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온두라스 대사 비르힐리오 파레데스 트라페로

2018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했다. 월드컵에 출전한 32개국 대표 선수들은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라운드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친다. 파레데스 트라페로 주한 온두라스 대사는 ‘외교관은 조국을 대표하는 선수’라고 말한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물론 자국의 정치, 경제, 문화, 환경에 대해 정통해야 외교관의 소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비르힐리오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는 1999년 온두라스 외교부에 입부하면서 공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엘살바도르,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국제기구와 NGO, 정부기관, 기업체에서 근무했으며, 10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한 ‘공부하는 외교관’이다. 대사로서는 첫 근무지인 한국 생활에 대한 애착과 기대가 남다르다.(사진 홍수정 기자)
비르힐리오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는 1999년 온두라스 외교부에 입부하면서 공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엘살바도르,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국제기구와 NGO, 정부기관, 기업체에서 근무했으며, 10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한 ‘공부하는 외교관’이다. 대사로서는 첫 근무지인 한국 생활에 대한 애착과 기대가 남다르다.(사진 홍수정 기자)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근무 중인 주한 대사의 수는 100여 명 정도다. 그 중 한국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대사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구웨이 담보 크리스토프 대사로, 2004년부터 지금까지 14년 넘게 근무하고 있다. 반면 지금부터 소개할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는 지난해 10월 부임했으니, 주한 대사들 중에서도 한국 근무경력이 가장 짧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착은 다른 ‘고참’ 외교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외교관이 되려면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인드가 필수”라고 강조하는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는 자신의 열린 마인드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대사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버지는 다국적 바나나 농업회사에서 근무하셨는데, 농학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전문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여러 나라로 근무지를 옮겨다니신 덕에 저희 가족도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지요. 처음에는 온두라스, 다음에는 코스타리카, 그 다음에는 파나마에서 살았어요. 물론 저도 그때마다 학교를 옮겨야 했고요. 학창시절을 세 나라에서 보낸 셈이지요.

세 나라 모두 스페인어를 쓰니 의사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었겠지만, 그 외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정든 친구들이랑 헤어져야 한다는 게 힘들었지요. 완전히 낯선 나라에 적응하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했으니, 어린 아이에게는 분명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지내보니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사교성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해외 생활이 오히려 재미있더군요. 여러 문화권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방식의 교육을 받는 동안 어떤 지역,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넓은 시야와 미래에 대한 비전도 생겼고요. 열린 마인드야말로 제가 국제무대에서 일하고 외교관으로 일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인드가 현장에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트리니 다드 토바고에 근무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끼리 문제가 생긴 적이 있습니다. 업무를 기획한 사람은 스페인 출신이었는데 실제로 그 일을 처리하는 실무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감독하는 사람들은 캐나다와 영국 출신이었어요.
통역관이 있으니까 언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문화와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가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일할 때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열린 마인드 외에 외교관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재 어느 나라에서는 어떤 중요한 이슈가 벌어지고 있는지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자기 나라의 정치,경제, 문화, 환경 등에 정통해서 조국을 다른 나라에 알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국의 국가대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참, 외교관에게 필요한 자질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인내심입니다. 인내심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웃음).

비르힐리오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 (사진 홍수정 기자)
비르힐리오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 (사진 홍수정 기자)

‘외교관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자질은 인내심’이라는 그의 말에 기자도 따라 웃었다. 외교관은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근사하고 낭만적이기만 한 직업은 아니다. 정상회담 같은 중요한 이벤트가 잡히면 몇 달 동안 밤을 새며 준비에 몰두하고, 주재국에 큰 테러나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자국민의 안전을 맨 먼저 챙겨야 하는 힘든 직업이다. ‘세상에 맘대로 되는 일이란 없으니, 어려움이 닥쳐도 묵묵히 인내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마음의 힘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재미있고도 묵직한 한마디였다.

4월 열린 새마을의 날 기념식에서 축사를 했다.
4월 열린 새마을의 날 기념식에서 축사를 했다.

-주한 대사로 오시기 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으시지요?

네, 저는 공학경제engineering economy를 전공했는데요. 온두라스 내의 여러 대학교에서 10년 넘게 공학경제와 프로젝트 관리projectmanagement를 강의했습니다. 물론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은 외교관으로 일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늘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듯, 외교관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세상에는 배울 게 더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러면 저절로 더 겸비해지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지요.

한국에서는 외교관이 되려면 치열하게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온두라스는 외교관을 선발하기 위해 특별히 시험을 실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면 학위가 필요하지요. 외교관 중에는 국제관계나 국제법, 국제경제 등을 전공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학위도 중요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내에서도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고방식이 다르고, 남미 내에서도 나라마다 문화나 생활상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하물며 동양과 서양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외교관으로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으려면 여러 나라의 사람과 문화를 겪어봐야 합니다. 그런 역량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고, 실제 해외 생활을 경험하며 체득해야만 하지요.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지역-동아시아 협력 포럼에 참석했다.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지역-동아시아 협력 포럼에 참석했다.

