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지만, 요즘 부모들은 아예 자식과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 죽을까봐, 자존감 떨어질까봐, 자식 원하는 대로 들어주며 키웁니다. 그래서 자식은 자제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식이 정말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면 마음을 꺾어줘야 합니다. 그러기엔 가난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가난은 사는 데 불편하지만 마음 건강에는 아주 좋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아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고 잘살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돈을 함부로 벌어요?”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무슨 말씀이냐면서 그분이 되물었습니다. “제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저는 굉장히 가난했어요. 일부러 가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요”라고 답했습니다.

오늘은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수업료를 가지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에 돈이 없는 것을 제가 뻔히 알고, 그런 상황에서 수업료 이야기를 꺼내면 아버지가 걱정만 하시니까, 집에 가지 않고 냇가로 가서 해질녘까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제가 물고기를 잘 잡았습니다. 낚시로도 잡고, 쇠망으로도 잡았습니다.

쇠망을 가지고 동생과 함께 폭이 좁은 도랑으로 갑니다. 제가 쇠망을 들고 서 있으면, 동생이 앞쪽에서 발로 물을 텀벙거리면서 제가 서 있는 쪽으로 물고기들을 몰아옵니다. 한 손으로 쇠망을 잡고 한 손은 망에 대고 있으면, 물고기들이 들어와 망에 탁 부딪히는 게 느껴집니다. 그럼 얼른 쇠망을 들어올립니다. 정말 신이 납니다. 한참 고기를 잡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제가 살던 선산에는, 길가에 있는 논들 옆에 물웅덩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물길을 다 막은 후 양동이로 물을 퍼냅니다. 제법 크고 깊은 웅덩이도 한나절 퍼내면 물이 다 사라지고 바닥에 물고기들만 파닥거립니다. 그 고기들을 신작로로 던지면 동생이 주워 담습니다. 삼베로 만든 속옷 하나 입고 여름을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얼굴도 등도 새카맣게 탔습니다.

그때는 노는 게 재미는 있지만, 먹을 게 없어서 자주 배가 고팠습니다. 옆집에 가서 놀다 보면, 감자를 찌는 냄새가 날 때가 있습니다. 잠시 뒤 찐 감자가 나오는데, 놀 때는 같이 놀지만 먹을 때에는 그 집 가족들만 먹습니다. 그때는 그런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저는 그냥 옆에 앉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다 제게 감자를 하나 줄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집 일을 종일 도와줍니다. 달걀을 하나 주면 한 달 동안 심부름을 해줍니다. 그 시절에는 자존심이나 고집을 꺾는 것이 쉬웠습니다.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을 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난이 사는 데에는 불편하지만 마음 건강에는 아주 좋습니다. 물질 세계는 눈에 보이고 마음 세계는 보이지 않으니까 물질적인 어려움만 해결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행복도 더해질 것 같지만, 막상 그 상황에 들어가면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한 예로, 서두에서 이야기한 분처럼 자식이 비뚠 길로 가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질 않아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처럼 돈을 잘 벌지 못했으면 아들이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으니 자제했을 텐데, 아버지가 돈을 잘 버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 아들이 자제하는 힘이 없잖아요. 자제력이 전혀 없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 그 말을 들을 수 있겠어요?”

요즘 사람들은 옛날에 비해 차갑고 날카로우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작습니다. 삶의 형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주로 농사를 짓고 살던 시절, 혼자서는 농사일을 할 수 없으니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야 했습니다. 요즘은 각기 자신이 하는 일만해도 되기에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몰라도 사는 데에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 농사를 지었고, 농사일에 있어서는 소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소가 있는 집은 많지 않았습니다. 소 주인은 자기 밭도 갈아야 하지만 이웃 사람들이 소를 빌리러 오는 것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빌려 달라는 대로 다 빌려 주면 나중엔 소가 몸살을 합니다. 소를 빌려야 하는 사람도 소가 몸살할 것을 알지만, 소가 없으면 일이 안 되니까 염치 불구하고 빌리러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소 주인이 친한 사람에게는 빌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사람은 소를 빌리지 못합니다. 장날에 소 주인을 만나면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주고 막걸리 한 잔이라도 사주면서 친분을 다져 놓아야 합니다.

한편 소 주인이라고 해서 소만 가지고 농사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내기를 할 때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해야 하기에, 그 사람 또한 평소에 이웃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이처럼 함께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였기에,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의 어려움을 알아 주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서로 관계가 좋아져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이들도 학용품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손에 쥘 수 없는 몽당연필도 뒤에 깍지를 끼워서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썼습니다. 어떤 때에는 연필이나 지우개를 친구에게 빌려서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하고 싶어도 형편이 안 되니까 자기 마음을 꺾는 데에 익숙했습니다. 자제력이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입니다.

