. 그나마 마라톤 덕분에 몸속 니코틴이 빠졌다고 합니다.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렇게 고뇌하며 견뎠습니다.

계속 승승장구하셨다면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요?

제 마음에 자만심, 독선, 우월감 같은 것들이 가득했겠죠. 나 외에는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려운 시간을 지내면서 내공이 조금씩 쌓여갔고 누구의 탓도 아닌 세계를 보았습니다. 고진감래라고, 저는 이 나이에 현역에서 뛰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어요. 그때 고공행진해서 사성장군까지 달았다면 지금은 은퇴한 노인이겠지요.

남들과 교류를 잘 못하는 방안퉁수들이 이 사회에 의외로 많습니다. 의원님은 주변과 네트워킹이 원활하신 것같은데 비결이 있으십니까?

사회성이 부족해서 그런 건데요. 이를 기르는 데엔 환경과 계기가 중요하고 훈련도 필요합니다. 학생 때 수학여행을 가면 친구들이 밥 먹는 걸 확인한 뒤에 제가 먹었고, 친구들이 모두 취침하는 걸 보고 나서야 제가 잠을 잤어요. 저도 처음엔 맡은 역할 때문에 책임감에서 그랬지만, 반복하다 보니 그런 자세가 몸에 배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지? 이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할까?’부터 생각하게 되더군요. 상대에 대한 배려도 억지로 자꾸 해보면 좋은 습관이 만들어지고 대인관계도 넓어집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자제하는 훈련의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김중로 의원은 2018~2019년 연속 의회법률 정보회답이용 부문에서 최우수 의원상 수상, 국회 입법조사처 공로패 수상, 대한민국 국정감사 우수의원 선정, 2년 연속 법률소비자연맹 선정 헌정대상 수상, 제7회 국회를 빛낸 품격언어상 등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또한 국회도서관이 보유한 입법·정책·학술자료 등을 입법에 많이 활용하는 의원으로 평가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왕성한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는 의원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매일 6시에 출근해서 한 시간 반 동안 운동을 합니다. 건강은 그냥 지켜지는 게 아니고 시간과 비용, 자기의지가 합해져야 가능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운동하는 시간은 거르지 않습니다. 웬만한 조찬 회의나 토론 모임보다 운동을 소중하게 생각하거든요. 보통 오전 8시부터 예정된 스케줄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회의하며 지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는 일을 하려고 들면 어마어마하게 할 게 많고, 안 할 생각이면 아무것도 안해도 별로 티가 안납니다.

육사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다면 후배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국회도서관 이용 최우수 국회의원상을 수상한 그가 문희상 국회의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국회도서관 이용 최우수 국회의원상을 수상한 그가 문희상 국회의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고토 회복에 대한 꿈. 그런 꿈을 갖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 바라보는 군인이 됐으면 좋겠다. 나라가 작고 인구가 적으면 절대로 강대국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고구려 때 만주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꿈도 없다.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하고 세계를 굴기屈起하겠다며 큰소리치고, 일본은 대동아의 꿈을 품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꿈이 없다. 한 개인도 꿈이 있고 구멍가게에도 꿈이 있고 기업에도 꿈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국가의 꿈이 없다. 육사 후배들이 나라를 강력하게 할 원대한 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심어주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바른미래당 창당준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바른미래당 창당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는 바른미래당 창당준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바른미래당 창당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중로 의원이 배롱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날 꽃들이 한창일 때 묵묵히 가지를 뻗어 단아한 모양을 만들고 있다가, 온갖 꽃들이 사그라져 밋밋한 8월이 되면 홍색 꽃봉오리를 열어 관상의 기쁨을 선사하는 배롱나무. 그의 정치 인생도 뒤늦은 출발이지만 국가를 사랑하는 열정의 꽃은 개화기간이 오랠 것으로 보였다.

글=조현주(발행인ㆍ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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