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필리핀 외교부 장관 앨런 피터 카예타노

6월 3~5일 방한한 두테르테 대통령과 함께 한국을 찾은 카예타노 장관. 대통령 출국 다음 날인 6일까지 바쁜 행보를 이어나갔다. 인터뷰 시간이 30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본인도 기자도 아쉬워했다. 급기야 특파원이 필리핀에 있는 집무실까지 찾아가 못 다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는 성경구절을 리더십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그는 어떻게 두테르테를 보좌하고, 필리핀 외교를 지휘하는 걸까.

앨런 피터 카예타노.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아홉인 그가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다. 이후 시의원과 부시장을 거쳐 하원 및 상원의원에 세 차례씩 당선되었다. 2016 필리핀 대선에는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으며, 2017년부터 외교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다.(사진 홍수정 기자)
앨런 피터 카예타노.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아홉인 그가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다. 이후 시의원과 부시장을 거쳐 하원 및 상원의원에 세 차례씩 당선되었다. 2016 필리핀 대선에는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으며, 2017년부터 외교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다.(사진 홍수정 기자)

카예타노 장관의 집안에는 상원의원인 자신을 포함해 국회의원 출신이 네 명이나 된다.
그의 아버지 레나토 카예타노는 상원의원과 대통령 고문,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법조인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한 곳, 초등학교는 두 곳이나 있을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누나인 피아 카예타노도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하원 부의장을 맡고 있다. 아내 라니 카예타노 역시 하원의원을 거쳐 현재 타귁시티 시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동생 리노도 타귁시티의 시의원이다.
한 집안에서 이토록 많은 정치인이 배출된 까닭은 무엇일까. 필리핀에는 소위 ‘정치 명문가’들이 많다. 세계 최초로 모자母子가 나란히 대통령이 된 아키노 가문, 12대 대통령 피델 라모스를 배출한 라모스 가문, 그밖에 마르코스 대통령도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나 카예타노 가문의 면면을 살펴보면 ‘명문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카예타노 장관의 할아버지는 평범한 기계 정비공, 할머니는 공립학교 교사였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외할아버지는 목수, 외할머니는 미용사였다. 아무래도 카예타노 장관으로부터 직접 그 답을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지난해 8월 마닐라에서 열린 동아시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의장국 대표로 회담을 진행하는 카예타노 장관.
지난해 8월 마닐라에서 열린 동아시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의장국 대표로 회담을 진행하는 카예타노 장관.

-집안에서 네 명이나 되는 정치인이 탄생한 비결이 궁금합니다. 혹시 할아버지나 아버지께 남다른 훈육법이 있었나요?

하하, 글쎄요.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 경제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의 삶은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았어요. 일이든 공부든 열심히 해야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정비공이셨던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성공하고 싶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아버지는 필리핀국립대학교를 졸업하신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미시건주립대에서 행정학 석사와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는데, 학위 외에도 정말 소중한 것 하나를 더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저희 어머니셨어요(웃음). 어머니는 독일계 이민자의 딸이셨는데, 아버지가 공부를 마치신 뒤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오셨어요. 아버지는 필리핀인, 어머니는 서양인이니까 굉장히 독특한 가정이었죠. 어머니는 유치원 선생님으로 온화한 분이셨지만, 아버지는 굉장히 엄한 분이셨어요. 그러면서도 굉장히 이성적인 분이셔서 저희 4남매를 잘 보살펴 주시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는 버릇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많이 하셨습니다.

-4남매 중 셋이 정치인이 된 건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겠지요?

아버지는 무료변론도 많이 하셨고, 여배우 자살사건이나 고위공직자 스캔들 같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피고인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면서 국민들 사이에 법조인으로 크게 유명해지셨습니다. 자연히 정치권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지요. 1984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셨고, 산업통상부 차관에도 임명되셨지요. 86년에 잠시 정계를 떠났다가 95년에 정계에 복귀하셔서 라모스 대통령의 법률고문을 맡으셨습니다. 98년에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셨는데, 저 역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부자父子가 함께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물론 그전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정치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미국-필리핀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해 9월 틸러슨 미 국무장관을 만나 외교분야에서 지원과 협력을 요청했다.
미국-필리핀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해 9월 틸러슨 미 국무장관을 만나 외교분야에서 지원과 협력을 요청했다.

