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머로우>는 아버지를 ‘절친’ ‘베프’ ‘멘토’라고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연중캠페인 ‘아버지와 가까이’를 진행했고,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글들을 다양한 형식으로 소개했다.

흙범벅 바나나와 아버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그때는 부모님의 이혼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조금 들었을 뿐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했는데, 그런 나의 형편이 부끄러웠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가기 싫어서 열여덟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늦게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런 나보다 더 늦게 귀가하셨다. 새벽 두세 시쯤 들어오시면 주무시지 않고 일을 하셨는데, 자주 우셨다. 아버지가 혼자 흐느끼시며 낸 그 울음소리가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 머물며 떠나지 않았다.

먹지 않는 것이 나의 유일한 반항이었다
아버지는 일하러 가시기 전에 나와 동생을 위해 항상 찌개를 끓여두셨다. 그리고 바나나와 사과, 포도 등의 제철 과일을 사서 선반에 올려놓고는 우리와 마주칠 때마다 꼭 먹으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미워하는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것들이라 먹기 싫었다. 찌개는 곰팡이가 필 때까지 두기가 일쑤였고, 바나나는 새까맣게 변해 결국 껍질도 까보지 못한 채 버려졌다. 그러면 아버지가 새로 사다 놓으셨다. 사다 놓고 치우고 사다 놓고 치우고…. 아버지는 늘 그 일을 반복하셨다.
대학에 진학해 친구 둘과 함께 자취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서였다. 아버지는 그때도 여전히 내 곁을 맴도셨다. 자주 반찬을 가지고 자취방에 오셨는데, 아버지가 가져온 음식들을 친구들이 안 볼 때 버리거나 상할 때까지 두었다가 버렸다.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잘해주시는 것도 다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우연히 대학생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한국을 떠나야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마음에, 해외봉사 활동에 대해 물어보시는 아버지께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무작정 봉사단에 지원했다.

흙범벅이 된 바나나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필리핀이라는 나라였다. 필리핀은 아직 개발이 덜 된 나라여서 사는 데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음식 문화도 우리나라와 너무 달랐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밥과 다른 반찬 하나로 먹었는데, 아주 짠 생선 한 마리와 밥을 비벼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죽으로 때우기도 했다. ‘한국은 정말 잘 사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이 점점 그리워져갈 무렵, 우리 단원들은 마닐라를 떠나 필리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시골이어서 환경이 더 열악했다. 쌀이 있으면 가스가 없고, 가스가 있으면 쌀이 없고…. 아침 겸 점심을 먹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현지인 친구가 문병을 같이 가자고 했다. 자기 친구가 아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누워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현지인을 따라 아픈 친구의 집에 갔다. 현지인의 친구는 침대에 누워서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 눈이자꾸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 위에는 큼직한 바나나 송이가 바구니 안에 담겨 있었다. ‘아, 저거 하나 먹고 싶다.’ 내가 입으로 말은 하면서 눈은 계속 바나나를 쳐다보자, 친구가 바구니를 내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바나나 먹을래?”
“그래도 돼?”
“응, 너 먹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착한 친구가 있다니!’ 외치며 바나나 한 개를 떼어내 잽싸게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엄마야! 이럴 수가!’ 껍질을 너무 세게 까는 바람에 흰 속살을 드러낸 바나나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이다.
너무 놀라 흙으로 범벅이 된 바나나를 집어 드는데,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나에게 그렇게도 바나나를 먹으라고 하셨었지….’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수많은 바나나가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당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반항적인 딸이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을까. 삶은 또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없는 형편에 과일을 사다 놓으신 것은 희생이고 사랑이었다.

바나나가 사랑일 줄이야!

흙바닥에서 주운 바나나를 들고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미안해서였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들은 모두 최고였다. 집과 음식, 그리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아버지는 정말 최고셨다. 필리핀에 간 지 6개월 만에 처음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의 첫마디는 ‘밥 잘 먹어?’였다. “아니오. 잘 못 먹어요”라고 대답하고 아버지가 해주신 찌개가 먹고 싶다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와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미워하며 살아온 날들은 내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마음을 여시고 내 옆에 계셨다. 아버지와 몇 년 만에 웃으며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정말 편하고 행복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보니 그제야 그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느껴졌다.
글 | 이은혜(2017년 3월호)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으마”
마이클 리, 2015년 5월호

스탠포드 의대생이었던 나는 2학년을 마친 어느 날 친구들의 권유로 뮤지컬 오디션에 지원했다. 심심풀이로 해본 일이 나의 잠재된 열정을 끄집어내었고, 결국 나는 의사의 길을 접고 끼니를 걱정하며 살 수도 있는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이런 내 결정을 아버지는 묵묵히 존중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네가 가고자 하는 세상(뮤지컬)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네가 왜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구나.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난 네가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잘 알고 도전할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네가 선택하렴.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으마.”

 

선생님, 그립습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늘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님은 우리에게 있어 또 다른 아버지입니다.

힘든 시기를 즐겁게 보내게 해주신 호랑이 선생님
제자 | 박선향 은사 | 김재관 선생님, 2018년 5월호

‘선생님’ 하면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무서운 영어 선생님이셨던 김재관 선생님이 떠오른다. 가장 힘들고 지치고 실망스러울 수 있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김재관 선생님이 계셨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잘 들어주시지 않고 무슨 일이든 까다롭게 처리하시는 무서운 선생님 덕분에 나는 중요한 시기를 잘 견디고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요즘도 종종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는데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내 편에서 주시면서 무얼 하든지 자신 있게 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제자가 찾아와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하시며 자주 오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선생님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하다.

고속도로를 닦기 시작한 제자
제자 | 안경훈
은사 | 서인보 선생님, 2018년 5월호

선생님들이 수업 진도를 나간 뒤 가끔씩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지금까지 기억 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서인보 선생님이 해주신 ‘공부는 인생길에 고속도로를 내는 일과 같다. 뚜렷한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일단 고속도로 부터 닦아라. 언젠가 꿈과 목표가 생기면 그 도로를 사용할 때가 온다. 길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에게 “경훈이는 목표가 있다고 했지? 그러면 앞으로 쭉 달리자”라고 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졸업을 하고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미술 교재와 인터넷 동영상 등을 이용해 혼자 그림 실력을 쌓아갔다. 열심히 한 덕분에 그림은 잘 그리게 되었고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 생겼고 방향을 잡지 못해 갈수록 답답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해 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서양미술사를 배우기 위해 역사 공부를 했고, 빛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 공부도 했다. 좋아하는 외국 작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고, 결국 모든 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에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럴 즈음에 서인보 선생님이 말씀하신 고속도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림 세계에도 길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고속도로를 내라’ ‘앞으로 달려가라’는 선생님의 조언이 이해가 갔다. 나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는 좁은 생각으로 선생님이 먼저 경험한 것들을 하찮게 여겼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것들이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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