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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홍수 "생각이 깊을수록 사진도 좋다"
홍수정 기자 | 승인 2018.09.08 10:54

최근 출시되는 휴대폰의 용량은 100기가바이트를 훌쩍 넘는다. 1메가짜리 사진을 10만 장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카메라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한 요즘, 필름 카메라를 다루던 사진작가 김홍수의 이야기는 궁핍한 시절 근검절약을 외치던 어른들의 쓴소리로 치부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사진을 찍는 건 단지 셔터를 누르는 행위가 아닌, 그 사람의 내면을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그래서 무엇보다 깊이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김홍수. 1972년 열일곱 나이에 사진관 견습공으로 들어가며 사진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상경하여 창신사진관과 중앙사진관을 거쳐 허바허바,란 스튜디오, 명성 스튜디오 등 국내최고 사진관에서 기업인, 정치인, 배우 등 유명인들의 사진을 촬영했다. 현재 <투머로우> 포토디렉터로 인터뷰이의 마음을 사진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하는 제2의 사진인생을 계획하고 있다. (사진 홍수정 기자)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카메라는 집집마다 한 대 있을까말까 한 귀물貴物이었다. 학교 소풍날 며칠 전부터 아버지께 카메라를 가져가고 싶다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용돈을 더 주실지언정 카메라만큼은 장롱 속에 꽁꽁 감춰두고 내주지 않으셨다. 소풍 간다고 한껏 들떠 있는 ‘초딩’ 아들에게 비싼 카메라를 맡겼다가 행여 고장내지 않을까 못 미더우셨을 게다.
설령 운이 좋아 아버지께서 카메라를 내주셔도 더 큰 난관이 남아 있었다. 필름 한 통으로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많아야 서른 장이다. ‘사진 한 장=총알 한 발’이라는 심정으로 찍는 데 신중을 기했다. 소풍을 마치고 해산할 때까지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최후의 한 발’은 늘 남겨두곤 했다. 사진작가 김홍수와의 만남은 그래서 즐거웠다. 단지 필름카메라 쓰던 시절의 추억에 젖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기업인, 정치인, 배우 들의 프로필 사진을 담당했을 만큼 업력業歷을 쌓은 사진가였기 때문만도 아니다. 말이나 글로는 잡아낼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을 사진에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날을 벼린 한 장인匠人의 40여 년 자취를 접할 수 있어서였다.

Q.사진은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전남의 작은 섬이 고향입니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홀어머니가 형과 저를 키우셨는데, 저는 태풍이 불면 몸이 날릴 정도로 허약했어요. 어머니는 “홍수야, 너 그렇게 허약한데 뭘 해서 먹고 살겠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집에 학교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서 형은 육지의 작은아버지댁에 얹혀살며 일을 거들었는데, 저는 몸이 약해 뱃일도 농사일도 할 수 없었어요.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친구 누나 소개로 영광의 영창사진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 사장님이 “네가 먹을 쌀은 가져다놓고 기술을 배워라”고 해서 20킬로그램짜리 한 가마를 갖다놓고 그걸 먹으면서 사진관에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월급은 없었지요.

Q.요즘 같으면 열정페이니 뭐니 해서 난리가 났을 일인데요.

고생스러웠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어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청소 같은 허드렛일부터 했습니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면 사진관을 구석구석 청소하는 일부터 했어요.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거죠. 아침 먹고 가게 문 열고 손님들 촬영이 시작되면 옆에서 온갖 잔심부름을 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이 “홍수야, 앞으로는 쌀 안 가져와도 된다”고 하더군요.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暗室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요. 사진을 현상할 때 쓰는 약은 페놀phenol 성분이 강해서 아주 독하고 냄새도 많이 나요. 그걸 물에 풀어서 쓰는거지요. 그때 저희 사진관에서는 영광의 중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많이 맡아서 했습니다. 졸업 때가 되면 새벽 1~2시까지 작업을 했어요. 현상작업 하다가 피곤해서 졸면 선배한테 약품이 묻은 핀셋으로 머리를 얻어 맞기 일쑤였어요. 맞고 번쩍 잠에서 깼다가 또 졸고…. 하품이라도 하면 약품 묻은 핀셋을 입에 집어넣는 바람에 약도 참 많이 먹었습니다(웃음).

Q.흔히 말하는 도제식 교육이었군요.

그렇게 3년 정도 지났을 무렵, 저도 삼각대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장비가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메고, 시골마을까지 버스 타고 가서 결혼식이나 칠순잔치 사진을 찍는 거예요. 왜 60년대 영화 보면 마그네슘 조명이라고 화약 같은 걸 펑 터뜨리는 걸 보셨을 거예요. 사진 찍는데 누가 눈을 감아버리거나 초점이 흔들리면 사진을 망치게 되잖아요? 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바로 확인할 수도 없으니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 거죠.

