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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성중 국회의원 "문제도 답도 모두 현장에 있습니다"
김성훈 기자 | 승인 2019.05.08 16:35

4월 둘째 금요일 오후 3시 50분,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박성중 의원의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그는 지역구 주민 네댓 명과 한창 간담회를 하던 참이었다. 민원을 제기하러 온 주민들은 대개 감정이 격앙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25년 경력의 공무원 출신인 박 의원은 차분한 어조로 대화를 주재하며 민원인들을 설득해 나갔다.
오후 4시까지 예정되었던 간담회는 10분이 더 걸렸다. 손님을 배웅한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기자들을 방으로 이끌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초을 국회의원 박성중입니다.” 방금 전까지 이 방에서 벌어진 설전을 문 밖에서 보았기에 “5분만 쉬었다 하시죠?”라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늘 하는 일인데요, 뭐.” 그는 육체의 피곤을 챙길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놓고 사는 듯했다.

서울 서초구을 자유한국당 박성중 국회의원. 대학 재학 중이던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1982년 서울시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서울시 행정과장, 공보관,서초구 부구청장을 역임했다. 2006년에는 민선 4기 서초구청장으로 선출되어 4년간 재직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봉사와 기부를 실천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사진 박종도 객원기자)

-주민들과 이런 간담회를 자주 하십니까?

매달 첫째, 셋째주 토요일을 ‘민원의 날’로 정해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지역구 주민들을 만나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민원의 날을 통해서만 334명의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더 자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는 요구가 끊이지 않아 둘째, 넷째주 금요일 오후를 추가로 편성해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한 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가야 할 곳, 오라는 곳이 워낙 많아 대중없어요(웃음). 지방 국회의원들은 지역구에 큰일이 없는 한, 월~목요일에는 여의도 국회에서 일하고 금요일 오전에 지역구로 내려가 주말까지 머물며 민심을 살피는 등 의정활동을 이어가지요. 반면 저처럼 서울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여의도와 지역구를 오가며 일합니다. 낮이건 밤이건, 평일이건 주말이건 마찬가지지요. 오늘만 해도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아홉 개나 돼요.
일이 겹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못 가는 곳도 있고, 행사가 진행되는 중간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말이요? 오히려 더 바빠요. 하루에 스케줄이 열 개 넘게 잡힐 때도 많습니다.

박 의원은 스마트폰을 열어 자신의 일정표를 보여 주었다. ‘3/23 토요일 - 7:00 테니스 모임, 9:00 양재1,2동·내곡동 벼룩시장, 10:00 산악회, 11:00 서초 건강걷기 교실, 12:00 지인 자녀 결혼식, 15:00 구청장배 라켓볼대회 개회식….’ 한두 시간 단위로 이동해야 할 만큼 빡빡한 일정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라는 그의 농담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IT분야에도 밝은 박성중 의원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정치인이에요. 주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기자님과 처음 만났는데, 제가 ‘저 좀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주겠어요? 아니죠. 기회가 될 때마다 주민들을 자주 찾아뵙고, 만나면 악수라도 한번 하면서 계속 접촉해야 사람 마음을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죠. 그러다 보니 몸도 마음도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의 숙명인 거죠.
특히 서울은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아서 그런지 다른 지역보다 이해관계가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아요.
결론이 나든 안 나든 당사자들끼리 한 번 두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 과정에서 의견이 조율되고 해법이 나옵니다. 물론 토론이 싸움으로 번질 때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직접 부딪혀야 갈등이 풀려요. 남들보다 뭘 많이 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인터넷만 들어가도 웬만한 정보는 다 나오는데요, 뭐. 문제도 현장에 있지만, 답도 현장에 있습니다. 구청장으로 일할 때도 그랬지요.

-20년 넘게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셨고 구청장을 역임하셨는데, 국회의원에 출마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 3학년이던 1979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1982년부터 서울시청 사무관으로 일했습니다. 청와대에서도 3년 정도 근무했고요. 행정과장, 교통기획 과장, 서울시 공보관, 서초구 부구청장을 거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요. 행정은 법을 집행하는 일인데,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법도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게 많았어요.
개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요. 행정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국회에서 일하면, 주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은 보듬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에 도전했지요.

 

경남 남해 출신인 박 의원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남해에서 졸업했다. 지금과 달리 시험을 치러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던 1960년대 당시, 그는 지역명문인 경남고에 응시해 합격했다. 경남고에서도 그는 전교 10~20등에 꾸준히 이름을 올릴 만큼 수재였다. 하지만 대입시험에서는 두 번 낙방했다. 인생에서 처음 겪은 큰 실패였다. ‘그 실패를 만회하려고 성균관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뒤로는 줄곧 공부에만 매달렸다’는 게 그의 말이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9년,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 한다.

-‘문제도 답도 모두 현장에 있다’는 철학도 오랜 공직생활을 통해 체득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아까도 보셨겠지만 민원인을 응대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요구사항을 접수하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서 국민들의 삶에 편익을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그 맛에 다들 국회의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요(웃음).

