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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이개호…그가 꿈꾸는 '다함께 잘사는 세상'
이보배 기자 | 승인 2018.11.13 15:51

스물하나 젊음을 밑천 삼아 도전한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시작된 31년간의 공무원 생활… 계장, 과장, 국장, 부시장을 거치는 동안 그의 직함 앞에는 ‘최연소’란 타이틀이 늘 따라붙었다. 그리고 지난 4년간 국회의원 활동기간까지 35년 넘게 공직자로 일하는 동안 이개호 장관의 화두는 단 하나,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이었다.

이개호. 전남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1980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31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 2014년 전남 담양·함평·영광·장성군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2016년 재선에 성공했다. 홍조근정훈장을 비롯해 국회의원 아름다운 말 선플상, 법률소비자연맹 국회의원 헌정대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박종도 기자)

1959년 전남 담양 산골에서 태어난 소년 이개호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조숙했다. 하루 세 끼만 먹어도 원이 없을 만큼 국민 모두가 가난하던 그 시절, 그는 혼자 행복하기보다 주변사람과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꿨다. 초등학교 때는 어려운 친척, 친구를 돕고픈 마음에 돈을 많이 벌어 자선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때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정치라고 생각해 ‘세상의 빛과 소금’같은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대학 재학 중이던 스물한살 때 행정고시에 합격해 전라남도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해 공무원 생활 중 대부분을 전라남도에서 보냈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위해 일하며 보람을 얻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2011년 10월, 전남행정부지사를 끝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한 이개호는 3년 뒤 전남 담양·함평·영광·장성군 지역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는 광주전남에서 유일하게 재선에 성공한다. 그동안 공직생활과 의정활동을 통해 역량을 검증 받은 그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경제2분과 위원장으로 농림·산업·국토·교통 등의 정책을 총괄했고 지난 8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0월 15일 정부 세종청사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실에서 그를 만났다.

공무원으로 일하시면서 전라남도와 서울에서 주로 근무하셨습니다. 그러다 1995년 광양 부시장에 취임하시면서 ‘페이퍼보다 현장 업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현장에서 배운 점은 무엇입니까?

도청 근무시절에는 주로 기획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기획업무 담당자가 범하기 쉬운 오류가 현장업무를 낮게 평가하는 일입니다. ‘기획부처에서 전체적인 사업 방향이 수립되면 현장에서는 그대로 진행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책상머리에서 만든 계획안과 실제 현장은 천양지차였습니다. 청춘을 바쳐 기획업무에 몰두했는데, 부시장으로 현장을 돌아보니 ‘헛일도 꽤 많이 했구나’ 하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광양은 이전 근무지들과 달랐습니다. 지역 분위기도 달랐고, 신개발지역이라 할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부시장이란 지위를 앞세워 점잔 빼고 있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때 팔을 걷어붙이고 실무자처럼 일했습니다. 페이퍼워크paper work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그러면 주민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 여겼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일을 추진하는 능력, 인화력의 중요성을 새삼 절실하게 깨달았지요. 저는 장관이 된 지금도 ‘현장에 답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책상에서 아무리 좋은 분석을 하고 답을 내놔도 현장과 괴리된다면 무의미합니다. 지난 8월, 참 덥지 않았습니까? 장관 임명장만 받고 취임식은 하기 전이었지만,거창 사과농장을 방문해 농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취임 후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어떤 문제든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보고를 통해 현장상황을 파악할 수도 있을 텐데요. 보고 받는 것과 현장에 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농림축산식품부의 역사는 1948년 7월 설치된 농림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농수산부, 농림수산부, 농림부, 농림수산식품부 등으로 명칭과 기능이 바뀌었다. ‘식량의 안정적 공급과 농산물에 대한 품질관리’가 가장 큰 설립목적이다.

전해들은 것과 직접 보고 확인한 건 다를 수 있습니다. 전해들으면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할 수 있지만, 어떤 문제가 가장 시급한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요.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해야 무엇이 가장 시급한지 알 수 있고, 여러 대책 중 우선순위를 가려서 추진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제 지역구도 농촌입니다. 주말에 가서도 가공되지 않은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습니다. 올해까지는 주말에는 농촌으로 가서 농민의 목소리를 들을 계획입니다. 내년부터는 농민들은 물론, 지역민들도 많이 만나려고 합니다.

광양 부시장으로 발령받을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6세, 전국 최연소 부시장이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했고, 스스로도 큰 책임과 부담을 느꼈다.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주민들의 욕구와 기대는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났다. 그런 사항들을 조정하는 게 공무원의 할 일이며, 그 과정인 ‘행정’은 늘 정도正道를 지켜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래야 주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골몰했고, 현장을 둘러보느라 발품을 팔았다.

‘어떤 문제든 책상머리에서는 풀리지 않으며, 답을 찾으려면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이개호 장관이 공직생활을하며 몸소 터득한 신조다. 최근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친환경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충남 금산의 친환경 축산업 현장을 둘러보았다.

국정을 운영하다 보면, 농민의 요구와 국가의 이익이 상충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결정을 내리십니까?

