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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타투이스트 김동혁 "목표가 바뀌니까 할 일이 많아졌어요"
고은비 기자 | 승인 2018.09.05 00:37

‘태권도 선수’ ‘패션디자이너’ ‘타투이스트’ 등 많은 꿈을 꿔봤지만 요즘 가장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김동혁 씨. 최근 그는 ‘마인드 타투이스트’라는 목표가 생겼다. 타투이스트가 몸에 아름다운 그림을 새기듯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 기쁨. 사랑을 새기고 싶다는 김동혁 씨. ‘어떻게 하면 많은 더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동혁. 2017년에 미국으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후,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하고 싶은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김동혁 씨. ‘미국에서 봉사하며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사람들에게 전할 때마다 스스로가 더 행복해진다는 그는 이제 군부대, 학교, 소방서를 다니며 사람들과 자신의 체험담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사진 안경훈 객원기자)

“아이들이 반응이 없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어느 소년원에 북콘서트를 하러 갔을 때, 선생님들이 우리 팀에 했던 말이다. 부모 혹은 사회로부터 제대로 보호 받지 못해 일탈에 놓인 아이들. 그 아이들의 눈빛에선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보면 날카롭게 느껴졌다. 눈으로 “뭐하는지 어디 한번 보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카펠라와 연극에 이어 내가 무대에 서는 체험담 발표시간. 아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여러분을 보니 제 학창시절이 생각나네요….”

북콘서트 행사 중 체험담을 하고 있다.

신기했다. 목석처럼 느껴지던 아이들이 내 한마디 한마디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반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아이들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날 내가 소년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궁금해 한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아이들이 변한 걸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파란만장했던 어린 시절

“사랑하는 아들 동혁아…. 오늘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머리맡에 어머니의 눈물 젖은 편지가 늘 놓여있었다. 당시, 난 소위 말하는 ‘문제아’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담배를 피웠고 무면허로 오토바이를 타고, 나중에는 심지어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훔치고, 패싸움을 하고 다녔다. 경찰서를 드나드는 것이 일상이었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항상 걱정하셨다.

사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좋아 일부러 더 센 척을 하며 다녔지만,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결심도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같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친구와 같이 사고를 치고 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자기 잘못을 다 떠넘긴 것이었다. 매일같이 나쁜 짓만 하고 다녔지만 ‘의리’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그 사건은 큰 회의감과 충격을 주었다. 그 일 이후, 난 아버지의 권유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태권도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다. 매일 새벽 5시부터 밤 11시 30분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 꼬박 1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동만 했다. 그리고 합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전에 어울렸던 친구들과 마주칠 일조차 없었다. 코치선생님이나 감독님은 나에게 “늦게 시작했지만 기본기가 워낙 좋아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며 항상 칭찬을 해주셨고 나는 그만큼 더 열심히 태권도를 배웠다. 친구들이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걔네들과 달라. 난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잘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했다.

뭐든 잘하는 김동혁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서 일 년에 딱 한 명만 갈수 있다는 중국 상해체육대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내가 태권도를 전공해도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이 나를 엄습했다. 태권도를 전공한다고 해도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면 진로가 모호했기에 몇 번을 고민하다 결국 과감하게 길을 틀었다.

내가 새롭게 선택한 길은 패션 디자인이었다. 10대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옷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은 있겠지만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좀 별났다. 태권도 훈련을 받는 와중에도 틈틈이 새로운 의류브랜드가 나오면 브랜드가 사용하는 옷감은 무엇인지, 디자이너의 철학은 무엇인지 항상 찾아보곤 했다. 심지어 운동선수이면서도 운동복보다 사복을 더 많이 살 정도로 의류를 좋아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서울의 패션디자인전문대학에 진학했고, 빠르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당시 내 옷장은 각종 브랜드의 신상품, 한정판 옷과 신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킷만 90벌이 넘었다. 의류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잘 꾸미고, 개성 넘치는 패션을 유지해야 무시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해서라도 돈을 모아 원하는 옷과 신발을 사야만 했다. 난 친구들이나 교수님들로부터 종종 ‘디자인에 재능이 있다’ ‘이런 재능을 두고 운동을 했냐?’ 는 말을 듣곤 했는데 그런 말들이 마음에 쌓여 어느새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잘하는 김동혁’이 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점점 공허해져 갔다. 결국 때마침 나온 영장을 받아들고 군에 입대했다.