-정치로 진로를 정한 건 언제부터였습니까?

제가 1970년생입니다. 그 무렵 미국이 우주비행사를 잇달아 달에 보내면서 전 세계적으로 우주탐험이 화제가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는데, 나중에는 과학자로 꿈이 바뀌었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다들 자기가 뭐가 되고 싶은지만 생각해서 장래희망을 정하지만, 차츰 가족을 생각하고 주변세상을 보는 눈이떠지면서 그 목표가 바뀌잖아요?
대학에 갔는데 주위의 권유로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임원으로 선출되면서 ‘진짜 정치를 해 보고 싶다. 고향인 타귁시티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런데 마침 새 법안이 통과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습니다. 대학 4학년이던 스물한 살 때 타귁시티 시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지요.

1992년, 필리핀 내에서 최연소로 시의원에 선출되면서 카예타노는 직업정치인으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공부와 정치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카예타노는 수업시간표를 짤 때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시의원 활동을 하느라 수업을 소홀히 하더라도 이해해 주실 교수님을 골라서 수강신청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출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거든요.” 어느 분야든 그렇겠지만 특히 정치는 현장을 직접다녀야 한다. 민심이 어떻게 움직이고, 지역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파악하려면 발 벗고 뛰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을 무척 바쁘게 보내셨을 듯합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말은 독재자였던 마르코스 대통령이 물러나고 정권교체가 이뤄지던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굳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데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젊었을 때 가급적이면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싫어하는 과목을 일부러 수강하기도 했고요. 싫은 과목은 더 잘하고 싶었고, 그 어려움에 도전하는 순간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바쁘지만 즐거운 대학생활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시의원 활동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늘 시정市政을 비판하는 쪽에서 있다 보니 시청 공무원들과도 자주 논쟁을 벌였어요. 그건 저한테도 좀 스트레스였죠(웃음).

-도전을 즐기셨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하다 보면 기득권층이나 범죄세력과 정면으로 싸움을 벌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크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문제가 없고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만해서는 안되고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진정 옳은 길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늘 문제가 닥치고, 그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작은 싸움일 수도 있고, 큰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싸움일 수도 있고, 긴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 지역구 주민들과 싸울 때도 있습니다. 굳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확신이 없더라도 문제를 풀어가는 순간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싸움을 즐기신다지만 그래도 살면서 한번쯤 힘드셨던 적은 있었을 텐데요.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아버지께서 정치인으로서 절정기를 맞고 계실 때 B형 간염 진단을 받으신 일이었죠. 근 1년을 병마와 싸우셨고, 미국에서 7개월을 보내며 간 이식을 받으셨어요. 남동생 중 한 명의 간을 60%떼어내 이식받으셨는데,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2주 뒤에 위암 진단이 나왔어요. 결국 아버지는 귀국해서 TV쇼 등에 출연하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도 이야기하시다가 2003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려울 때 진정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알 수 있지요. 그런 어려운 위치에서 경험한 것들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아버지를 돌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아버지를 향한 제 사랑과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그 시간은 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마음을 배우는 기회가되었습니다.

2016 필리핀 대선을 7개월 여 앞둔 2015년 9월, 카예타노는 다바오시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누가 카예타노와 짝을 이뤄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인가?’는 자연스레 필리핀 정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두 달 뒤, 다바오시티 시장이던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그의 러닝메이트로 대통령 출마를 공식화했고, 2위와는 500만 표 차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하지만 정작 카예타노는 3위에 머무르며 낙선하고 만다(필리핀은 국민들이 각각 원하는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에게 따로 투표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10일, 두테르테 대통령은 카예타노를 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2016 필리핀 대선에서 대통령후보 두테르테와 짝을 이뤄 부통령으로 출마했다.
2016 필리핀 대선에서 대통령후보 두테르테와 짝을 이뤄 부통령으로 출마했다.