촬영이 끝나면 ‘사진 잘 나오게 해 달라’ 고 혼주상에 앉혀놓고 진수성찬을 대접해주는데, 그렇게 음식이 잘 차려져 있어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어요(웃음). 사진관에 돌아와 현상해보고, 눈 감은 사람이 없거나 흔들린 사진이 없으면 그제야 한숨 돌리는거죠. 그렇게 계속 출장을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성격이 극도로 예민해졌고, ‘아무개 집에 잔치 한다’는 이야기만 들리면 저절로 부담이 되었어요. 하지만 계속 경험이 쌓이면서 찍는 속도도 빨라지고 사장님한테 인정도 받았어요. 그러다보니 더 큰 데서 사진을 배우고 싶어져 전남 광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3~4년 뒤에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로 올라와 종로의 창신사진관에 들어갔습니다.

전남 영광에 올라와 막 사진관에 들어갔을 무렵의 김홍수 작가(택시 옆).

그렇게 사진에만 쏟은 세월이 얼추 7~8년. 하지만 창신사진관에서 김홍수는 다시 막내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슬리퍼를 신고 먼 샘에 가서 사진 인화하는 데 쓸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채웠다. 공용화장실에서 선배들의 속옷을 빨았고, 잠은 가게 다락방에서 빈대들과 함께 자야 했다. 힘들 때면 누군가한테 귀동냥으로 들은 ‘일본도 이야기’를 곱씹으며 버텨냈다. “일본도를 만들 때는 쇠붙이를 풀무불에 달궜다가 식히는 담금질을 반복하는데요.
대장간에 들어가서 7년 동안 풀무질을 배운 뒤에야 비로소 망치질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뼈를 깎는 고생이 들어가야 칼 한 자루가 나오듯, 나도 내 인생을 걸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겠다’ 싶었지요.”

Q.창신사진관 생활은 어땠습니까?

지금이야 디지털 카메라를 쓰니까 틀려도 새로 찍으면 되지만, 그 시절은 원판 필름이나 인화지가 아주 비싸고 귀했어요. 필름을 아끼려고 증명사진 찍을 때는 필름 한 장을 4등분해서 한 칸에 한 사람씩 모두 네 명을 찍었어요. 현상할 때도 사진이 가장 멋지게 나오도록 여러 번 테스트해 가며 사장님께 ‘이쪽은 너무 검게 나왔다’ ‘노출시간을 줄여라’ 하고 여러 번 검토를 받은 뒤에야 인화했지요. 그 단계를 귀찮다고 건너뛰면 사장님은 정확하게 아시고 크게 화를 내셨어요. “우리 집은 역사가 있는 집인데, 이렇게 작업했다가 어떡할 거냐?” 하고요. 그때는 쫓겨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으니까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4년을 창신사진관에서 지내면서 흑백사진의 원리, 인물의 표정 잡는 법, 영업하는 법, 조명 등을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절약하는 정신이나 꼼꼼하게 일 처리하는 습관, 고객을 대하는 태도도 그때 체득한 거예요. 사장님은 자주 ‘손님을 위해 네가 가진 기술을 다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값어치를 손님께 인정받아 돈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장님은 제 사진인생을 만들어주신 특별한 선생님이셨죠.

Q.창신에서 4년 근무하시고 중앙사진관으로 옮기셨지요?

네, 그때가 1980년도였는데 거기서도 사진관 청소와 장비 청소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쟤는 맨날 기계만 닦네?” 했겠지만, 제게는 그게 공부하는 시간이었어요. 장비를 청소하면서 틈틈이 이리저리 조작해보며 사진 찍는 노하우를 터득했으니까요.
중앙사진관에서는 70여 개 학교의 졸업앨범을 작업했는데, 중학교는 보통 한 학년에 13반까지 있고, 한 반에 학생이 대략 70명이었습니다. 그걸 다 작업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이었죠. 보조랑 짝을 이뤄 한 반 72명 사진을 찍는데 딱 17분이 걸렸어요.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는데, 장비를 닦으면서 쌓은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Q.많이 힘드셨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을 듯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이 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겠지’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손님들 중에는 가족 곁을 떠나 해외로 가는 경우도 많은데, 제가 찍어드린 가족사진이나 여권사진은 가족이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는 귀중한 기록물이 되잖아요? 장관이나 정치인들 사진은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기록이 되고요. 사진에는 사람의 희로애락이 다 담기는데, 제가 찍은 사진에는 주로 기쁨이 많이 담겼어요. 그 사진들은 손님들에게 또 다른 기쁨과 만족을 주지요.
손님들이 옛날 사진을 꺼내보며 ‘우리 애가 백일 때, 돌 때 이랬는데 벌써 이렇게 컸네’ 하고 옛날을 추억하잖아요? 아이나 손자가 태어나면 어른들 사진을 보여주며 ‘이분이 네 할아버지야. 이런저런 따뜻한 분이셨어’ 하고 이야기해 줄 수도 있고요.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는 순간성의 예술이지만, 인생과 인생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연속성의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스튜디오에서 원판 필름을 수정하는 모습. ‘포토샵’이 없던 과거에는 필름에 연필로 일일이 선을 그려 넣는 수작업을 거쳐야 완성도 높은 사진이 나올 수 있었다. 하루에 최소 여덟 시간, 작업량이 많을 때는 밤을 새는 것도 예사였다.