쉽게 내 손에 잡히지 않았던 ‘성공’

입대 후 몇 개월 뒤, 친구와 함께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날 친구를 따라 난생처음 타투샵에 갔고, 운 좋게도 국내에서 유명한 타투이스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난 스물한 살, 그 타투이스트는 스물 두 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둬 이미 연예계나 디자인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 된 그가 너무 멋져 보였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몸에 자신의 작품을 남긴다는 사실이 예술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날로 난 타투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전역 후에 꼭 유명한 타투이스트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전역한 후 나는 본격적으로 타투 공부에 매진했다. 전 세계 타투이스트들의 작품들을 일일이 수집했고 그림만 봐도 어떤 타투이스트의 작품인지 알 정도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성공’은 쉽게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문득문득 ‘난 태권도를 할 때도, 패션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었을 때도 타투이스트가 되기로 했을 때도 누구보다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왜 아직까지 단 하나의 계획도 실현하지 못 했지?’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난 절망에 빠지곤 했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었고 어디론가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때 친누나로부터 굿뉴스코 해외봉사프로그램을 소개받았다. 해외에 나갈 수 있고 1년 동안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국을 잠시 잊기로 하고 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설프고 서툰 김동혁’이지만

매주 토 요일 열렸던 한국어 클래스 행사를 위해 봉사단원들과 함께 태권도 공연 준비를 했다.

미국에서 함께 지낼 단원들과 처음 만나던 날, 난 ‘당연히 내가 쟤들 보다 더 훌륭한 봉사자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태권도 선수 시절 합숙만 6년에, 2년 동안 군대까지 다녀온 나로서는 ‘단체생활’만큼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실제로 생활하다 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도 영어가 서툴러 ‘thank you’라는 말밖에 못할 때가 많았다. 또 매주 토요일, 한국어 클래스 행사를 위해 봉사단원들과 함께 댄스나 합창 공연을 준비했는데, 난 몸치에 음치였기 때문에 ‘어설프고 서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그러던 내게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태권도 공연 준비. 나는 태권도 공연으로 단체 품새 시범, 격파 시범, 태권무 등을 구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함께 무대에 설 동료들이 태권도복을 난생처음 입어 보는 초보라는 것이었다. 난 좀처럼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단원들을 보며 답답해했고 연습만 계속 강행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더 나아지기는커녕 ‘전혀 태권도답지 않은 공연이었다’는 냉정한 피드백만 받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태권도 선수였다면서 왜 그것밖에 못 하냐?’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태권도 공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하루는 굿뉴스코 지부장님이 날 불러 말씀하셨다.

“동혁아, 사실 너희들이 돌려차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격파를 얼마나 화려하게 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아. 작년에 온 봉사단원들은 기본 동작만 했는데도 보는 사람도 즐겁고 하는 사람도 행복해했어. 너희들에게 잘하려는 의욕만 있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해.”

사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내가 그래도 태권도 선수였는데…. 못 한다는 소리 들으면 안 돼. 잘해야 해’ 하며 마음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함께하는 멤버들도 힘들게 하고 나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잘하려는 것보다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공연들을 하나하나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실력에 비해 난이도가 너무 높은 동작이 많았다. 내 딴에는 관객들이 좀 더 멋지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나의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모인 태권도 팀은 품새 시범, 격파시범, 태권무 등 준비했던 공연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며 동작의 수준을 조금씩 조정했고, 어렵고 화려한 동작 대신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데 초점을 두고 연습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잘하려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았을 뿐인데, 연습시간에 활기가 돌았고 공연을 보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연신 너무 멋지다는 칭찬을 해주셨다.

무엇보다 공연을 마친 후 기뻤다. 미국에서 난 영어, 댄스, 노래나 발표 등 항상 잘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싫었는데 ‘태권도 공연사건’ 이후에는 ‘부족한 김동혁’이 되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태권도 공연 준비를 계기로 내가 비록 잘 못할지라도 사람들을 향한 내 진심이 전달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삶에서 상상도 못했던 일들

영어캠프를 하기 위해 아이티 ‘오까이’ 마을에 갔다. 건물 앞에 버려져 있던 낡은 버스에 내가 올라타자 갑자기 아이들이 따라 들어왔다. 순식간에 낡은 버스는 우리들만의 놀이터가 되었다.

뉴욕에서부터 캔자스까지 활동하며 동료 단원들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우리는 중미 섬나라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하러 떠났다. 2010년 대지진이 일어나 약 3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전 세계의 안타까움을 샀던 나라. 아이티에 도착하니 환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운 날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먼지로 가득한 곳. 65일 동안의 아이티 생활은 힘들고 어려울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아이티 지부장님께 아이티 경찰학교 학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티 경찰 천 명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줄 수 있냐고 제안이 온 것이다. 천 명이라니, 엄청 난 숫자였다. 아이티에는 군인이 없어 경찰들이 군인 역할까지 하고 있다. 아이티 지부장님께서는 조용히 날 부르셨다.

