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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아시안패러게임 볼링 2관왕 오반석 "스트라이크 욕심을 버렸다"
전진영 기자 | 승인 2018.12.24 17:14

올해 마지막 표지를 장식한 오반석 선수. 한때 과잉행동장애ADHD로 가족을 힘들게 했던 그가 해외봉사를 다녀오고 볼링 선수가 됐다. 얼마 전에는 아시안패러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두 번이나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의 금빛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주>

 

쿠당탕탕탕….
스트라이크! 오반석 선수가 던진 공에 볼링 핀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넘어갔다. 기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수줍게 웃어보이던 그는 다시 한 번 신중히 자세를 잡고 공을 던졌다. 아, 이번엔 스트라이크가 아니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공의 방향이 바뀔 만큼 볼링은 멘탈 관리가 중요한 운동이다. 그런데 과잉행동장애라고 들었던 오반석 씨가 이렇게 진중하게 볼링볼을 던지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안녕하세요, 아시안패러게임 금메달리스트 오반석입니다. 금메달 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두 개나 따서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그 가운데에 제가 있으니까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그래도 겉으로는 덤덤한 표정으로 시상대 가장 위로 오르는 그를 보고, 그의 어머니 김지영 씨는 아들과 고생했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나 마음이 무척 떨리고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오 선수가 귀여운 막내 아들로 태어났었지만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집안의 모든 것을 던지고, 부수고 찢고 난장판을 만들어 놔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고. 피아노 모서리를 물어뜯고, 벽지나 침대 커버를 다 찢어 놓았다.
“병원에 갔더니 뇌파 이상으로 오는 과잉행동장애라고 했어요. 약을 먹기도 하고 놀이치료, 미술치료 등 여러 가지를 해봤는데 아이의 행동을 고칠 수는 없더라고요.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성 피부병과 불면증이 생겼고 누나들은 동생을 고아원에 보내자고 할 정도로 반석이의 행동장애는 심각했어요. 이렇게 고생했던 걸 반석이가 잘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엄마, 저도 알아요. 어렸을 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좋아했는데 차가운 밥이 나오면 바닥에 던져버리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우산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리려다 우산을 모두 부러뜨렸던 것이 기억나요.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몸이 움직였어요. 수업을 하면 항상 저는 밖에 나가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반 아이들이 저를 따돌리고 때리기도 했어요. 열두 살 때 제가 다른 애들보다 많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요.”

반석이는 온전해

오반석 단원은 영어 구사력이 떨어져도 현지인들과 가장 편하게 소통했다. 누구보다 순수하게 다가오는 그를 보고 모두들 좋아해줬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친구다. 그리고 궂은 일을 자청해 하며 누구에게든지 도움이 되고자 했다. 캠프를 할 때, 남들은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때,먼지를 뒤집어 쓰고 스태프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행복하게 일하는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박상민(인도에서 같이 봉사한 단원 사진 속 아랫줄 파란색 옷)

