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가족을 향한 불만을 가득 품고 보낸 외롭고 우울한 학창시절….‘나는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순수한 미얀마 사람들은 나의 잘못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가족에게 마음을 열게 해주었다.

왼쪽부터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된 아가소, 포난다, 까웅까웅. 함께 꾸도러 피야사원에 갔을 때. 얼굴에 미얀마 천연 선크림인 딴나카를 발랐다.(사진 박현성)
왼쪽부터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된 아가소, 포난다, 까웅까웅. 함께 꾸도러 피야사원에 갔을 때. 얼굴에 미얀마 천연 선크림인 딴나카를 발랐다.(사진 박현성)

가족1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이렇게 네 명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가족끼리 밥을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고 누나는 기숙사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가족들 간에 대화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나는 혼자 밥을 챙겨 먹고 혼자 잠이 들었다.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나를 반기는 건 현관 신발장 앞의 흐릿한 불빛이었다. 그런 나에게 가족이란 그저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부모님께 외롭다는 표현을 해보았지만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면서 어리광을 부린다고 오히려 꾸중을 하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바쁘셔서 거의 뵐 수가 없었고, 그나마 어머니가 조금 일찍 들어오시면 함께 자고 싶어서 곁에 가곤 했는데 어머니가 피곤하셔서인지 귀찮아하셨다. 그러면 어린 마음에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나처럼 불행한 아이가 또 있을까? 가족이 있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야’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슬펐다. 어떻게든 가족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내 몸에서 담배 냄새, 술 냄새가 나도 그냥 그대로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내가 방황하고 있으며 외롭다는 걸 알리기란 쉽지 않았다.

생각의 시작

대학에 들어가서 해외봉사활동에 참여해보고 싶어 굿뉴스코 봉사단에 지원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미얀마라는 나라로 1년간의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 이왕 봉사할 거면 가난하고 생소한 나라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미얀마에서는 예닐곱 살 되는 아이들이 차도에서 차를 무서워하지 않고 다니며 운전자들에게 물과 과자를 파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아주 어린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데 무척 이상하고 신기해 보였다. 한번은 소년원을 방문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무슨 죄를 짓고 이곳에 들어왔지?’ 몹시 궁금했는데,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 돌봐주는 사람 없이 자라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갈 곳이 없어 소년원에 들어온 거라고 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이어서인지 내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커져갔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댄스를 준비해 선보였는데,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진심 어린 환호를 보내주었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미소가 뿜어져 나왔다. 진짜 행복해서 웃는 웃음을 나는 미얀마 아이들 앞에서 처음 웃어보았다. 해외봉사단의 모토는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이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미얀마 사람들이 느끼는 작은 행복들이 차츰 나의 행복이 되어 갔다.

# Letter from Friend

나는 한국 사람을 좋아하는데 네가 나와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네가 1월 3일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슬펐어. 미얀마에서 너와 같이 봉사단 활동도 알리러 다니고, 행사에서 댄스도 하고, 밥도 먹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같이 이겨 나가고, 빵 한 조각도 나누어 먹었잖아. 이런 소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모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는데, 네가 간다니 눈물이 날 뻔했다. 현성아, 너무 즐거웠고 헤어지더라도 연락하면서 영원한 친구로 지내자. 아가소가 현성에게~

쉐산도 사원에서. 미얀마 사람들은 사원에서 종을 치는 것으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사진 박현성)
쉐산도 사원에서. 미얀마 사람들은 사원에서 종을 치는 것으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사진 박현성)

타고난 적응력

‘미치나’라는 도시에 갔을 때 이름이 ‘생크림’인 현지인과 시장에 간 적이 있다. 생크림의 바지를 사기 위해 어느 옷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미얀마 종족언어인 까친 말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까친 종족인지 알았던 것이다. 생크림이 아주머니에게 이 학생은 미얀마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라고 설명하자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10초 정도 나를 쳐다보더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 한국말 테스트를 한 후에 ‘정말 한국 사람 맞네’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를 보는 아주머니의 눈빛이 달라졌고 반가워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나는 한국인 같지 않고 미얀마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입만 열지 않으면 현지인들과 구분이 안 되었고, 그래서인지 적응하기가 더욱 쉬웠다.

바퀴벌레 교훈

양곤에서 지내다가 처음으로 ‘따웅우’라는 지방 도시를 방문했는데, 그곳은 아주 덥고 전기가 자주 끊기는 열악한 지역이었다. 나무로 만든 화장실에는 등이 없어서 랜턴을 들고 다녀야 했다. 볼 일을 보고 있으면 다리 위로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들이 기어 올라오고, 눈을 돌리면 어디서든 개구리와 도마뱀을 볼 수 있었다. 자주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현성아, 한국에서 이런 경험 해본 적 있어?’ 한국에서 지내온 시간들은 정말 편안하고 감사한 것들뿐이었는데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코끼리 체험

따웅우에 사는 친구들이 나에게 코끼리를 태워주고 싶어 했다. 코끼리를 탈 수 있는 곳이 꽤 먼 거리에 있었는데, 꼭 타봐야 한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가자고 하기에 고마워서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탄 채 무려 세 시간이나 달렸다. 허리가 얼마나 아프던지 도착해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픈것보다 고마움이 훨씬 컸다.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먼 거리를 달려준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최고로 행복한 코끼리 체험’을 하고 양곤으로 돌아왔다.

