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우간다 BAF목회자연합회 총회장 조셉 세루와다

사자·코뿔소·하마 등 야생동물이 뛰어노는 대평원,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 호수, 태고의 자연을 간직한 루웬조리 산까지…. 우간다는 아프리카의 진주라는 별명이 붙은 아름다운 나라다. 국가國歌 제목도 ‘오, 우간다, 아름다운 나라여Oh Uganda, Land of Beauty’다. 하지만 우간다는 여전히 세계인들에게 ‘고통스럽고 비참한 역사를 간직한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1894년부터 1962년까지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62년 독립에 성공했지만 1971년 독재자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민은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아프리카는 물론,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전임 대통령을 따르던 정치인, 군인, 법관, 학자 등 엘리트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는데 그 수는 약 3천 명에 이른다. 그렇다고 측근들을 특별히 아낀 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저지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거나 전기장애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가두었다. 아민이 대통령이었던 시기에 희생된 우간다 국민 수는 약 50~100만으로 추산된다. 1954년생인 세루와다 목사도 아민의 집권기에 20대를 보냈다.

이디 아민이 철권통치를 펼치던 1970년대 우간다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한마디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할 만큼 험악한 시대였습니다. 독재자였던 아민 대통령은 정치, 외교, 종교 등의 분야에서 많은 문제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반대파나 자신과 다른 부족 출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탄자니아 등 이웃나라를 침공하는 한편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며 이스라엘과도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가톨릭·무슬림·성공회·정교회 등 4개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모조리 금지시켰습니다.
아민은 무슬림이었지만, 같은 무슬림 교도라도 종족이 다르면 핍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워낙 그의 폭정이 심했던 터라 아랍 국가들도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요. 약 100만 명 이상이 군인들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국민이 아닌, 아민을 위해 존재했으니까요.

 

이디아민 우간다 전 대통령
이디아민 우간다 전 대통령

종교적으로 탄압이 거세던 당시에 허용되지 않던 기독교를 택한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을 듯합니다.
1975년, 그러니까 제가 스물한 살 때 길거리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아민은 가톨릭 등 4개 종교만을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한다는 훈령을 발표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려도, 심지어 성경을 갖고 다녀도 위범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저도 교회에서 숨어 예배를 드리다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간수들이 죄수를 때리거나 몸을 인두로 지지는 등 고문을 자행했는데요. 다행히 저와 일행들은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석 달 뒤 감옥에서 풀려나던 날, 경찰은 제게 ‘다시는 종교행사를 하지 마라’고 경고하며 협박했습니다. 당시 저희 목사님은 저를 데리고 케냐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케냐에서 신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 공부한 뒤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아민도 1979년에 권좌에서 쫓겨났기에 저는 우간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81년에 귀국해보니 우간다는 나라 시스템은 물론 교회들도 황폐화된 지 오래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무작정 길거리에 나가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원하신다”고 외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노상 전도자로 보낸 7년의 세월, 그것이 오늘날 우간다에서도 손꼽히는 큰 교단인 빅토리크리스천교회의 시작이었다. 38년이 지나는 동안 빅토리크리스천교회는 우간다 국내에만 476개의 교회, 해외에는 21개(탄자니아 13개, 케냐 2개, 르완다 1개, 콩고 1개, 미국 3개, 영국 1개)의 교회를 세울 정도로 성장했다. 라디오방송국과 TV방송국도 5개소를 운영 중이다.

교회가 크게 성장한 건 기쁜 일이지만, 교회를 이끌며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무슬림 극단주의자(우간다 인구 중 기독교는 84%, 무슬림교는 12%)들로부터 여러 번 공격을 당했지요. 기독교를 싫어하던 군인이 저와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소총을 난사했어요. 그런데 총알이 모두 제 머리 위로 날아갔습니다. 몸을 숨길 곳도 없었고 ‘이걸 왜 못 맞혔지?’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한 발도 맞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전도집회를 하는데 누군가가 폭탄을 던졌어요. 그 자리에서 여섯 명이 목숨을 잃고, 마흔여덟 명이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그중 두 명이 더 죽었어요. 무슬림 극단주의자가 한 일이었지요.