모두 충족시키면 좋겠지요. 장관으로서 저는 농민의 이해利害를 대변합니다. 하지만 국무위원으로서 국민경제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충돌하면 당연히 국민경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쌀값을 예로 들면요. 국민경제를 우선시하면 현재 쌀값이 높으므로 비축된 쌀을 방출해 가계 부담을 줄여야 합니다. 일리있는 이야기지요. 반면 농민들은 쌀값이 지난해 대비 40퍼센트 올랐지만 이는 5년 전인 2013년도 수준으로 회복한 정도라고 말합니다. 저로서는 2013년도 가격을 회복한 정도라면 국민경제 측면에서 용인할 수 있다고 봤어요. 국민경제를 먼저 고려하되,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장관은 제가 유일합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청년농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셨고, 장관 취임 후에도 청년농 육성을 부처 제1의 과제로 내놓으셨습니다. 실제로 농촌 인구의 30%는 70세 이상 고령인 반면, 40대 이하 청년농 비율은 1% 미만입니다. 어떤 대책을 갖고 계십니까?

청년이 없는 지역은 희망이 없습니다. 물론 어르신들도 계시지만, 청년들이 갖는 희망의 무게감과 중요성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2022년까지 청년농 비율을 지금의 두 배로 키울 계획입니다. 겨우 2%이지만, 굉장한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농사도 첨단기술과 융합해 스마트화되고 있습니다. 비닐하우스나 축사에 IT기술을 접목해하여 어디서든 자동으로 작물과 가축의 생장을 관리하는 스마트팜을 통해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려 합니다. 창고 등 농촌 유휴시설을 임대해 청년들이 창업하거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게 돕는 제도도 구축 중입니다.
고령의 농업인들이 어떻게 농촌에 정착해 여생을 살도록 뒷받침하느냐도 청년농 대책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처럼 각종 지원책을 조화롭게 추진함으로써 활기찬 농촌을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취임 후 첫 일정도 경남 거창의 사과 농가를 찾아 폭염피해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공무원직에서 물러나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지 8년째, 그동안 그는 세 차례의 선거를 치렀다. 첫 선거는 지역구가 통폐합되는 바람에 시작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뒤 시험을 보러 가는데, 갑자기 시험장이 없어져버린 격이다. 이후로도 두 차례 더 선거를 치르면서 시련과 실패도 여러 번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결국 ‘다 함께 잘사는 길’을 닦을 기회가 찾아왔다.

장관님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을 둘 꼽으라면 하나는 공직 입문, 또 하나는 정치 입문일 듯합니다. 말 못할 우여곡절도 많았을 텐데요.

정치인이 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일반공무원 시절의 열 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 소속 정당에서 최고위원, 상임위원회에서 위원장 대행을 맡았고, 도당위원장으로 지방선거를 지휘했습니다. 장관도 되었고요. 이런 외형적 성취는 잘 보이지만, 8년이란 짧은 시간에 저만큼 고난을 압축해 맛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겁니다.

저는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못 나가는 사람’ 중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축에 속했습니다. 지난 8년간 선거를 세 번 치렀습니다. 한 번은 출마도 못 했고, 두 번째에 당선되었는데 공무원으로 일하다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다 보니 선거를 치르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요. 실패도 많았고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처럼 결실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며 힘을 얻었습니다.

답변하고 있는 이개호 장관. (사진 박종도 기자)

어려울 때 힘이 돼 준 분도 많을 텐데요. 난관을 만나면 어떻게 결정하고 판단을 내렸습니까?

첫째, 주변의 후배들과 상의했습니다. 둘째, ‘어떻게 하는 것이 내 본분에 충실한 것이냐? 무엇이 정도正道냐?’를 기준으로 삼고 판단했습니다. 국회의원 시절 도지사에 출마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여론조사를 일곱 번 했는데 늘 1위였습니다. 그때 소속정당에서는 의원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심 섭섭했지만 고민 끝에 출마하지 않고 의원직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지지자들에게 제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한 달 여 간 설명해야 했습니다. 당시 제가 판단을 내린 기준은 ‘무엇이 내 본분에 충실한가?’였습니다. 의원직에 충실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 계획을 과감히 접을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어려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어려움에 대처하느냐일 것이다. 피할 수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날 때면 그는 우직하게 도전했고, 도전을 마치고 나면 한 단계 성장했다. 애초에 경영학을 전공한 그가 행정고시에 도전한 것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합격하면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요량으로 응시한 시험이었다. 결국 그는 막막한 형편 앞에서 길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요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결혼과 출산까지 포기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용기를 북돋워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년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젊음이 얼마나 큰 자산이고 무기인지 잊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젊음만큼 강한 무기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누구한테서 희망을 찾습니까? 바로 젊은이 여러분들입니다. 요즘 우리 청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입니다. 일본의 경우 최근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 외국인도 많이 선발하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상황이 올 것입니다. 희망을 놓지 말고, 자기계발을 멈추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청년들에게 밥보다 더 필요한 건 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장관님은 꿈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본인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꿈이란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지위에 오른 것을 두고 꿈을 이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저는 장관직을 목표로 공직생활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꿈을 이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모두가 따뜻한 가슴으로 사는 세상, 다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제가 직접 어떤 역할을 하기보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을 닦고 싶고, 그래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장관직은 국회의원직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사명감이 요구됩니다. 직위에 걸맞은 역할을 하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장관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우리 농촌을 살리는 일이 제게 부여된 신명身命이라 생각하며 뛰겠습니다.

기자는 이개호 장관이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도전했을 때부터 그를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가슴 따뜻한 정치인, 이개호!’ 그가 내건 슬로건은 거창하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큼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법과 제도의 그늘 아래서 어려운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 손을 잡아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그를 ‘정치인 이개호’가 아닌,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수년이 흘러 그를 장관실에서 다시 만났다. 인터뷰를 하며 지난날 그의 따뜻함이 식지 않고 오히려 더 진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보배 기자  news@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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