-두테르테 대통령께서 장관님을 외교부의 수장으로 발탁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통령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는데, 대통령께서 연로하시다 보니 젊은 유권자들과는 표현이나 말하는 방식이 달라 그 의도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정책공약이나 인생사, 앞으로의 비전 등을 자세히듣다 보니, 자연히 대통령의 의중을 대중에게 풀어서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어요. 대통령께서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하셨고요. 대통령께서는 저더러 “부통령에 낙선하면 외교부 장관을 맡아주면 어떻겠나? 아니면 법학을 전공했으니 법무부 장관도 좋겠다”라고 하셨어요.
저는 ‘대통령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씀드렸고, 대통령께서는 저를 외교부 장관에 임명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적도 친구로 끌어안을 수 있고, 벽을 쌓는 대신 다리를 놓는 외교가 대통령께서 생각하는 정책기조였지요. 대통령께서는 다문화를 좋아하시는데, 실제로도 미국이나 유럽과 교분이 깊은 인사들을 장관 등 요직에 임명하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미국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떻게 보좌하고 계십니까?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운영자인 만큼 저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조언을 해 드릴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니까요. 두테르테 대통령께서는 모든 사람의 조언을 충분히 듣는 리더입니다. 물론 대통령께서 저를 비롯한 장관들의 조언대로만 결정을 내리시진 않지만, 그것으로 제 할 일은 충분히 다 한 것이지요.
조직의 최고운영자는 항상 아랫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외교분야에 한해서 조언을 드리지만, 대통령께서는 외교 이외에 다른 분야도 모두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국회의원으로서 제 지역구에 집중할 때, 대통령께서는 필리핀 전국을 생각합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최고의 선택을 내리도록 돕되, 일단 결정을 내리시면 따르고 보좌하는 게 제 임무지요. 저희 외교부 직원들도 제가 대통령을 보좌하듯 저를 도와주길 바랍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저는 언제든 잘못된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 11월 아세안 정상회담 참석차 필리핀을 찾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한 카예타노 장관.
2017년 11월 아세안 정상회담 참석차 필리핀을 찾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한 카예타노 장관.

-외교부의 수장으로서 장관님은 ‘외교’와 ‘리더십’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외교란 ‘서로 간에 다리를 놓고, 서로를 포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필리핀만 해도 7,100개나 되는 섬이 있고 80여 개의 언어와 방언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것이든 어떤 인프라든 다리가 있어야 서로 교통하고 왕래할 수 있습니다. 외교란 문화와 지역,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외모나 피부색, 재능이 달라도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외교입니다.
리더십이란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7,80년대만 해도 리더십이나 권력 하면 다들 남들보다 뛰어나고 거창한 권세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권력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섬김을 받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리더십이 되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는 구절이 있지요. 지금 저만 봐도 외교부 장관이다 보니 이곳 대사님께서 제 좌석부터 공항까지 배웅하는 일 등의전을 각별히 챙기시지 않습니까? 이런 지위에 있다면 자신을 낮추기가 오히려 더욱 어렵겠지요.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먼저 훌륭한 팔로워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섬겨본 경험이 있어야 리더가 되었을 때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윗사람을 섬기면서 하기 싫은 일을 아랫사람더러 저한테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 리더라면 원칙과 실리 사이에서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칙만 앞세우다보면 얻는 것이 없고, 실리만 좇다 보면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거든요.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근로자들을 만나 격려하는 카예타노장관. 해외에서 거주하는 필리핀인은 약 1천만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필리핀 국내 인구의 10% 에 해당한다.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근로자들을 만나 격려하는 카예타노장관. 해외에서 거주하는 필리핀인은 약 1천만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필리핀 국내 인구의 10% 에 해당한다.

지금 필리핀 외교부는 재외국민, 경제, 안보 등 여러 현안에 직면해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필리핀인은 약 1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필리핀 국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숫자다. 카예타노 장관은 “경제가 발달하고 국내에 좋은 일자리가 많아진다면 해외로 가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그밖에 중국과의 사이에서 남중국해를 놓고 벌어지는 영해분쟁 또한 결코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에 카예타노 장관은 파리 조약이나 유엔협약 등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합의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이어주는, 온화하고 유연한 리더십을 가진 그는 앞으로 이런 현안들을어떻게 풀어갈까? 내심 기대가 되었다.

정리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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