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길을 걷는 동안, 마음이 아주 가깝고 잘 맞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 맞는 자신하고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은 싫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고, 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무척 신뢰하기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세계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일들을 만나고, 그런 가운데 여러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일을 만나기도 하고 같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이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인생의 지혜나 방법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잘 처리해 가고 어떤 사람은 그냥 앉아서 한탄을 쏟아냅니다. 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놓을 수도 없어서 붙들고만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면 내가 그보다 모자란 것을 나타내야 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부족한 점은 덮어두고 잘하는 것을 발휘하면서 살면 안 됩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삶에 새로움이나 발전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걷는 동안, 누구에게나 마음이 아주 가깝고 잘 맞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 맞는 자신하고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은 싫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고, 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무척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평생을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세계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나보다 좋고 아름다운 마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그런 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 번째는 내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새로운 세계가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나와 새로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않고 자신 안에서만 사는 사람에게는 옆에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가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옆집에 마음씨 좋은 부자가 살고 있지만, 굶고 있으면서도 그에게서 떡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공유하는 법을 잘 알았습니다. 농사일에는 논밭을 갈 때 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했기에, 소가 없는 사람은 소를 가진 사람에게 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농가가 같은 시기에 밭을 갈아야 하니까 소가 쉬지 않고 일하면 몸살을 합니다. 그래도 소를 빌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농사철에 소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면 주인이 거절합니다.
소를 빌리려면 미리 소 주인과 친해져야 합니다. 장에서 소 주인을 만나면 반갑게 이야기합니다.
“국밥 한 그릇 먹어.”
“괜찮아. 나 배불러.”
“아이, 그러지 말고 한 그릇 해.”
사양하는 것을 권하고 권해서 국밥을 사줍니다. 소 주인이 국밥을 다 먹으면 술도 권합니다.
“막걸리도 한 잔 하세.”
“에이, 됐네.”
“아냐, 한 잔 해.”
그렇게 해서 소 주인이 자신이 부탁할 때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농사철이 되면 소 주인에게 가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소가 힘들지? 내가 소 몸살에 좋은 풀이 있다고 해서 많이 갖다 놓았네. 소에게 그 풀을 먹여서 몸살을 푼 다음에 우리 밭 좀 갈세.”
소를 가진 사람도 모내기를 할 때는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그 사람 또한 평소에 이웃과 잘 지내야 합니다. 그처럼 농부들은 서로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좋은 것들을 공유하면서 살았습니다.

요즘은 삶의 형태가 많이 달라져서 자신이 맡은 일만 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굳이 도움을 받지 않아도 살 수 있기에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전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옛날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살았던 좋은 삶의 태도는 잃지 말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마음으로 교류하기 시작하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 내 마음과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맞추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부분에 있어서 그 사람의 지혜나 힘을 내 것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이들이 굶고 있는 집안의 가장이라면 잘사는 친구에게 가서 “집에 먹을 게 떨어져서 아이들이 굶고 있네. 쌀 좀 빌려주게.” 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 쌀로 밥을 해서 아이들에게 먹입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다시 찾아가서, 내가 왜 아이들을 굶기는 무능한 사람이 되었는지 묻고 거기에서도 벗어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친구가 넉넉하게 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힘이나 지혜를 받아들이면 밥도 먹고, 삶의 태도도 바꿀 수 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가 마음 깊이 고맙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그 친구 집에 가져가서 “고마워서 이것 좀 가져왔네.” 하고 나눠 먹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마음의 교류가 더 원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내 생각, 내 방법입니다. 그것으로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호떡 장사를 해도, 나는 장사가 안 되는데 주위에 호떡을 잘 파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배우면 됩니다. 그 사람이 파는 호떡을 먹어 보기도 하고, 어떻게 호떡을 만드는지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호떡을 조금씩 맛있게 만들어야지,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형편 앞에서 ‘할 만큼 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잘한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방법과 다른 사람의 방법을 비교해 보아서 더 나은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삶이 좋아집니다. 삶에 변화가 생기고 작은 행복이라도 얻으면 ‘나도 하면 되는구나!’ 하는 기쁨이 생깁니다. 크든 작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낍니다. ‘그동안 아무도 믿지 않고 내 생각만 믿고 살았는데, 마음을 열고 배우니까 행복하구나!’ 하고 삶에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전의 자신처럼 자기 테두리 안에서만 살며 고생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얻은 삶의 지혜를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내가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이젠 남을 위해 한마디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 또한 즐겁습니다.

