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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생각하며 걷는 배우, 하정우
구지원 | 승인 2019.02.09 22:24

우리 집 앞에 걸으면 10분 거리, 차로는 2분 거리에 이마트 에브리데이가 있다. 고작 8분차이인데, 나는 그게 싫어서 차를 몰고 이마트 에브리데이에 간다. 더 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핸드폰을 바꿨다. 말만 하면 음악도 틀어주고, 문자메시지도 보내주고, 검색도 대신 해 준다. 이제는 손가락조차 쓸 필요가 없다. 이전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나도 모르게 손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에 젖어가고 있을 무렵,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신기하게 걷고 싶어졌다.

책을 읽다 보니, 스윽 웃음이 나온다. 하정우가 걷게 된 계기가 얼떨결에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2011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장. 남자 최우수 연기상 발표 무대에서 만약 상을 받게 되면 트로피를 들고 국토대장정에 오르겠다고 대국민 공약을 해버린 거다. 말 한마디로 졸지에 천릿길을 걷게 된 셈이다. 아니 약 392킬로미터인 천릿길보다 훨씬 더 먼, 서울에서 해남까지 577킬로미터의 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걷기로 대장정을 마친 하정우는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약간 허무하기까지 했다고…하지만 길 위에서 쌓인 순간들은 그의 몸과 마음 곳곳에 달라붙어서, 그를 훨씬 건강하고 밝게 바꿔준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나는 하정우를 스크린이나 티비를 통해서 봤다. 그리고 책을 펼치기 전엔, 내 마음대로 연예인이란 직업을 가진 하정우의 생활을 상상했다(사실 그는 자신을 배우이자 영화감독이자 영화제작자. 그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자 걷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왠지 고가의 수입차를 타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고, 바쁜 스케줄 때문에 음식은 주로 배달음식으로 때울 것 같았고, 생활이 불규칙적일 것 같았다.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살지만, 속으로는 약간 허기진 상태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왜? 연예인이니까^^

그런데 책을 통해 만난 하정우의 삶은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하정우는 바퀴달린 것에 의지하기보다는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강남에서 마포까지도 걷는다. 편도 1만 6천보다. 일상에서 살뜰하게 걸음수를 모아서 매일 3만보씩 걷는다. 그리고 손수 한 끼 한 끼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야무지게 잘 먹는다. 해외여행에 갔을 때는 한식 조리의 필수 식재료인 대파를 직접 길러서 먹을 정도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도 꾸준히 읽는다. 또,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한다. 책을 읽어보니 하정우는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는 대신, 속이 꽉 찬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감정’에 휘둘리는 걸 거부한다. 가장 단순하고 정직한 방법. 걷는 것으로 말이다.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순간의 기분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기분에 짓눌려서 문제를 키우고 고민을 부풀린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제일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기분’이란 것에 대한 하정우 나름대로의 통찰인데, 기분에 대해 진지한 사고思考를 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결론은? 기분 따위에 나를 내어주지 말자!

그저 생각이 밀려오는 대로 끌려가기 십상인데, 잠시 그 생각을 멈춰보려는 마음.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의 정체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 삶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과 내 기분쯤은 무시할 수 있는 사람. 그 삶의 결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생각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 또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은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는 걸 꿈꿀 때가 많고, 그걸 푹 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정우의 표현에 의하면 그건 피로를 방 안 한구석에 던져 놓았다가 다시 끌어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건 휴식이 아니고 방기放棄라고 한다. 역시 걷는 사람이라 그런지 휴식도 걷는 것에 비유해서 쓴 부분이 있는데, 장거리를 걸을 때 걷는 시간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때가 바로 ‘쉬는 시간’이란다. 지쳤다고 숨만 몰아쉴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동화 속의 두 발의 상태를 잘 확인해야 한다고.

한참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하루키는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좋은 삶이 필요했고, 그래서 달리면서 아주 절제되고 정리된 삶을 산다고 했다. 하정우 역시, 좋은 작품이란 좋은 삶에서 나온다고 단언한다.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대신, 하정우는 매일 아침 일어나 아침밥을 잘 챙겨먹고 걷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스스로 정해놓은 루틴에 충실한다. 어쩌면 운동선수처럼 보이는 일상인데, 꾸준히 한 걸음씩 뚜벅뚜벅 삶을 걸어가는 인간 하정우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책에 보면,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있다. 흥행보증수표라 불리는 인기 배우가 어떻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하정우란 사람의 사고思考와 마음가짐이 크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걷는 사람, 하정우’보다 ‘생각하며 사는 사람, 하정우’로 느껴질 정도였다.

바퀴를 의지하여 이동하는 것과 비교하면 내 두 발로 걷는 것은 참 불편하고 느린 방법이다. 하지만 윌리엄 파워스가 쓴 <속도에서 깊이로> 책 제목처럼 걷는 일은 어쩌면, 속도만 가득한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스마트하지만 항상 초조하고 분주한 일상에 걷기는, 잘 생각할 수 있게 해주고, 맛있게 먹게 해 주고, 달게 잘 수 있게 해준다. 주옥같은 명곡들이 모차르트가 산책하는 동안 떠오른 악상에서 비롯된 것이고,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루소는 걷는 동안 아이디어가 샘솟았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니 왠지 나도 자꾸 걸어보고 싶어졌다. 걷는 동안 복잡한 감정이 정리되는 것도 느껴보고 싶다. 하이힐을 신고 자동차를 타는 대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싱싱하게 걷고 싶어진다.

 

구지원 책읽기와 일상에서 지혜 찾기를 즐기는 블로거 구지원 씨가 신간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은 후 ‘휴식과 여유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하며 이 글을 기고해 주었다.

구지원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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