그러나 꼬마 반석이는 절망하지 않았다. 무척 힘들어하던 어머니가 위로를 받기 위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아들은 정상이다, 온전하다’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까지 찾아다녔던 병원에서는 한결같이 ‘장애는 평생 안고 가는 것이지, 병처럼 고칠 수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앞날이 절망스럽고 슬펐는데 교회에서 들었던 그 말 한마디가 큰 힘을 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반석아, 너는 온전해”라고 수시로 말해줬고, 꼬마 반석이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절망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고, 가끔 과감하게 오랜 기간 출장도 다녀왔다. 그러면 꼬마 반석이는 교회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렸고, 사고뭉치였던 그를 다독이고 훈계해주는 교회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차분해지고 말도 더욱 뚜렷해졌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운동에도 크게 나타났다. 넘쳐나는 에너지를 발산시키기 위해 다섯 살 때부터 수영, 발레, 검도, 합기도, 배구 등 여러 가지 운동을 해봤는데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스트라이크를 치는 것이 좋아 볼링을 시작했다. 볼링장에서 혼자서 연습하던 그를 눈여겨본 어느 코치의 제안으로 볼링부에 들어갔지만, 6개월 동안 그 좋아하던 스트라이크를 칠 수가 없었다. 볼링 스텝을 익히기 위해 계속 스텝만 밟는 연습만 반복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산만하고 막무가내였던 그가 이젠 네다섯 발자국 안에서 스텝만 밟고 또 밟으며 반복했다. 이 자세를 익혀야 스트라이크를 잘 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볼을 잡고 연습할 수 있게 됐을 때는 하루에 네다섯 시간씩 30게임을 치면서 연습했어요. 그리고 첫 시합을 나갔는데 레인도 어렵고 긴장을 많이 해서 입상하지 못했어요. 몸에 힘이 들어가면 스트라이크가 안 되더라고요. 평소 연습하던 대로 평온한 상태에서 볼을 던지면 스트라이크가 되지만 ‘나 꼭 이번엔 스트라이크 칠 거야’ 하면 금방 몸에 힘이 들어가고 핀이 남아버려요.”
볼링은 볼의 구멍에 들어가는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만으로 볼의 회전을 조절하고, 스텝을 내딛는 자세에서 볼의 방향과 파워가 결정될 정도로 예민한 스포츠이며 멘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스트라이크를 잘 치고 싶으면 오히려 스트라이크 치고 싶은 욕심을 마음에서 제거해내는 연습을 했다. 연습을 통해 볼링 실력을 키우는 한편, 자신의 마인드를 컨트롤하는 힘도 길러나갔다.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가자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어렵게 벌어서 볼링을 시켜주셨는데 이왕 하는 것 끝까지 잘해서 효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부모님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저 스스로 볼링으로 대학을 가거나 실업팀에 가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컸어요. 볼링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다른 것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때 ‘해외봉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유럽 같은 선진국으로 가고 싶었으나 먼저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봉사는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고 며칠 후, 그는 곧바로 인도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19년을 산 소년이 집을 떠나 인도에서도 가장 낙후된 오리사 주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음식 때문에 탈이 나서 고생하고, 회복하고 나서는 건축 봉사를 나갔다. 가난한 시골이라 집을 짓기 위한 첨단설비는 당연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에 큰 돌과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와 흙을 섞는 등 모든 것이 인간의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다. 한 명의 도움이 절실한 그곳에서,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솔선수범으로 봉사하는 오 선수를 보고 인도인들이 무척 기뻐했다.
“봉사단원 중에 제가 제일 어리고 부족한 것도 많았는데 인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정말 힘들어서 어디 도망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또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이렇게 힘든 일을 경험하다보면 마음이 강해진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끝까지 참고 일했는데 나중에는 일하는 게 즐거워지고 인도 사람들과 무척 가까워지더라고요.”
한국말도 서툰데 영어까지 하려니 의사소통도 힘들지 않을까 했지만 인도인들은 그의 이상한 콩글리시를 다 이해해줬다. 나중에 그는 오리사 주의 현지어인 오리야를 배워 조금씩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볼링 선수인 것을 알고는 사람들이 나무로 볼링핀을, 털실로 볼링볼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일 년의 봉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아프리카로 한 번 더 봉사를 가고 싶더라고요. 그 정도로 제가 했던 고생들이 제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놨어요. 그 경험이 볼링 게임을 할 때 엄청난 도움이 됐어요. 전에는 시합에만 나가면 너무 떨리고 긴장되다 보니 다한증이 심해져서 펜 하나도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인도에 다녀온 후부터는 땀이 덜 나고 심장도 더 이상 크게 뛰지 않아서 시합에 더 편하게 집중할 수가 있었어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로