요즘은 연필이나 지우개를 빌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려고 하기에 요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꺾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자제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기에 타인과 교류가 점점 줄어들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삽니다. 어떤 사람이 싫으면 얼굴을 보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까 남을 용납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사회가 점점 날카롭고 삶이 각박해집니다.

마음을 쉽게 꺾을 수 있으면 주위 사람과도 원만하게 지내지만,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도 쉽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꺾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든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주위에 아무리 좋고 행복한 세계가 있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살던 방식대로만 삽니다. 주위에 훌륭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삶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잘났다는 마음을 따라 멋대로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의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며 자신이 옳다는 생각의 틀 안에서 지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꺾는 훈련이 된 사람은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습니다. 욕구와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둥지 안에서만 지내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둥지를 벗어나 나는 법을 배우면 광활한 세계를 경험하며, 둥지에서 사는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습니다. 참된 지혜와 깊은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의 이름은 야발로, 그는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축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야발이 라멕의 맏아들로 태어나 자라서 보니, 가족이 먹고사는 문제에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야발은 부모님을 섬기고 동생들을 잘 챙기려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 목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목축을 하면 소가죽으로 천막을 만들고, 양털로 옷을 지어 입고, 양고기를 먹고 소젖을 마시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발은 자주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양고기가 많으면 배부르게 먹고, 소젖도 좀 더 많으면 버터나 치즈도 만들 텐데….’ ‘양털을 더 얻으면 따뜻한 옷을 만들어서 동생들에게 줄 수 있을 텐데….’ ‘소를 더 잡아서 그 가죽으로 텐트를 만들면 공간을 좀 더 여유롭게 쓸 수 있을 텐데….’ 야발은 그런 쪽으로 마음이 굉장히 발달되었습니다.

동생 유발은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왜 음악가가 되었을까요? 야발이 목축업을 해도 사는 게 여전히 어려웠다면 동생이 악기를 다루도록 놔두었겠습니까? “야, 겨울이 오기 전에 목초를 더 뜯어야 해. 겨울에 가축들을 굶길 거야? 너, 밥 먹기 싫어?” 유발이 음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야발이 만족할 만큼 삶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야발은 자신의 꿈을 이루었기에 만족스러웠지만, 유발은 먹고사는 것은 형 덕분에 그냥 누리는 것이었기에 그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삶이 즐겁고 행복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금과 퉁소를 만들어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불면서 음이 어울리는 소리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셋째 두발가인은 동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두발가인은 풍족하게 살고 음악 소리도 실컷 들으면서, 형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었기에 만족하지만 그는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칼과 창을 만들어 그것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서 사나운 짐승들과 싸웠습니다. 곰과 생사를 걸고 싸우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지막 순간에 곰이 피를 흘리면서 ‘쿵’ 하고 쓰러질때 쾌감을 느꼈습니다. 아버지 라멕이 말합니다. “두발가인아, 네가 늘 사나운 짐승을 이긴다는 보장이 어디있어? 그러다가 죽을지 몰라. 이제 그만하거라!” 두발가인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곰이 쓰러져 죽을 때 느끼는 쾌감을 다른 데에서는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지 사람이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행복합니까? 다른 욕구가 일어납니다. 노래하고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마음의 즐거움을 찾아 달려갑니다. 그단계를 지나면, 날카로워집니다. 이것저것 가져도 만족을 느끼지 못할 때 위험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쾌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삶이 풍요로워지자 그리스에서 예술을 들여와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후에는 원형극장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싸우고, 검투사들과 짐승이 싸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열광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 채 그냥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삽니다. 저희 어릴 때에는 운동화를 신으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좋은 아파트에서 잘살지만 이전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야발의 소원이 이루어지니까 인간의 마음이 훨씬 공허해진 것입니다. 다른 욕망이 일어나서,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은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럴수록 욕구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커지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고 난폭하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흐르는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만족을 향한 욕구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구와 자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중요한데, 그때 필요한 것이 마음을 꺾는 힘 ‘자제력’입니다. 자제력으로 욕구를 꺾고 참된 지혜를 받아들일 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제력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부모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 자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하지 자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않고 자제력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키웠고, 그 아이들이 중년이 된 지금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들이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라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마음의 세계를 배워서 열심히 일하며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글 | 박옥수(국제청소년연합 설립자, 목사)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