평화로울 법한 우간다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군요.
네, 하지만 아민 대통령 때도 그랬듯 기독교는 그런 핍박이나 어려움에서 오히려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저희 교회 목회자들은 전보다 더 자주 설교를 했고, 더 뜨겁게 기도했지요.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오늘이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저희 이야기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목회를 해 온 지난 28년간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1997년에 처음으로 라디오방송국을 세웠을 때입니다. 저는 방송국 설립을 제 사역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자, 전도의 돌파구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으로서 우리만의 목소리를 내고, 전국 어디에든 막힘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방송선교는 그 뒤로도 확장을 거듭해 지금은 총 5개소에 라디오, TV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루와다 목사는 ‘외형적인 탄압보다 더 힘들었던 건, 막막한 일이 생기거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을 이끌어 줄 선배 목회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성경에 적힌 대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난 2002년 10월 8일도 마찬가지였다. 우간다 독립 4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그는 우간다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40년은 한 사람의 반평생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전환의 계기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식민지와 독재로 얼룩진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얻을 수 있을까?’ 화해와 치유의 종교인 기독교가 그 해답이라고 생각한 그는 우간다 온 국민이 함께하는 신년맞이 예배행사인 ‘패스오버 페스티벌Passover Festival’을 기획했다.

 

2018년 12월 31일, 우간다 송구영신 축제인 ‘패스오버 페스티벌’이 10만 명의 관중이 자리한 가운데 만델라 국립스타디움에서 열렸다. 해마다 개최되는 이 행사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며, 온 국민이 단합하는 의미를 가진다.
2018년 12월 31일, 우간다 송구영신 축제인 ‘패스오버 페스티벌’이 10만 명의 관중이 자리한 가운데 만델라 국립스타디움에서 열렸다. 해마다 개최되는 이 행사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며, 온 국민이 단합하는 의미를 가진다.

패스오버 페스티벌은 어떤 행사입니까?
우간다는 7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 아래 있다가 1962년 독립했습니다. 2002년은 우간다 독립 4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국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어두운 과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던 중 ‘우리는 이제 그 어두운 과거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나아가 신앙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하나되어 더 나은 나라를 심자는 비전을 심어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매년 12월 31일에 한 해를 마무리짓고 새 비전과 함께 신년을 맞는 패스오버 페스티벌을 하기로 했습니다.
첫 행사에는 2만 5천 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해마다 수가 늘어 지금은 매년 10만 명 이상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각 부족의 족장을 비롯해 국회의장, 전·현직 총리와 장관 등 정부 요인 등이 참석하고 대통령께서 축사를 보내는 등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올해 패스오버 페스티벌이 여느 해와 달랐던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난 12월 31일 열린 페스티벌에는 한국 기쁜소식선교회의 박옥수 목사님을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박 목사님을 초빙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우간다 국민들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권 목회자들의 설교에 익숙합니다. 유럽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설교는 대개 물질이나 번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거룩함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 등 정신적인 측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박 목사님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젊은이들을 위해 일해 오시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일꾼으로 길러내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마음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남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라시아스합창단도 함께 왔는데, 우간다 국가와 우간다어로 된 노래 여러 곡을 불러 관중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이번 페스티벌이 우간다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십니까?
국민들의 마음에 페스티벌은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씨를 심은 뒤에는 열매가 맺힌다는 소망을 갖고 물도 뿌리고 가꾸다 보면 열매가 맺히잖아요? 아직 그 변화의 열매를 거두기에는 이르다고 봅니다. 다만 앞으로도 한국에서 더 많은 목회자와 교사들이 와서 우간다 청소년들을 가르쳐 준다면 곧 열매가 맺히리라 생각합니다.


세루와다 목사는 현재 우간다 BAF(Born Again Faith, 거듭남의 믿음)목회자연합회의 총회장을 6년째 맡고 있다. 오순절 및 복음주의 교단 목회자들의 연합인 BAF에는 현재 4만 3천 개의 교회가 속해 있다. 또한 가톨릭·성공회·무슬림·안식일교·정교회·개신교 등 여섯 개 종교의 지도자 일곱 명으로 구성된 우간다 초종교협의회 위원으로서 대통령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오늘도 전도집회, 세미나, 성경공부, 교회 개척, 선교사 파송 등 인종과 국경을 넘나들며 일하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다른 것이 하나되어 함께 변화를 만들어간다Unity in Diversity, Together to Make a Difference’는 BAF의 모토가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교회들은 이리저리 분열되어 있습니다. 교파마다 신학적 견해도 다르고 전통도 다릅니다. 그리고 저마다 추구하는 길이나 신앙의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하려면 모든 교단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물론 ‘다른 것이 하나된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인종이나 국적이 달라도 같은 마음으로,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일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우리 몸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지요.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 그리고 독자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재정이 마련된다면 대학을 하나 세워 청소년들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꾼으로 키우고 싶군요. 우간다는 가난, 질병, 정보 부족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교육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투머로우> 독자 여러분도 우간다에 와 주신다면 기꺼이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교육 봉사나 문화 교류 등 여러분이 할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을 우간다에서 만나 뵙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국적이나 교파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의 목회자들과 과감하게 교류하는 인상깊은 모습을 남겼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국적이나 교파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의 목회자들과 과감하게 교류하는 인상깊은 모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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