봉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안양시 장애인체육회에 TPB4(지적장애) 부문 선수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볼링을 시작했다. 오 선수의 남다른 경험에서 나오는 집중력과 마인드 컨트롤은 경기 중 단연 돋보였고 이를 결과로 증명해냈다. 2년 후부터는 전국대회, 협회장배, 서울시장배, 광역시장배 등 많은 메이저급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 준우승을 따냈고 2016년엔 안양시 대표 선수, 2018년에는 드디어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한 달 간의 국가대표 합숙 후에 열린 말레이시아 월드투어에서는 당당히 개인전 은메달과 2인조 금메달을 따냈다. 게다가 합숙소에서 가장 막내였던 그는 자기 훈련을 마치고 나면 다른 시각장애인 선수들 볼을 닦아주고 휠체어에 탄 선수들을 밀어주는 등 무거운 짐도 들어주고, 자세도 가르쳐주는 등 팀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시상식 후 은메달을 딴 한국 선수(왼쪽)와 동메달을 딴 말레이시아 선수(오른쪽)와 함께. 김진홍 장애인 볼링 국가대표팀 감독은 "오 선수는 영리해서 레인 파악도 따로 지도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가능하다. 그리고 협동심이 좋아서 다른 선수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자주 봤다.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좋은 기량을 보여주어 무척 기특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조금만 더 기량을 쌓고 연습하면, 일반인 선수들과 겨루어 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난 10월 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2018 아시안패러게임이 열렸다. 이번 대회부터 지적장애 부문이 따로 생겨 개인전, 2인조 게임에 출전했는데 국제적으로 큰 행사라서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전 첫 번째, 두 번째 게임에서 말레이시아 선수에 49핀을 밀려 2위에 머물고 있었다.
“마음이 굉장히 떨리고 불안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금메달을 딸 수 없겠다는 생각에 게임이 더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속으로 반복해서 되뇌었습니다. ‘이건 내가 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반석이가 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 번째 게임에 나갔을 때 스트라이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스트라이크.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신중히 스텝을 밟고 볼을 던지면서 그는 어느새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이 경기에서 질 반석이냐, 금메달을 딸 반석이냐! 그의 점수는 말레이시아 선수 점수를 역전시켰고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마지막 게임에서 2위 한국인 선수와 56핀 차이로 우승했다. 다음 날 열린 2인조 경기에서도 월등한 점수 차이로 금메달을 따냈다. 볼링 지적장애부문 전 종목 석권이었다.

아시아 최고를 넘어 세계 최고를 향해

“나는 내가 원하는 완벽한 레이스를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스타트, 스트로크, 턴, 피니시의 모든 동작을 선명하고 아주 세밀하게 볼 수 있다. 최악의 상황까지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실제로 일어날 상황에 대비한다.”
오 선수와 같은 장애 판정을 받았던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의 ‘이미지 트레이닝’ 내용이다.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오감을 총동원해 상황을 상상하다 보면, 우리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해 마치 실제 훈련을 한 듯한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도 빙상 위에서 실제로 연기하는 상상으로 마음을 훈련했다고 한다. 오반석 선수 또한 자신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심리기술훈련 덕택이었다고 말한다.
“저를 지도해주셨던 코치님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특히 강조하셨어요. 잠들기 전에 상상비디오를 보면서 ‘어프로치에 다가가서 볼을 닦고, 호흡을 가다듬고 스텝을 밟으면서 정확한 자세로 볼을 던졌는데 스트라이크가 됐어. 그리고 모든 프레임에서 스트라이크를 치고 나는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세계최고 선수가 되는 거야’ 하고 상상하는데, 사실 정말 귀찮고 하기 싫을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큰 경기를 앞두고 아침, 저녁으로 상상하다 보니 제 마인드 컨트롤이 더 쉬워진 것 같았어요.”
이러한 심리기술훈련이 평소 삶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 김지영 씨는 자주 강연을 통해 과잉행동장애 아들이 어떻게 볼링 선수가 됐는지를 자주 들려준다. 그런데 이번에 자카르타에서 돌아왔을 때 한 강연 참석자가 “반석이 이야기는 이제 완결이 됐네요. 금메달을 땄잖아요!”라고 인사해왔다.
하지만 아직 완결이라고 할 수 없다. 오반석 선수는 이제 일반인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새로운 훈련을 시작하고 있다. 장애인 경기와 일반인 경기는 레인에 깔린 오일 패턴의 난이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오일 패턴을 외우고 그에 맞는 자세를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스포츠레저학을 전공하며 지도자로서의 꿈도 키운다. 선수생활을 마치면 전 세계 볼링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인드교육도 하고 싶은 것이 그의 가장 큰 꿈이기 때문이다.
“반석이 때문에 힘들어했던 누나들이 이제는 반석이 소식만 물어봐요. 아들 때문에 절망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매일매일 다르게 성장해 가는 반석이 덕분에 우리 가족이 지금은 정말 행복해졌거든요. 반석이가 우리 가정에 태어나 준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영원한 팬, 어머니와 함께. (사진 김홍수 포토디렉터)

어머니의 감격스러운 말에 오 선수는 부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집안의 말썽꾸러기였지만 금메달을 따면서 받는 연금으로 조금이나마 효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누군가 어렸을 때의 그를 봤다면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실을 알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반석아, 너는 온전해”라는 말을 믿고, 자신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봉사정신을 배웠으며, 큰 경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꿋꿋이 경기에 임했던 오반석 선수. 그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누구보다 강한 마인드를 가진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였다.

전진영 기자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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