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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민족 마을에서의 행복 여정
이경희 | 승인 2019.03.19 11:54

화장실이 없으면 어떻고, 수돗물이 안 나오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수도 하노이의 고급 아파트에서 누리고 사는 도시인보다도, 산 속 마을의 그들이 훨씬 행복해 보였다. 소수 민족 사람들에게 뭔가 주려고 갔다가 되레 받고 돌아온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경희.
전통복을 입고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필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베트남에 온 것이고,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은 일은 베트남어를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믿는다. J&B 유한회사 대표이며, 국제청소년연합 베트남 하노이 고문으로 있다. 베트남 한국교민들로 구성된 민간봉사단체 G&P 대표로서, 소수 민족 마을에 한국 전통 구들장 기술을 전수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사진 이경희)

2008년 12월 17일, 나는 베트남 땅을 처음 밟았다. 그 당시 베트남의 경제수준은 높지 않았고, 교통수단은 대부분 오토바이였다. 수도 하노이에서도 자동차 숫자는 손으로 꼽아야 할 만큼 흔하지 않았다. 낯설고 적응이 어려운 것 중엔 날씨도 한몫을 했다. 이 나라는 1월에서 3월까지 습도가 높아서, 마치 분무기로 바닥에 물을 뿌려 놓은 듯했고 옷장이나 집안 곳곳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혼잡한 거리의 소음과 귀가 따가울 정도로 눌러대는 오토바이 경적소리, 매캐한 먼지로 인해 제대로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한국처럼 깨끗하게 진열된 슈퍼마켓이 아닌, 도심 속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은 비위가 약하고 냄새에 매우 예민한 나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처한 것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의 얼굴은 나와 다르게 밝고 순수했다.

한번은 택시를 합승했다. 나는 뒷자리에 혼자 앉았고, 운전기사와 그 옆에 앉은 손님은 마치 친구처럼 가족 안부까지 서로 물어 가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이 먼저 내린 뒤 내가 질문을 했다. 혹시 아는 사이냐고? 오늘 처음 만났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런 문화가 나에게는 무척 낯설고 적응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할 때의 얼굴 표정이 친근한 이웃을 대하거나 가족을 대할 때와 동일하다. 누굴 대하든 ‘정情이 넘치게’ 사람을 대한다. 베트남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에게도 항상 따뜻한 미소로 말을 걸어주고 반겨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지 모를 따뜻한 정과 인간미를 느꼈다. 그런 베트남 사람들과 나는 마음의 소통을 하고 싶어서 베트남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지금처럼 한-베 관계가 활발하지 않았던 10여 년 전, 하노이에는 베트남어 전문 학원도, 마땅한 교재도 없었다. 난생 처음 접해 본 6성조의 베트남어. 한 단어를 올리고, 내리고, 꼬고, 끊고 하는 것에 따라 뜻이 완전히 바뀌는데, 내가 무슨 음을 내고 있는지 당최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39세. 백 번 들어야 한 단어 외울까 말까한데 6성조의 베트남어를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로 공부한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더군

다나 독학은 내 인생 최초의 시도였던 것 같다. 아침에 눈 떠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나는 일 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지독하게 언어를 공부했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갈 때, 화장실을 갈 때, 여행을 갈 때, 시장을 갈 때도 10센티미터 두께에, 1킬로그램이 넘는 커다란 사전은 항상 내 손에 들려져 있었다. 3년가량 그렇게 손에 사전을 들고 다녔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의 앱이 있었다면 고생 좀 덜하고 공부했을 텐데…. 한편으론 아쉽지만, ‘그때 고생하며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들려줄 추억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 또한 행복했던 시간으로 느낀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공부하게 만들었을까?

주식은 쌀이고, 반찬은 고추를 다져 넣은 느억 맘Nước Mắm이라는 젓갈에 삶은 채소를 찍어먹고, 채소 삶은 물로 국을 대신한다.(사진 왼쪽) 조그만 구덩이를 파고 ‘끼엥 Kiềng’이라는 삼발이를 놓은 뒤, 냄비를 위에 놓고 불을 피워 요리를 한다. 추운 겨울에는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따뜻하게 몸을 녹여주는 화로가 되기도 한다. 아침에 가족들이 일어나자마자 모여드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그들과 소통하면 할수록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지만 베트남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베트남인의 정서와 한국인의 정서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들은 한국 사람처럼 강인하고 정이 많은 민족이다.

나 어릴 적 1980년대에 살던 고향은 경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온 동네가 가족처럼 정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았는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베트남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래서 요즘은 마치 어른이 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흘러 베트남어로 간단한 문장 구사가 가능해질 무렵, 나는 주변의 한국인들에게 베트남어를 무료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내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받았던 그 행복, 사랑, 기쁨을 그들도 경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한때는,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게 인생의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행복은 인간과 인간의 마음이 서로 교류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훗날 알았다. 학창시절에 배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떠듬떠듬 한없이 느린 나의 베트남어에 답답해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기다려주는 그들의 눈빛에서, ‘빨리빨리’만 외치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죄이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나는 지금도 이들에게서 배려와 겸손을 배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왜?’라는 단어를 많이 썼는데, 베트남에서는 ‘예Vâng’라는 단어와 ‘감사합니다Cảm ơn’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그들의 겸손한 마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고 싶게끔 한다.

