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다 이슬람 Abida Islam

지난 12월은 ‘아비다 이슬람’ 주한 방글라데시 대사에게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한 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한 대사로 부임한 지 일 년이 지났고, 조국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지 마흔일곱 해를 맞았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대사관을 찾은 날은 마침 방글라데시 독립기념일인 12월 16일 바로 다음 날이었다.

아비다 이슬람. 방글라데시 다카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호주 모나시대학교에서 국제관계 및 무역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브라질, 벨기에 등에서 근무했으며 인도 콜카타의 방글라데시 부副 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수석외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밖에 다수의 국제 학회와 세미나, 외교회담 등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로 활동한 바 있다. (사진 박종도 객원기자)
아비다 이슬람. 방글라데시 다카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호주 모나시대학교에서 국제관계 및 무역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브라질, 벨기에 등에서 근무했으며 인도 콜카타의 방글라데시 부副 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수석외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밖에 다수의 국제 학회와 세미나, 외교회담 등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로 활동한 바 있다. (사진 박종도 객원기자)

대사님 부임 1주년이 되었네요. 한국에서 첫 해를 보내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12월 20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는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네요. 부임하기 전부터 ‘한국이 지난 30년 동안 어떻게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직접 와서 지내보니 한국인들은 시간을 지키는 데 철저하고 교육수준도 아주 높던데, 그것이 발전의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아시아권에 속해 있어서인지 가족을 우선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는 방글라데시와도 많이 비슷하더군요.

사실 한국인들 중에는 ‘방글라데시’ 하면 낯설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네, 그래서 두 나라 사이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제가 여기 온 것 아니겠어요(웃음). 방글라데시는 예를 들어 인접국인 인도와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교류하고 있지만, 한국과는 경제 분야 외에는 별다른 교류가 없지요.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Dhaka와 인천 간에 항공기 직항노선을 개설하는 게 목표입니다. 직항노선이 개설되려면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항공사의 이익입니다. 왕래하는 사람이 매주 900명은 되어야 하는데, 현재 250~300명 정도가 부족한 형편입니다. 항공사측을 상대로 ‘일단 노선이 개설되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늘어날 것’이라고 설득하는 중입니다.

방글라데시는 과거에 인도, 파키스탄과 함께 영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요.

1953년, 다카대학교의 여학생들이 파키스탄 정부의 방라어 사용금지 조치에 반대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 Biswarup Ganguly)
1953년, 다카대학교의 여학생들이 파키스탄 정부의 방라어 사용금지 조치에 반대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 Biswarup Ganguly)

네, 인도는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힌두교를 믿던 지역은 지금의 인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은 파키스탄으로 분리해서 독립했습니다. 파키스탄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둘 사이의 거리는 2,204킬로미터나 되어서 비행기를 타도 몇 시간은 걸릴 정도로 멀었지요. 종교가 이슬람교라는 점을 빼고는 문화나 언어 등이 서로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쥔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을 차별하고 무시했습니다. 공무원 등 요직에는 서파키스탄 사람들만 기용하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당시 파키스탄의 주요산업은 농업이었고, 주요 수출품은 금이었는데요. 서파키스탄 사람들은 동파키스탄 사람들이 키운 농작물을 빼앗아가고 금을 수출해 번 돈을 강탈하는 등 경제수탈을 자행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다 1952년에 사건이 터집니다. 서파키스탄에서는 우르두어語를, 동파키스탄에서는 벵골어語(방라어)를 썼는데요. 1950년부터 파키스탄 정부는 서파키스탄의 언어인 우르두어만을 공식언어로 인정한 겁니다. 방라어는 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제외되었고, 방라어로 문학작품을 쓰는 것도 금지되었지요.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이 방라어를 쓰는 상황에서 두 언어를 함께 공식언어로 지정한다면 모를까, 우르두어만을 공식언어로 지정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카대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크게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952년 2월 21일의 일인데, 공식적으로는 네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도 방송사도 없던 시절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요. 파키스탄 정부는 끝내 거센 시위 앞에 굴복하고 방라어도 공식언어에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사진 박종도 객원기자)
(사진 박종도 객원기자)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그 언어를 쓰는 나라나 민족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이다. 그런 자신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국민들! 우리네 일제강점기 역사와도 묘하게 겹치는 대목이다. 방글라데시 국민들 역시 그런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 현재 2월 21일은 방글라데시에서도 독립기념일과 함께 가장 큰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다. 또 유네스코에서도 1999년부터 이날을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해 포럼과 세미나 등 관련행사를 열고 있다.

방글라데시가 결국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것도 이런 언어수호운동이 계기가 되었지요?

‘독립항쟁’을 주제로 한, 방글라데시 독립기념관의 테라코타상. (사진 Biswarup Ganguly)
‘독립항쟁’을 주제로 한, 방글라데시 독립기념관의 테라코타상. (사진 Biswarup Ganguly)

네,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이란 정당을 결성해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했고, 1970년 치른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의석 중 과반수를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와 지도자들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지요. 결국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였던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듬해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했고, 파키스탄군이 무지부르 라흐만을 체포하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란 벵골 지역을 가리키는 벵골어인 ‘방라’와 나라를 가리키는 벵골어인 ‘데시’가 합쳐져 생긴 국호입니다.