‘지난 8개월 동안 생활한 경험에 비춰볼 때 한국은 참 재미있는 나라’라는 게 파레데스트라페로 대사의 말이다. “한국은 국민들이 굉장히 친절하고, 치안과 생활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며, 도시와 지방이 비교적 균형 잡혀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그는 서울외에도 부산, 수원, 인천, 전주 등 열두 곳이 넘는 도시를 가 보았으며, 관용차 대신 지하철을 즐겨 탄다고 한다. ‘서울은 지하철 노선도만 볼 줄 알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지도도 따로 필요없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제로 파레데스 트라페로 대사의 각별한 한국 사랑은 주한 외교관들 사이에서 자주 화제가 되곤 한다. 그에게는 에탄과 데렉,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 에탄은 현재 서울의 이태원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대다수의 외교관들이 자녀를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사랑하는 아내 카렌과 큰아들 에탄, 작은아들 데렉과 함께.
사랑하는 아내 카렌과 큰아들 에탄, 작은아들 데렉과 함께.

-아들을 한국 학교에 보내시다니, 전혀 뜻밖이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주한 대사들 가운데 아이를 한국 학교에 보내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어떤 대사님은 ‘아들을 왜 굳이 한국인 학교에 보내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제가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이들도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고, 한국식 교육을 받으며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어린 시절의 대사님처럼, 큰아들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한국어와 한국 문화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적응할 것이고 그런 언어적, 문화적 체험은 아들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언어를 알아야 문화를 이해할 수 있잖아요. 아들도 처음에는 애를 먹긴 했지만, 지금은 한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 줄 압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고 이해도 할 수 있고요. 학교 선생님들도 아들이 한국에서 지낸 지만 1년이 되는 9월에는 한국어를 완전히 이해할 거라고들 하시더근요.

-대사로서는 한국이 첫 근무지이신데요. 각오나 의욕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을 더 많이 알고 배우고 싶습니다. 특별히 바쁜일이 없거나 주말이 되면, 운동화를 신고 청바지에 간단한 셔츠 차림으로 몇 시간 동안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이모저모를 살피다 보면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한강변을 따라 걸을 때도 많고요. 대형마트 대신 청계시장 등 시골 상인들이 농수산물을 트럭에 잔뜩 싣고 모이는 전통시장을 즐겨 찾습니다. 사람들에게 말도 붙여보고 직접 야채 등 식품도 구입하지요.
저는 다른 외교관들이 잘 가지 않는 곳, 심지어 한국인들도 잘 가지 않는 곳을 찾아 다닙니다. 심지어 교도소에 가 본 적도 있어요. 진정한 한국의 모습에 대해 알려면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곳에도 가 봐야 합니다. 그게 책이나 인터넷으로는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진면목이잖아요? 전에 다른 나라에 근무할 때도 저는 이런 식으로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는 기자님보다 서울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내기해도 좋아요(웃음).

연세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유학생 앙헬 피녜다씨와 기념촬영을 했다. 온두라스는 연세대와 함께 정부장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유학생 앙헬 피녜다씨와 기념촬영을 했다. 온두라스는 연세대와 함께 정부장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한 대사의 임기는 통상 4년이다. 대사는 ‘특명전권대사’의 줄임말로, 자국을 대표해 각종 교섭에 관한 권한을 전부 위임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부여되는 혜택도 많지만, 자국과 상대국 간에 정치, 경제,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하는 책임 또한 막중하다.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리더십, 조국을 대표한다는 애국심과 책임감,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 등을 갖춰야 훌륭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두 나라 사이가 더 돈독해지고 무역도 활발히 이뤄지는 거죠. 한국에서는 온두라스 상품을, 온두라스에서는 한국 상품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국 회사들도 더 많이 온두라스에 진출하면 좋겠고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인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두 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국은 지난 50년간 놀랄 만한 발전을 이뤘는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를 자주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문화나 패러다임의 차이, 그리고 조국에 대한 국민들의 헌신과 사고방식의 차이가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배우고 싶고, 그래서 한국을 이해하는 일은 제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많은 대사님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휴일도 없이 일합니다. 대사님은 어떻습니까?

저라고 다를 건 없죠(웃음). 사람마다 삶에서 우선 순위가 있잖아요?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과 가족, 그리고 일입니다. 대사로서의 업무도 중요하지만, 항상 일에만 관심을 쏟는 건 아니고 가족을 위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일에만 매달린다고 꼭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더라고요. 가족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하고, 그래야 저도 일을 잘할 수 있지 않겠어요?
또 신앙을 등한시한 나머지 제가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진다면, 일이 잘되어도 의미가 없지요.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고…. 일요일은 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트라페로 파레데스 대사는 한때 좋은 직장에서 만족스런 보수를 받아가며 근무했지만 별다른 만족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공무원이 되어 조국과 국민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얼마 후 외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인 중에 같은 회사에서 40년 이상 근무한 분이 계셨어요. 생활은 안정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포부도 없이 사시더군요. 인생에는 늘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년이라면 어렵더라도 새로운 것을 찾아 과감히 뛰어드는 도전을 시도하길 바랍니다.” 짧은 한마디지만 그 여운은 참으로 길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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