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대부분을 약국에서 보내며, 몰려드는 환자들에 쫓겨 약 짓는 기계처럼 살았다’고 고백하는 약사 정용순 씨. 주위의 권유로 아프리카에 의료봉사를 하러 갔다가 약 한 알, 파스 한 장에 고마워 어쩔 줄 몰라하는 환자들을 보며 삶에 전환점을 맞았다고 한다.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약사’가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정용순 약사 (사진 김광현 객원기자)
정용순 약사 (사진 김광현 객원기자)

대전 서구 도마 사거리 앞에 서니 ‘서부실로암약국’의 연두빛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약국 문은 지나가는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었다. 처방전을 들고 오는 환자는 물론, 소화제를 사러오는 직장인, 다리가 아파 쉬러 들어오는 할머니, 심지어 시원한 바람까지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었다. 오전 내내 분주했다는 정용순 약사는 약국 안으로 들어서는 기자들을 향해 반갑게 미소 지었다.

“저는 약사라는 제 직업이 좋아요. 약에 대해서 상담을 청해오는 사람들이 약의 정확한 효능을 알고 올바르게 복용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해줄 때면 뿌듯합니다. 약에 대해 잘 몰라서 불안해하던 분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행복하죠. 아픈 사람들이 병에서 낫고 행복해지는 게 제 꿈입니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혜택을 누리길 바랍니다.”

즐겁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정용순 약사의 등 뒤에 멋진 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가 아프리카 가나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약을 나눠주는 사진이다. 지금은 약국 일이 너무 바빠 한동안 뜸해졌지만, 한때 그는 매년 여름이면 아프리카나 중미의 아이티 등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나라로 가서 약을 조제해 나눠주는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물론 그 뒤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해진다’는 평범한 진리

어린 시절 정용순 씨는 틈만 나면 피아노 치는 것을 즐기고 작곡과 노래부르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소녀였다. 학업성적도 남부럽지 않아 부모님이 거는 기대도 컸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은 탓에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약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밤을 새며 공부해도 유급을 겨우 면할 정도로 어려웠던 약대 공부 때문에 힘든 적도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어려웠던 ‘약용식물학’이란 과목은 약으로 쓰이는 식물 50~100가지를 놓고 매주 시험을 봤어요. 문제당 답이 서너 개씩 되다보니 학점이 나오지 않아서 동기들끼리 유급이나 학사경고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약을 만드는 화학공식, 무수히 많은 병病의 종류들을 배우다 보니 약사들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았어요. 의학의 발달로 그전까지 알지 못하던 병의 정체들이 드러나면서 치료제를 개발하고, 약의 부작용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는 등 약사들의 사회적인 의무도 많았어요.”

정용순씨는 대전 서부실로암약국의 약사로 일하면서 전 세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음악공부도 시작하여 마음의 세계를 더 깊이 공부하고 있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깨닫고 있다.(사진 김광현 객원기자)
정용순씨는 대전 서부실로암약국의 약사로 일하면서 전 세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음악공부도 시작하여 마음의 세계를 더 깊이 공부하고 있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깨닫고 있다.(사진 김광현 객원기자)

대한약사회의 약사윤리강령은 ‘약사는 국민보건을 위하여 그 사명감에 충실하고, 공중위생에 대한 조언자가 되며, 새로운 지식을 연마하여 우수한 의약품 개발에 기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졸업 후 약사가 되어 약사윤리강령에 따라 환자들을 위한 약을 짓고 여러 모로 치료에 힘썼지만,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단다. 이후 결혼을 하면서 살림과 육아, 약국 운영까지 감당하느라 체력이 급격히 나빠졌다.
“한의원에 갔더니 제 몸의 기운이 진盡한 나머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한 달에 휴일은 딱 두번, 매일 밤 10시까지 일하느라 제 몸과 마음의 기운이 계속해서 축나고 있었어요. 그래도 ‘내가 약을 조제함으로써 환자들을 고쳐줘야 한다’는 약사로서의 책임감을 저버릴 수는 없었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 했어요. 늘 일이 많았고, 마음이 쉬지 못해 병들어가고 있었지요.”
그때부터 4개월간 일을 쉬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동안,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그는 일요일에는 약국 문을 닫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평일에도 저녁 7시까지만 영업을 하고 이후에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삶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갔다. 약국 영업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마음이 더 밝아지고 건강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잊지 못할, 아프리카 사람들의 간절한 눈빛

그러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약국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약국을 넓은 곳으로 옮겼고, 공교롭게도 주위에 병원도 많아지면서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약사도 새롭게 여러 명을 더 고용했다.
“하루는 아프리카 의료봉사활동을 가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정신없이 바쁜 약국 일을 두고 몇 주간 해외를 다녀오는 것이 정말 불가능해보였기 때문에 선뜻
‘가겠다’고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약사가 된 지 20년쯤 되면서 삶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올라 있었어요. 아프리카와 같은 어려운 국가에 봉사를 가는 것이, 저를 이렇게 키워준 국가와 사회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들었죠. 마침 그 무렵 두 아들과 딸이 기숙사학교에 들어가면서 집안일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시간적인 면에서도 여유가 생겼죠.” 2009년 7월, 그는 의사와 약사 등으로 구성된 의료봉사회 회원들과 함께 아프리카
가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해보니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의료시설과 위생실태가 그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의사와 약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간절함이었다. 진료시작 시간은 오전 8시였지만, 사람들은 새벽 6시부터 길게 장사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천막 하나 없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래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행여 진료를 받지 못할까 봐 새치기하는 사람도 많아 질서유지팀이 꼭 필요할 정도였다.