-직접 현장을 누비다 보면,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도 정말 많았겠군요.
김영삼 정부 초기에 대통령 민정수석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할 때 일이에요. 1994년 10월에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얼마 뒤 한 TV 시사프로그램에서 한강 대교의 안전성을 지적하고 나섰어요. 한강대교 중간중간에 다리를 떠받치는 교각(橋脚)들이 있는데, ‘강 아래로 교각이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유실되어서 실제로는 다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거죠. 그러잖아도 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어 있던 터라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실제로 그런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공무원들 중에는 강물 속으로 들어가 교각의 상태를 확인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나섰어요. 바닷가 출신이다보니까 수영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거든요. 수영장에 가서 잠수하는 연습도 했고요. 하지만 수영장이랑 강물은 전혀 달라요. 강은 수심이 20미터가 넘거든요.
고인 물에 잠수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르잖아요? 쓰레기나 각종 부유물 때문에 앞도 잘 안 보이고…. ‘한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들어가 보니, 그 무렵 건설업자들이 교각 보수공사를 하고 남은 콘크리트와 폐자재를 모두 강에 버렸더군요. 그게 미처 다 쓸려가 지 않고 교각 아랫부분에 쌓여 시야를 가리고 있으니, 교각이 유실된 것처럼 보였던 거죠. 곧바로 국민들께 사실관계를 알리고 반론보도를 요청했습니다.

김장 나누기나 쪽방촌 봉사 등 나눔과 봉사에도 열심이며, 매달 100만원을 탈북민 대학생에게 기부하고 있다.

-서울시 도쿄사무소에서도 근무하신 이력이 있으시던데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3년 동안 소장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는 주 6일제였지만, 일본은 주 5일제를 시행하고 있었어요. 주말에 여유가 생기니까 한 주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심야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 현장답사를 다녔어요. 위로 아오모리부터 아래로 교토까지 지자체 60여 곳을 탐방했습니다. 우리는 1995년에야 지방자치제를 도입했지만, 일본은 오래 전부터 지방자치제를 실시해 이미 뿌리가 깊었거든요.
그전까지 우리 시장·도지사·군수들은 정부에서 임명하는, 이른바 관선제官選制이다 보니 뭔가 참신한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정부지침을 따라 획일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일본의 지자체들은 저마다 특색을 살려 다양한 축제나 관광상품을 개발해 수익을 올리는 걸 보며 우리에게도 좋은 모델이 될 거라 생각했죠.

도쿄에서 근무하는 동안 박 의원은 와세다대학 박사과정에도 등록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소음이 땅값에 미치는 영향’이 논문주제였다. 현장에 가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업무스타일은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지하철역 인근을 비롯한 도쿄 내 주요 상권 500여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박사과정이 끝날 무렵 귀국해야 해서 학위는 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의 연구는 모교 성균관대에서 도시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2006~2010년 서초구청장으로 계시면서 치매안심센터와 노인종합복지관 등 복지시설을 확충하신 것도 일본에서 근무하며 얻은 아이디어입니까?
맞습니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에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벌써부터 독거노인과 고독사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지요. 또 저희 할머니께서 10년 이상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치매환자 본인과 가족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매센터와 노인복지관 설립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밖에도 서리풀공원을 조성하고 양재천·반포천·사당천 정비사업을 진행하는 등 주민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애를 썼지요.

-인터뷰나 연설 때면 ‘진주는 상처난 조개에서 생긴다’는 금언(金言)을 자주 인용하십니다. 의원님의 삶을 잘 대변하는 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까지 구청장을 했다가 2016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세 번이나 선거에 떨어졌어요. 공직에서 물러나니 그전까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떨어져 나가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괴로웠어요. 그 6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자원봉사도 하면서 지난날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진주조개는 아주 깊은 바다에만 서식하는데, 그중에서도 상처난 조개에서만 진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매서운 추위를 겪지 않은 매화는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지 못한다’는 한시漢詩도 있습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조직이든 고난을 겪어봐야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 세월이 약이 된 셈이지요.

사진 박종도 객원기자

-<투머로우> 청년 독자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이 있으시다면요?

마침 두 딸이 독자들과 연배가 비슷하니, 딸에게 이야기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인생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루고싶다’는 동기나 목표의식이 부족하고, 일이나 공부에 대한 추진력도 많이 약한 듯해 아쉽습니다. 저희 때는 인생의 선택지가 많지 않으니까 일이든 공부든 했다 하면 끝까지 파고들어 성과를 내야 했지요.
물론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고, 가능하면 문제나 어려움은 피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편한 길만 좇는다면 그다지 큰 과실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 제대로 성공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앞서갈 수 있습니다.

자리를 정리하며 박성중 의원의 방을 둘러보니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적힌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노자가 쓴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로,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의미다. 이 구절을 걸어둔 이유를 박 의원에게 물었다. “물은 자기 형체가 없습니다.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네모나게 변합니다. 상대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그게 정치인으로서 제가 가져야 할 태도라는 생각이 들어 걸어놨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었다.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 그는 ‘얼리어답터’로 통한다. 국민 대다수가 인터넷을 생소하게 여기던 2000년대 초, 그는 서울시 홈페이지 개설을 주도한 것은 물론, 시장과 소통하는 전자게시판을 만들었다. 시청직원들 사이에서조차 ‘이런 걸 왜 만들었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오늘날 ‘지자체장과의 대화’ 게시판이 없는 지자체 홈페이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업무효율을 높일 신형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가 출시되면 곧바로 구입해 활용한다.
투박한 사투리와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무뚝뚝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하는 박성중 의원. 하지만 기자가 만난 그는, 늘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과 소통할 기회를 찾으며 민원을 해결하느라 고심하는, 가슴 따뜻한 정치인이었다.

김성훈 기자  kimkija@itomorro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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