‘사진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인생과 인생을 이어준다’는 그의 답변에서 예사롭지 않은 철학이 느껴진다. 그의 이런 철학은 우리나라 최고의 사진관인 허바허바사진관에서 만개滿開한다. 1959년 을지로에 문을 연 허바허바는 국내 사진관으로서는 최초로 라디오광고를 시도하고 각종 TV프로그램에 촬영권을 협찬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유명세를 탔다.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일급 사진가를 영입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던 허바허바는 80~90년대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인, 대기업 총수, 연예인 등이 찾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Q.당시만 해도 허바허바 하면 사진관의 대명사로 통했지요?

허바허바Hubba Hubba는 ‘빨리빨리’라는 뜻이에요.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미군이 많이 들어왔는데 전보電報나 사진을 빨리 보내야 하니까 미군들 입에서 ‘허바허바’라는 말이 많이 나왔고, 창업주께서 그걸 사진관 이름으로 지은 거죠. 저는 주변의 추천으로 허바허바에 들어갔는데, 사진 찍을 때 조명기법이나 가족사진의 자세를 잡는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많이 보였어요. 그걸 개선하려고 동기들과 함께 연구를 많이 했는데,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것 같습니다.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의장 같은 고위 공직자들 사진을 찍을 기회도 많았어요. 그런 분들은 새로 취임하면 일주일 안에 전군에 액자가 걸려야 하니까 굉장히 바빠요. 높은 분들이니까 긴장도 되고, 필름도 아끼려면 한두 방에 성공해야 하니까 많이 경직되곤 했지요. 그렇게 일감이 많다 보니 주말에도 휴일에도 쉴 수 없었죠. 한 달에 한두 번 쉬었을까요? 명절에도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가족촬영 하러 오는 손님이 많으니까 오히려 더 바빴지요.

Q.유명인들은 쉽게 말해 ‘큰 손님’이잖습니까? 실수할까 봐 긴장도 많이 하셨을 텐데요.

사진 찍을 때는 찍는 사진사만 긴장하는 게 아닙니다. 찍히는 회장님도 의원님도 누구나 렌즈 앞에서는 긴장해서 굳어 버려요(웃음). 그 상태로 사진을 찍으면 표정이 굳게 나와요.
여자 손님들은 사진 잘 찍으려고 미용실에서 머리와 메이크업도 하고, 비싼 옷 입고 고급신발까지 신고 와서는 촬영 전까지 거울 앞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그 긴장을 풀어주는 게 사진사가 할 일입니다.

Q.긴장은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요?

흔히 증명사진 찍으러 사진관에 가면 어떻게 하던가요? 사진에 잘나오려고 열심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사진사가 ‘와서 앉으세요’ ‘여기 쳐다보세요’ ‘움직이면 안됩니다’ ‘미소~’ 하고 찰칵 찍지요. 그렇게 해서는 살아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웃으래서 웃는다고 긴장이 풀리는 게 아니니까요. 신기한 건 사람의 얼굴에는 수백 가지 표정이 나온다는 걸 알았어요.
사진사와 손님 사이에는 교감이 필요합니다. 카운터에서 ‘오늘 예약고객 아무개 씨가 오신다’고 하면 준비하고 있다가, 접견실로 안내해서 함께 차를 마시면서 촬영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틈틈이 코미디언 흉내도 내고 실없는 농담도 해서 손님이 웃을때 표정을 보는 거예요.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각도에서 찍을지, 어떤 표정을 찍는 게 좋을지 등을 그 순간에 간파하는 거죠. 마사지도 해 드리고,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하면서 준비운동을 합니다. 그렇게 제가 원하는 시선과 표정을 찾아내는 거죠.