“동혁아, 네가 태권도를 한번 가르쳐보면 좋겠어. 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면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 될 거야.”

아이티에서 현지 경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두근거림은 마냥 설레기만 한 감정은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면서 내 기억 속 ‘경찰’은 절대 마주 쳐서는 안 될, 멀리서만 보여도 도망쳐야하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 기억들을 좋게 바꿔 보고 싶었다. 그들과 소통해 보고 싶었다. 지부장님께 태권도를 가르쳐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육일정은 총 2주였다. ‘14일 동안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단순히 태권도만 가르치는 건 재미없어 보였다. 이 경찰들이 실제 임무 수행 중 쓸 수 있는 기술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다 군에 있을 때 배웠던 호신술을 태권무술과 함께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았다. 천 명을 4개의 반으로 나눠 250명씩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교육을 시작했다. 기대 가득했던 첫 번째 반에서의 수업, 쉽지만은 않았다. 나보다 키도 크고 내 얼굴만 한 팔 근육을 자랑하는 경찰들은 나를 무시하는 듯 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가 기술 하나를 알려드릴 겁니다! 누가 나와서 함께 배워 보시겠습니까?”

수많은 경찰 중에서 키와 덩치가 가장 큰 친구가 나왔다. 나를 무시하는 눈빛이 역력했지만 내 마음은 어쩐지 차분했다. 그 사람한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바로 호신술을 걸었다. 덩치와 상관없었던 기술이었기에 헐크 같던 그 친구가 휙 하고 쓰러졌고, 그 순간 나머지 249명이 일제히 감탄을 했다. 나도 얼떨떨했지만 분명한 건 그 때부터 경찰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첫 수업을 무사히 마쳤고 태권도 교육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매일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기뻤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되었다. 천 명의 경찰을 온 마음을 다해 가르쳤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을 마치기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 경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렸을 때 저는 사고도 많이 치고 불량한 학생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은 경찰들을 보면 도망가기 바빴던 날들도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 가장 좋아 보이는 길을 선택했지만, 그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이 났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잘 몰라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굿뉴스코 봉사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강해지는 법, 어려움이 와도 도전할 수 있는 담대함,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나 정말 기쁩니다.”

마지막 말을 마치자 갑자기 뒤에서 경찰들이 카메라를 들고 같이 사진을 찍자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경찰학교 내부에서는 보안의 이유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모두가 나와 경찰들이 함께 사진에 담길 수 있도록 내부를 다 가려주었다. 그들이 이 수업을 얼마나 재밌어하고 고마워했는지, 그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경찰들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한 나라를 지키는 경찰들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난 굿뉴스코 단원일 뿐이었는데....’ 한국에서라면 절대 상상도 못했을 일들이었다.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미국에서 나의 삶도 그랬다. 신상에 한정판만 찾던 내가 입고 싶은 스타일대로 옷을 입지도 못했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놀지도 못했다. ‘뭐든지 잘하는 김동혁’이 아닌 영어도 못하고 몸치에 박치에 ‘부족한 김동혁’으로 살아가면서도 이상하게 난 행복해하고 있었다. 항상 잘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땐 불안하고 공허하기만 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1년이라는 시간 을 보내면서 내가 부족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티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던 날, 미국 지부장님이 “동혁아, 너 아직도 사람들 몸에 그림 그리고 싶어?”라고 물어보셨다. 분명 몇 달 전만 해도 국내 최고 타투이스트를 꿈꾸던 ‘김동혁’의 머릿속은 앉으나 서나 타투뿐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수많은 활동을 하면서 타투이스트보다 더 크고 행복한 꿈이 생겼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셨는지 지부장님은 나에게 “나는 네 가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을 그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사람 의 마음에 그림을 그린다.’ 이 말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들어왔다.

‘최고야 과장’ 뮤지컬 공연의 한 장면.

소년원에서 북콘서트를 하고 서울로 돌아 온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쯤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사실 소년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도 제 삶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었는데 북콘서트를 보면서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한 줄에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지금 ‘투머로우 북콘서트팀’과 함께하고 있다. 북콘서트는 ‘아버지’ ‘행복’ ‘소통’ 등 평소 지나치기 쉬운 마음과 관련된 주제를 놓고 뮤지컬, 연극, 토크쇼 및 강연 등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힐링콘서트이다. 학교나 군부대, 소방서 등 에서 행사를 마치고 관객들로부터 ‘오늘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소감을 들을 때면 ‘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만큼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그 행복이 나를 오늘도 꿈꾸게 한다.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꿈을.

고은비 기자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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