그들은 약 한 알, 파스 한 장에 고마워하고 감격스러워 했어요. 한국에서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의약품이었는데 그들에게는 무척 큰 감사와 행복이 됐습니다.
그들은 약 한 알, 파스 한 장에 고마워하고 감격스러워 했어요. 한국에서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의약품이었는데 그들에게는 무척 큰 감사와 행복이 됐습니다.

“그들은 약 한 알, 파스 한 장에 고마워하고 감격스러워했어요. 한국에서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의약품이었는데 그들에게는 무척 큰 감사와 행복이 됐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동안 환자들을 향해 마음을 열지 못하고 기계처럼 일하고 있었던 제 모습들을 돌아볼 수 있었지요. 아프리카 환자들처럼 한국 환자들도 병 때문에 힘들어하고 낫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데,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말을 거칠게 하거나 툭툭거릴 때가 많거든요. 저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약 조제하는 데만 쫓기다 보니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동안 사람들이 우리의 작은 손길에 기뻐하는 것을 보며 ‘한국에서도 내가 환자들의 마음을 살피면 환자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하지만 마음은 뿌듯함과 기쁨, 감사로 가득 차는 것이야말로 봉사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오다가 다른 사람을 위했을 때 오히려 더 큰 행복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 새 삶의 가치관이 바뀐다. 그때부터 정용순 약사는 매년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과 중미의 아이티 등 여러 나라로 의료봉사를 다녔다. 작은 알약 하나를 주었을 뿐인데 어느새 병이 다 나은 듯 뛸 듯이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절로 힘이 솟았다.

“2011년에는 아이티로 의료봉사를 갔어요. 그 전해에 아이티를 강타한 대지진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큰 고통과 상처를 남겼어요. 다치거나 병이 들어도 마땅히 치료를받을 곳도 없었고요. 하루에 1,200명분 약을 조제했는데, 전자동조제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제 손으로 직접 정량 조제를 해내갔는데 그 일을 해낸 제 자신이 놀라웠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여러 병원에서 환자
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시간에 쫓겨 조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제 모습과는 정반대였으니까요. 그 이후로는 그런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더라고요. 단순히 계산하면 의료봉사는 제가 현지인들을 위해 제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붓고 오는 일인 만큼 손해가 나야 하겠지만, 늘 제가 준 것보다 두세 배 더 큰 기쁨과 보람을 얻고, 덕분에 제 삶에 행복과 활기가 넘치는 것을 볼 때 정말 신기합니다."

누구도 부럽잖은 행복한 약사로 사는 법

약사는 일과시간의 대부분을 ‘약국’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지내며 약 제조라는 같은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많은 약사들이 사고가 틀에 박히고 삶에 신선함이 떨어지는 매너리즘을 경험한다고 한다. 정용순 약사도 자신이 약 짓는 기계가 된 듯한 기분으로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복약지도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 의료봉사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며 일하는 행복한 약사가 됐다.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할 때 더 풍족하게 사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더 이상 약국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도전을 하고 있다. 의료봉사 설명회와 홍보를 다니는 한편 마인드교육 강사 자격증도 취득해 강연도 다니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어린 시절 좋아했던 피아노도 다시 배우고있다. 아침 7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고 성악도 공부하면서, 틈틈이 무료공연을 통해 배운 것들을 펼쳐보이기도 한다.

약국 데스크 한 켠에 걸려있는 2009년 아프리카 가나에서의 의료봉사 모습. 아프리카 사람들의 간절함에 반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그의 모습을 한 기자가 사진에 담아 선물했다.
약국 데스크 한 켠에 걸려있는 2009년 아프리카 가나에서의 의료봉사 모습. 아프리카 사람들의 간절함에 반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그의 모습을 한 기자가 사진에 담아 선물했다.

“학생들이 약사를 지망하는 이유는 대개 안정적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거기만 초점을 맞추고 일하다 보면 불행해져요. 환자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신약을 개발하고, 보건정책에 맞춰서 환자들을 상담해주는 것이야말로 약사의 가장 큰 역할입니다. 책임이 막중하다 보니 스트레스도 크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크죠. 그래서 약사들은 특히 마음이 강해야 하
고, 강한 마음을 키우려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 봉사를 다녀와야 해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현지의 풍토병이나 말라리아, 에이즈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장례를 치러 내면서 사람들은 마음에서 슬픔과 고통을 이기는 법을 배웁니다.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상처입은 마음을 회복하고 행복해지는지 배운다면 한국 같은 편한 환경에서는 어떤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고, 약사로서도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혹 어디 아픈 곳이 있다면, 혹은 몸과 마음이 왠지 모르게 나른하고 의욕이 없다면 서부실로암약국으로 가보자. 그곳에서 당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건강하게 해 줄 정용순 약사가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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