어느 날, 우리 앞에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닥쳤다고 해봅시다. ‘내가 이 문제를 이길 수 있나, 없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만 산 사람은 낙심합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것을 배우고 산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해결할 수 있어.’라는 소망을 갖습니다. 자신의 힘만 아니라 주위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좋은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부족한 것이 많아도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그 사람의 힘과 지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지만 삶이 달라집니다. 반대로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주변을 행복으로 채울 수 있는데도 자기 안에서만 살기에 실제로는 주위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마음을 열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지? 왜 나보다 잘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힘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기능이 자랍니다. 더 좋은 지혜를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내가 이처럼 지혜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소망이 더 강해집니다. 소망이 강하기에 삶에 힘이 있고 신이 납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성경에서 힘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이사야 40장 31절)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이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음에 힘이 없어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날 라이베리아에 있는 선교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교사님이 울먹이면서, 미국에서 마약을 하며 살다가 새 삶을 시작하려고 라이베리아로 봉사활동을 온 남학생이 전갈에 쏘여 죽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심장이 몇 번 멎은 것을 전기 충격을 주어 뛰게는 만들었지만, 의사가 전갈의 독이 몸에 다 퍼져서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갈에 물린 학생과 통화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마침 의식을 차린 최요한이라는 학생에게 전화기를 건넸습니다.
“요한아, 내 목소리 들려?”
“예, 목사님.”
“너는 아프리카산 전갈에 쏘였대. 그 독이 온몸에 퍼져서 두세 시간 후에 죽는대. 네가 전갈의 독을 이기려면 힘이 필요해.”
“예, 목사님.”
“내가 오늘 아침에 이사야 40장 31절을 읽었어. 거기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어. 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아. 네가 하나님을 앙망하면 반드시 새 힘을 얻을 거야. 넌 전갈의 독에 져서 죽어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앙망하면 새 힘을 얻어. 그럼 전갈의 독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길 수 있어!”
최요한이 죽음 앞에 서 있었기에 제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병실들을 돌아보던 간호사가 요한의 혈압 모니터를 보았습니다. 뚝뚝 떨어지던 혈압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지금 최요한은 결혼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며 보람 있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나 지혜 말고, 좋은 지혜와 큰 힘을 만날 때 우리 안에 소망이 만들어집니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교류하면서 받아들이며 사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사는 가운데 우리의 사고력이나 판단력이 자라고, 마음의 힘도 커집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네 사람이 중풍병을 앓는 친구를 침상째 들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집안에 가득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의논한 끝에, 사다리를 놓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내고 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친구가 나을 것이라는 소망 외에 없었습니다. 사실 처음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갈 때에는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에 있는 소망이 길을 찾게 했고,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지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내 친구를 고칠 수만 있다면 기와를 벗기는 일이 아무 문제가 안 돼!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잘 고쳐주면 되잖아!’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에이, 오늘은 틀렸다. 그만 가자.”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데에서 더 이상 발전도 없고, 좋은 결과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길을 찾고, 그렇게 찾다 보면 길이 열립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은 상황이 조금 어려워지면 ‘안 돼!’ 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내 친구가 병이 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돌아가기 싫다. 길이 있을 거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붕을 뜯을 생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안 된다고 마음을 접은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고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 등은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정말 큰 잘못은, 주위에 있는 지혜와 아름다운 세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만 살아서 어려운 문제가 닥쳐올 때 두려워하고 낙심해서 삶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교류할 줄 알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려움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은 힘이 없고 못났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를 받아들여서 그 지혜로 문제와 싸워 나갈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혼자서 텔레비전을 만들어서 보고, 혼자서 자동차를 만들어서 타고 다니려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텔레비전을 사서 보고, 자동차를 사서 타고 다닙니다. 그것처럼 마음의 세계에서도 다른 사람의 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폐쇄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 밖으로 결코 나가지 못합니다. 생각의 담이 너무 견고하게 서 있어서 그 담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싫으면 안 하고, 부담스러우면 안 하고, 귀찮으면 안 하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안 합니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사는 사람은 설령 똑똑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얻었다 해도, 사람들의 리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지혜든 능력이든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과 맞지 않을지라도 지혜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주위에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을 만나 교류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박옥수
국제청소년연합의 설립자이며 목사이다. 세계 최초로 마인드교육을 창시한 청소년 문제 전문가로 전 세계를 다니며 강연한다.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길, 곧 마음의 세계를 성경에서 찾은 그는 젊은이들에게 물질세계가 아닌 마음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나를 끌고가는 너는 누구냐>에 이어 <마음을 파는 백화점>을 냈고, 지난해엔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나>를 집필했다. 잠비아에서 마인드교육 교재로 사용하는 <나를 끌고가는 너는 누구냐>의 콘텐츠를 만화로 옮겨 올초에 <신기한 마음여행> 만화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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