평소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김홍수 작가이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그의 눈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빛난다. 번뜩이는 열정과 카리스마로 모델의 마음과 촬영장 분위기를 단번에 휘어잡아 끌고 나간다. 피아니스트 석승환의 프로필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김홍수 작가. (사진 홍수정 기자)

교감이라, 쉽게 그 의미를 잡아내기는 어려운 대목이었다. 문득 지난 7월, 그가 세계 청소년부 장관 포럼 참석차 방한한 장관들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자신을 아름답게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은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매한가지다. 그래서인지 촬영을
앞둔 장관들의 얼굴에는 면접을 기다리는 취준생마냥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김 작가의 지휘 아래 촬영이 시작되자 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턱을 조금만 당겨보세요. 왼쪽 어깨 낮추시고….” 언어는 달라도 속에 담긴 마음이 통한 걸까. 손짓발짓이 섞이긴 했지만 분명 한국어로 말하는데 장관들은 정확히 그의 지시를 따라 포즈를 바꾸고 있었다. 그것도 신이 난 어린아이마냥…. 경직된 분위기를 금세 화기애애하게 바꿔버린 그 마술 같은 솜씨에 기자도 수행원들도 탄성이 절로 나왔다.

Q.그때 작가님을 보며 ‘저분 내공이 예사롭지 않구나’ 싶었습니다.

사진은 비디오랑 달라요. 비디오는 찍기 시작하면 찍히는 사람이 울든 웃든 하품을 하든 계속 찍었다가 나중에 편집하면 되잖아요? 사진은 달라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중요한 찰나를 딱 집어내는 거예요. 독수리가 하늘을 날다가 아래에 토끼가 보이면 확 내려와서 눈 깜짝할 새 낚아채 올리잖아요? 셔터를 누르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독수리는 토끼가 멈춰 있으면 어디로 뛸지 다 계산하고 내려오듯, 셔터도 많이 누를 필요가 없어요. 사진은 그 결정적인 순간을 딱 포착
해내는 과정인 거죠.

Q.장관들 입장에서도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 와서 프로필 사진을 찍느라 긴장했을 겁니다. 굳은 분위기를 바꾼 것도 아까 말씀하신 교감의 힘인것 같네요.

사진을 찍으면서 숱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진 찍으러 온 손님들도 척 보면 직업을 맞힐 정도가 되었어요. “혹시 어느 분야에서 일하지 않으세요?” 하면 “어떻게 아세요?” 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요. 그런 상태에서 ‘나는 당신 사진을 찍어주려고 있는 사람이다. 이 시간만큼은 당신을 맘껏 표현해라’ 하고 그 사람 마음속의 표정을 끌어내는 거죠. 그게 사진의 생명입니다. 그렇게 상대와 마음을 나누고, ‘어떻게 하면 상대를 가장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연구하다 보면 생각도 깊어지고 상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생기죠.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좋은 디지털 카메라도 많고 스마트폰으로도 멋진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습니다. 대신 사진을 찍기까지 치열하게 대화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어려움과 과정이 다 사라졌어요. 깊은 인고와 노력 없이, 한 장을 찍더라도 피사체와의 교감 없이 셔터를 누르고, 그렇게 찍은 사진으로 칭찬을 받는 것은 마치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죠. 어찌 보면 참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이 꾸중도 듣고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채찍질하면서 발전하는 법인데, 칭찬은 그 사람의 발전을 멈추게 하거든요.

지난 여름에 김홍수 작가가 촬영한 각국 리더들의 프로필 사진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국립 파나마대학교 부총장인 게르만 루이스 베이티아 박사, 솔로몬제도 아동청소년부 프레다 벨린다 아델린 장관, 레소토 청소년체육부 마할리 아그네스 파못세 장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다. 자동모드로 놓고 버튼만 누르면 셔터스피드나 조리개값을 일일이 설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멋진 사진이 척척 찍힌다. 결과물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필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획기적인 변화지만 그만큼 무심코찍고 생각없이 지우는 게 일상이 됐다. 피사체와 교감하고 사고하는 과정 역시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SNS에서 ‘좋아요’ 수천개를 받는 사진들치고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김홍수 작가가 강조하는 교감과 사고의 원칙은 그래서 더욱 되새길 가치가 있다. 그가 지금까지 사진에 정진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부족함’이었다. 초년병 시절에는 구하기 힘든 필름과 인화지를, 어떻게든 낭비하지 않고 단번에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고민하며 기초를 닦았다. 웬만큼 사진을 배운 뒤에도 안주하기는커녕 더 큰 꿈을 그리며 누가 시키지도, 하지도 않는 장비 청소를 해가며 노하우를 쌓았다.
그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척박한 조건에서도 최고의 사진을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은 한 장인의 노력의 산물이다. 김 작가는 지난 7월부터 본지 포토디렉터로 합류해 인물사진을 담당하고 있다. 그 40여 년의 내공을 앞으로 그의 사진에서 계속 만나길 기대한다.

홍수정 기자  hsj0115@itmorro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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