나눠 주고 싶어서 시작한 봉사활동

베트남은 54개의 다민족 국가로 전체 인구 약 9,550만 명 중 87%가 낑Kinh 족, 그 외 13%는 53개의 소수 민족이 차지하고 있다. 소수 민족은 주로 산 속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산다. 자급자족으로 평온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도시의 복잡한 경쟁사회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학교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베트남 정부는 소수 민족에게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보장해주고 있지만, 그것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이들 세계에선 다반사이다.

한번은 신문에서, 소수 민족의 신생아 사망률이 25%에 이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열악한 의료 환경과 비위생적인 의식주도 문제가 될 것으로 보였다. 이들을 위한 외부의 후원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베트남 정부에서 소수 민족에게 의료비를 지원해 주는데도, 현대 의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아주 가벼운 질병도 손 쓸 수 있는 시간을 놓쳐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곳에서 사업을 하면서, 틈틈이 소수 민족 사회봉사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에는 하노이에서 340킬로미터 떨어진 라이쩌우Lai Châu 성省으로 봉사를 다녀왔다. 승용차로 8시간을 달려 도시에 도착한 뒤 다시 낭떠러지 길을 따라 1시간 30분 더 가야 하는 산 속 마을이었다. 중국 국경과 아주 가까운 곳으로 겨울에는 영하 4도까지 내려가고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국 전통의 구들장 기술을 전수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외에 축구교실, 음악교실 등 여러 가지 민간 봉사활동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곳은 높은 산악지대여서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에 1년 1모작을 한다. 모든 게 자급자족이다. 이들의 유일한 수입원은 구름이 걸리는 고산 산악지대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타오 꽈Thảo Quả’ 라는 향신료 열매이다.

손님을 위해 세 시간을 달려가서 사온 콜라

우리 봉사단이 도착한 다음 날, 귀한 손님 대접한다며 온 마을이 들썩거렸다. 남자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산양 한 마리를 잡았고, 여자들이 그 자리에서 조리해 그날 아침에 우리는 산양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귀한 손님을 위해 왕복 3시간을 달려가 산 아래 마을에서 사온 캔 콜라가 놓여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허몽 족은 남존여비사상이 좀 있어서, 귀한 손님이 왔을때는 여성과 아이들보다 남성이 우선적으로 식탁에 앉았다. 연신 콜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 일행은 식사하면서 콜라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일어났다. 잠시 뒤, 우리가 준 사탕과 밥상 위의 캔 콜라를 손에 든 아이들의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오후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인드 레크리에이션을 하자고 했다. 모두들 너무 기뻐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온다며 집으로 갔다. 나도 방에 가서 레크리에이션하기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모두 전통의상을 제대로 차려입고 온 것이었다.

그들의 마음에 그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던 것이다. 전통의상을 입고 어떻게 게임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기에 한껏 들떠 있는 그들의 표정에서 불편한 옷에 대한 걱정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전통의상 차림으로 2인3각 게임을

의류는 대부분 후원물품에 의존한다. 경제적 여유가 약간 있는 집에서는 직접 실로 짜고 수를 놓아 특별한 날에 전통의상을 입는다. 여러 가지 화려한 색실과 장식이 많아 평상복으로는 불편하다.

그들이 나에게도 전통의상 한 벌을 내밀었다. 나까지 모두 전통의상으로 갈아입고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레크리에이션을 할 곳이 없었다. 산 속에 운동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나의 속마음을 알아챘는지 그들은 아주 넓은 곳이 있으니 걱정 말라며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5분쯤 가니, 계단식 논이 눈앞에 보였고 거길 내려가니 추수를 끝낸 넓은 논이 나왔다. 그곳이 운동장이란다. 부부팀과 자녀팀으로 나눠 2인3각 게임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시시해 보일 이 놀이에 온 마음을 쏟아 몰두하고, 게임 내내 즐거워하던 그들의 모습에서 나까지도 너무 행복했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방법은 대단히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마음으로 그들에게 속해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나뿐 아니라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어떤 형식도 규제도 갖추지 않고,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누리고 살아가는 소수 민족 사람들이 진정 행복해 보였다. 화장실이 없으면 어떻고, 수돗물 없는 흙바닥 부엌에서 삶은 채소와 젓갈 반찬으로 한 끼를 해결한들 무슨 문제가 될까? 부유한 나라 한국에서 와서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고급 아파트에서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사는 나보다도, 산 속 마을의 그들이 훨씬 행복해 보였다. 그들에게 뭔가 주려고 갔는데 되레 내가 그들에게 받고 돌아왔다. ‘GIVERS GAIN!’ 주는 자가 얻는 법. 내 것을 쥐고 있지 말고 주는 자가 되면 내가 무엇을 얻는지 알 것이다.

겉모습에 눈 감고,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

플라스틱 슬리퍼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남녀노소가 사계절 내내 전천후로 신고 다니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한화 500원 정도인데, 이조차 살 돈이 없어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도착 첫날 아이들과 발을 둥글게 모아 사진을 찍었는데, 다음 날엔 나도 운동화를 벗고 같이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맨위 사진).

내년이면 내 나이 오십이다. 어느 책에서 ‘사랑한다면 눈을 감아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외형을 논하지 말고 마음으로 느끼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도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내 눈에 보이는 불편한 상황들에 대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한없이 순수하고, 정이 넘치는 그들의 따뜻함에 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지금, 그들이 너무 고맙다. 베트남에 와서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행복’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 있게 말한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베트남 사람들 덕분에”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아직도 많다. 그 말은, 내가 앞으로 그들에게 받을 행복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경희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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