내이름 케이크

미얀마에서는 한류 열풍이라는 걸 피부로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한국말로 인사하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별볼일없는 사람임에도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을 받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는데, 순수하고 겸손한 미얀마 사람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미얀마 음식은 맵고 짠 종류가 많아 배탈이 날 때가 있었다. 현지인들이 그런 나의 사정을 알고 음식을 매번 따로 준비해주었고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갈 때면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했다. 또 사진도 자주 찍어주고 내 안색이 안 좋거나 하면 먼저 다가와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서 관심을 가져주었다. 내 생일날도 잊을 수 없다. 미얀마에서는 생일이 되면 생일을 맞은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케이크도 사와서 같이 나눠먹는데, 내 생일이라고 특별히 케이크와 선물을 그들이 모두 준비해주었다. 해외에서 내 이름이 예쁘게 쓰인 생일케이크를 선물 받는 기분이란! 고심하며 케이크를 고르고, 그 케이크를 내 이름으로 장식했을 과정을 떠올리니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 Letter from Friend

현성아, 내가 누군지 알아? 네가 말했듯이 미얀마 댄스팀에서 제일 잘생긴 포난다 형이야. 1년동안 우리 함께한 게 정말 많았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지만 한 가족처럼 지내면서 속마음까지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게 좋았어. 우리 댄스팀 멤버들이 너를 너무 좋아해서 네 별명을 하나 지었단다. 다름 아닌 망고! 네가 망고하고 너무 닮았기 때문이지. 한국에 돌아가면 망고가 열리는 미얀마가 그리워질거야. 힘들 때도 많았을 텐데, 네 마음을 다 이해해주지는 못했어. 지난 시간들 마음속에 간직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가자. 미얀마 친구 포난다 보냄^^

넓이 비교

까웅까웅과 딴나카를 바르고 있다. 나무를 돌판에 비벼서 나오는 가루를 물에 섞어 바르면 천연 메이크업 완성! (사진 박현성)
까웅까웅과 딴나카를 바르고 있다. 나무를 돌판에 비벼서 나오는 가루를 물에 섞어 바르면 천연 메이크업 완성! (사진 박현성)

미얀마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농담을 하는 스타일은 다른 것 같다. 내가 재미있으라고 한 말에 현지인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기분이 나빠할 때도 있었고 그들이 하는 농담에 내가 화를 낼 때도 있었다. 한번은 현지인 친구와 다툰 적이 있다. 친구는 한국 드라마에서 비아냥거리는 식의 한국말 표현을 많이 배워서 듣기 안 좋은 말을 계속했다. ‘의미를 잘 모르고 나를 즐겁게 해주려 하는 말이겠지’ 생각해도 계속 들으니 화가 나서 결국 싸움으로 이어졌는데, 그 일을 계기로 친구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한국말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줄 수 있었다. 나는 싸우면 말을 하지 않고 어색한 상태로 오래 지내는 편인데 친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나를 대하고 말을 걸어주었다. 한국이 모든 부분에서 미얀마보다 발전한 나라이지만 마음의 넓이는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들 속에서 내 마음도 넓어져갔다.

# Letter from Friend

친구, 너와 함께 지낸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져.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00살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정말 많이 생겼다. 미얀마 센터에 일이 많아서 자주 피곤하고 또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힘들 때가 많았지? 한번씩 네 표정이 안 좋을 때가 있었어. 가난하고 환경이 열악한 이곳에 와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너한테 해준 것보다 네가 우리에게 해준 게 훨씬 많은 것 같아. 너 때문에 행복했고 감사한 마음도 배울 수 있었어. 현성아, 우리 미얀마 친구들을 언제까지나 잊지 마.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베프 까웅까웅이~

가족2

가족을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슬프게 지내왔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굳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내가 기대하는 식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던 것이다. 미얀마에서 지내다 보니 우리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졌다. 소년원의 아이들은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가르쳐주었고, 그렇게 바쁘게 고생하며 사시는 부모님을 향해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내가 건강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었던 이유, 미얀마에 올 수 있었던 이유…. 이 모든 것들의 해답이 부모님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한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가족이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었는데 보이지 않는 내 생각을 허물고 이야기하면 되었다. 부모님과는 대화가 안 된다는 것도 내가 쌓아놓은 벽일 뿐이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마음을 표현하면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미얀마에서 1년간의 삶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는지 알게 했고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내 마음까지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삐 도시에서 어느 현지인의 밭에 들러 야채를 수확해서 가져가는 모습. 미얀마 사람들은 세계에서 최고로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다. (사진 박현성)
삐 도시에서 어느 현지인의 밭에 들러 야채를 수확해서 가져가는 모습. 미얀마 사람들은 세계에서 최고로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다. (사진 박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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