1971년 3월부터 9개월간 치러진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은 약 300만 명의 방글라데시인을 학살했습니다. 또 20만 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지요.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하나가 되어 싸웠고, 그 과정에서 1천만 명이나 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인도로 피난을 가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인도군도 전쟁에 참전하면서 1971년 12월 16일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날이 바로 방글라데시의 독립기념일이죠.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지도 47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11월 8일에는 부산의 경성대학교에서 재학생과 교직원 등 500여 명 앞에서 ‘방글라데시의 역사와 발전’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셨는데요.

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방글라데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우선 기후변화에 여로 모로 취약합니다. 언론이나 국제학회 등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를 언급할 때 가장 자주 거론되는 나라가 방글라데시입니다. 매년 홍수와 태풍으로 수천 명씩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식량은 자급이 가능해서 농사지은 쌀로 국민들이 모두 먹고, 남은 쌀은 수출하고 있으며 민물고기 등 수산자원도 풍부합니다. 하지만 거듭된 자연재해로 국민들의 주거공간이 부족하고 도로 등 사회기반 시설도 부족한 실정이지요. 그럼에도 방글라데시는 이런 지리적, 자연적 악조건을 딛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GDP 성장률은 7.8퍼센트입니다. 의류 수출에 있어서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 2위를 달리고 있죠.

최근 방글라데시 경제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면, 무엇입니까?

방글라데시는 매년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다. 수해지역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 (사진 Balaram Mahalder)
방글라데시는 매년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다. 수해지역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 (사진 Balaram Mahalder)

여성들의 경제활동 및 사회진출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여성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특히 의류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95퍼센트 이상이 여성입니다. 공무원이나 사업가들 중 여성의 비중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 국가들 가운데 여성이 축구나 크리켓을 하고, 등산을 하는 나라는 방글라데시 말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최근에는 직업으로 오토바이를 모는 여성들도 많습니다. 수도 다카는 교통시스템이 특이하고 차와 사람이 많아서 차보다는 오토바이를 타는 게 더 빠릅니다. 요즘은 전화해서 주소를 알려주면 오토바이를 보내 사람을 목적지까지 태워다주는 서비스가 등장했는데요. 그 오토바이 기사들 중 상당수가 여자입니다. 2010년 아이티에 대지진이 났을 때, 방글라데시는 평화 유지를 위해 110명의 경찰관 대대를 보냈는데 모두 여성들이었습니다.

아비다 대사로부터 방글라데시의 역사와 정치, 경제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낯설게만 느껴지던 방글라데시가 기자의 가슴에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올해로 외교관이 된 지 23년째라는 그녀는 공무원 출신 아버지와 기술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면서 직업여성이 될 꿈을 품었다. 하지만 외교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단다.

그동안 저희가 취재한 대사들 중에는 어려서부터 외교관의 꿈을 품고 착실히 준비를 했다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외교관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기만 한 직업은 아닙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이자 경제 허브인 다카의 모습.(사진 ASaber91)
방글라데시의 수도이자 경제 허브인 다카의 모습.(사진 ASaber91)

세상에 쉬운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경찰이나 군인 같은 직업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직업이지요. 일과 가정 사이에 균형을 잡기도 어렵고,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생도 만만치 않지요. 하지만 그런 직업일수록 보람이나 만족은 더 큽니다. 외교관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기도 하는 등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가 외교관일 거예요. 역사적으로도 왕이나 여왕은 사신을 보내서 자신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하게 하잖아요? 그런 역사를 추적해 들어가면 외교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죠.

외교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나 자질은 무엇일까요?

하하,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원하신다면 교과서를 찾아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여러 가지 역량이 필요하겠지만, 한 사람이 그런 역량을 모두 갖추기란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역량을 모두 갖추고 난 뒤에 외교관으로 일하기란 불가능할 거예요. 굳이 꼽으라면 매사에 뭔가를 파고드는 호기심을 갖길 바랍니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는 모든 사건이 얽히고설켜 있어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뭔가 이슈가 터지면, 그 다음에는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예측을 할 수 있죠. 물론 그런 예측이 100퍼센트 맞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관계는 워낙에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관여하니까요. 단순히 지식을 갖추는 것을 넘어, 그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통찰을 갖추어야 합니다. 외교관이라면 아주 주의 깊은 관찰자이자 분석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죠. 늘 공부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지요. 세상은 배운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투머로우>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지난 11월 6일, 부산 경성대에서 교직원과 재학생 5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현재 경성대에는 93명의 방글라데시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진제공 경성대학교)
지난 11월 6일, 부산 경성대에서 교직원과 재학생 50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현재 경성대에는 93명의 방글라데시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진제공 경성대학교)

저는 어려서부터 공무원이신 아버지를 따라 방글라데시 곳곳을 여행하면서 조국의 문화와 전통을 배웠는데, 덕분에 지금 조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옛날만큼 다른 나라를 여행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에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한 나라를 알고 싶다면 책이나 인터넷도 좋은 도구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 사람을 만나거나 직접 가 보는 거예요. 여러분은 아직 젊으니까 낯선 나라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면 새로운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거예요.

1남 1녀를 둔 아비다 이슬람 대사의 딸은 현재 20대의 대학생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20대 청년들의 사고나 생활방식을 접하거나 살필 기회가 많다고 한다. 그녀는 다음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런 이야기 하면 세대차 난다고 할지 모르지만, 요즘 청년들은 디지털 기기에 너무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힘을 믿습니다. 청년들이 기계보다는 사람과 더 많이 대화하고, 가상 세계에서 꿈꾸기보다 진짜 세상을 탐험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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