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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이기는 사람이 백이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하나다
민웅기 | 승인 2018.11.13 12:02

경상도보다 좀 큰 면적, 인구 1,708만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 한때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고 지금도 1인당 국내총생산 GDP 5만 5천 달러(세계 12위)에 문화·외교·학술 분야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강소국이다. 유럽에서 17년간 거주한 민웅기 씨는 지금의 네덜란드를 만든 것은 시련과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어느 가족의 초상화> 작자 미상, 네덜란드, 17세기 후반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에서 배운다

여러분은 네덜란드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열에 아홉은 풍차가 서 있고 튤립으로 가득한 들판을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국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끈 히딩크 감독을 떠올리실지도 모르겠네요. 국사시간에 ‘헤이그 특사’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1907년,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고종이 그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는데, 그 헤이그가 네덜란드에 있는 도시입니다. 아무튼 많은 분들이 네덜란드라는 이름을 들으면 동화 속 그림 같은 아름다운 마을을 맨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네덜란드 하면 ‘전쟁’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역사적으로 16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두 가지 싸움’을 끊임없이 계속해 왔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를 일으킨 싸움#1: 외세와의 전쟁

네덜란드는 14세기에는 부르고뉴 공국公國(공작이 다스리는 나라),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6세기에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되는데, 당시 스페인 왕은 펠리페 2세Felipe II(1527~1598)였습니다.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은 무적함대라고 불리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유럽·남미·아프리카·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면 흔히 영국을 떠올리지만 영국보다 먼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한 것이 스페인이었습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개신교나 이슬람 등 다른 종교를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에라스무스 등 종교개혁가가 배출되고 1517년의 종교개혁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던 프로테스탄트들이 모여들던 지역이었습니다. 당연히 펠리페 2세의 종교 탄압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1566년,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은 성당 안에 있던 마리아상像이나 성인상을 깨뜨리는 우상파괴운동을 일으키며 저항합니다.

이에 진노한 펠리페 2세의 명을 받은 알바 공작이 대군을 앞세워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때부터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 오라녜 공작 빌럼 1세를 중심으로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시작하는데, 바로 ‘80년 전쟁(1568~1648)’입니다. 복잡한 유럽사의 한 대목을 장식하는 중요한 사건이지요. 네덜란드 외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도 독립전쟁에 참전했는데, 이 세 나라를 베네룩스 3국이라고 부릅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얼마 안 가 스페인에 항복했지만, 네덜란드는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던 스페인은 네덜란드에게 너무도 힘겨운 상대였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뒤에 찾아온 반전의 계기

1574년, 여러 도시들이 차례차례 스페인에 넘어가고 빌럼 1세와 그의 군대는 네덜란드 남서쪽의 도시 레이던Leiden으로 몸을 피합니다. 스페인군에게 포위된 레이던 성城은 식량이 모두 떨어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내에서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항복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그때 레이던의 시장市長이었던 반 데르 베르프van der Werff가 광장에 모인시민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우리 이웃도시 시민들도 스페인에 항복했지만 펠리페 2세는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는커녕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항복하건 패배하건 어차피 우리는 죽습니다. 그럴 바에야 끝까지 싸웁시다.” 연설을 마친 반 데르 베르프는 자신의 팔을 잘라 식량으로 내놓았습니다. 결사항전을 외치는 그 모습에 시민들은 크게 용기를 얻었고, 빌럼 1세와 독립군은 한 가지 기상천외한 작전을 세웁니다. 바로 레이던을 둘러싸고 있던 댐을 터뜨려 바닷물로 스페인군을 쓸어버리기로 한 것이지요. 물론 성 주변의 농토와 댐을 복구하려면 엄청난 힘과 시간이 들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살수대첩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때 아닌 물바다에 우왕좌왕하던 스페인군은 결국 포위를 풀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가 80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스페인 군대에게 포위당한 네덜란드 시민> 오토 반 빈Otto van Veen 작, 1573년

이후 네덜란드는 승승장구합니다. 1607년에는 지브롤터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유럽 최강자에 등극합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왕이 다스리는 왕정 체제였지만, 네덜란드는 공화정을 채택했습니다. 각 주 의회가 선출한 대표들이 모여 국정을 운영한 것입니다. 또 종교의 자유와 상업활동의 자유가 주어졌기에 막대한 자금을 가진 투자자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계최초로 주식회사가 생겨나고 공장이 세워졌으며,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은행이 설립됩니다.

그전까지는 영국이 유럽의 조선업을 주도했지만, 네덜란드에서 저렴한 가격에 배를 만들어 팔자 유럽의 선박 주문이 네덜란드로 쏟아졌습니다. 해상무역에도 꾸준히 활로를 넓혀 17세기에는 전 세계 무역선 2만 척 중 1만 5천 척이 네덜란드 국적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스페인이라는 외세와 맞서 싸우면서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네덜란드를 일으킨 싸움#2: 대자연과의 투쟁

네덜란드Netherlands는 ‘낮은nether’+‘땅land’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언제든 바닷물에 잠길 수 있습니다. 17세기 무렵,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더넓은 땅이 필요해진 네덜란드는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간척사업에 힘을 기울입니다. 바닷가에 둑을 쌓아 해수의 유입을 막은 다음 그 물을 퍼내 새 땅을 개척하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세워진 것이 풍차입니다. 개인적으로 처음 네덜란드의 풍차를 봤을 때는 마치 미술작품처럼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풍차에는 바람을 이용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한 네덜란드인들의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풍차의 날개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새의 날개처럼 곡선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약할 때는 풍차에 붙은 천을 펼쳐 돛처럼 바람을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풍차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 외에도 곡식을 빻고 나무를 자르는 등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대자연 앞에 굴복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전하고 사고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낸 네덜란드인의 노력의 산물이 바로 풍차인 것입니다.

풍차와 함께 네덜란드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튤립에도 네덜란드인의 실험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염분이 많은 땅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이 무엇일까를 연구하다가 찾아낸 것이 튤립이거든요. 지금까지 네덜란드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19명(경제학상, 평화상을 빼면 16명)에 이릅니다. 실패와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지금의 네덜란드를 만든 것입니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절제의 지혜

외세의 핍박 앞에서, 대자연이란 큰 장애물 앞에서 네덜란드 국민들은 함께 싸웠고, 그 결과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문화예술·스포츠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역경을 이기는 사람이 백 명이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이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이 한 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 네덜란드 국민들이 더 이상 전과 같은 도전의식이나 실험정신을 발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부패한 가톨릭에 항거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가, 지금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마약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간통죄를 폐지했으며 동성同性 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물론 당장 큰 부작용이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이로 인한 잠재적 부작용이나 위험요소를 생각한다면 네덜란드가 누리는 풍요는 결코 긍정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뜰> 엠마누엘 데 비테 작, 1653년

이런 원리는 국가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힘들게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그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방만한 태도로 살다 돌이키기 힘든 실패를 맛보는 경우를 봅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절제의 마인드 아닐까요? 네덜란드 역사를 거울삼아 지금 ‘나’의 삶과 마음가짐을 점검해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민웅기
37년간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거주하면서 군인, 항공기 실내디자이너, 건축가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해외 문화를 폭넓게 경험했다. 2003년부터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유럽 매니저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에 한국을 알리는 코리언데이 페스티벌, 독일 괴팅겐대 마인드강연 등 청소년을 위한 행사를 기획, 실시했다.

민웅기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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