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한국장학재단 수기UCC 공모전 수상작

학자금 수혜사례 종합대상 학생부문 조예진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다. 아빠의 당뇨 악화와 연이은 사업실패 때문이었다. 언제나 튼튼할 것만 같았던 우리 집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아빠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지방으로 내려가 밤낮없이 일하셨고, 엄마 역시 밤늦게까지 일하셨다. 엄마의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이던 그날, 엄마의 눈물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집의 기둥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부모님 앞에서 절대 울지 않는 든든한 딸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집을 다시 일으키고 가족의 웃음을 되찾아줄 왕관을 꿈꿨고, 그 무게를 견뎌낼 각오를 다졌다. 그 무게에는 하고 싶던 미술을 포기하는 것, 집안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초등학생 동생을 돌보는 일이 포함됐다. 미술학원에 다녀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혼자 힘으로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고 새로운 학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거란 기대에 동아리, 특기 활동시간을 미술로 채워 희망을 꿈꿨다. 하지만 실기전형이 태반인 디자인학과는 비싼 학원비 탓에 여전히 멀기만 했고 당장 대학입시라는 현실에 이과라는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 꿈을 포기한 채 엄마 역할을 하면서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상황이 점점 더 힘들어져 혼자 우는 날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 12월 1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앞날이 보이지 않아 가슴을 세게 쳐도 답답하기만 한 날이었다. 엄마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셨다. 동생이 생겼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나마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시기인 대학입시를 앞둔 이 시점에? 내가 아기를 돌봐야 하는 상황은? 등록금도 없는데 아기에게 들어갈 돈은? 아기가 태어나도 누릴 수 없는 많은 것들과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 수많은 생각과 응어리가 뒤엉켜 폭포 같은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당황하신 엄마에게 너무 힘들다고, 그 아이도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낳지 않으면 안 되냐고 모진 말을 내뱉고 말았다.

고2 여름, 동생이 태어났고 엄마는 허리와 몸이 많이 약해져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셨다. 나의 할 일은 배가 되었고 공부에 집중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나마 작은 손이 내 손가락 하나를 꼭 쥘 때 그 따뜻함에 위로 받았다. 막내를 품에 안고 문제를 풀고, 한 손으로 유모차를 끌고 다른 한 손에는 단어장을 들며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갔다. 대학 원서 접수 기간, 수능의 쓴 고비를 마신 나에게 동생이 우편함에 있던 대학 책자를 보여주었다. ‘계원예술대학교’ 이름부터 디자인 전공학교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처음으로 나를 위한 기회가 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합격의 기쁨도 잠시, 턱없이 비싼 등록금과 디자인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는 높은 사양의 노트북, 심해지는 아빠의 합병증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급히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학자금대출을 알게 됐고 한국장학재단 사이트에 들어가 신청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국가장학금이라는 제도도 알게 되었고 다행히 2차 접수를 진행하고 있어 전액 장학금에 버금가는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꿈을 향한 왕관 무게를 함께 버텨줄 든든한 지지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반가웠고 고마웠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교 1학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나는 첫걸음을 내딛는 늦둥이 같았다. 처음 접해보는 것들과 씨름하며 매일 새벽 3, 4시가 되어 잠들고 5시에 일어나 동생의 아침밥을 준비해주고 학교로 향했다. 통학하는 지하철 안에서 가끔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넘어지기도 할 정도로 피곤했지만 꿈을 생각하며 포기할 수 없었다. 든든한 학자금 생활비대출이 있어 어학연수 대상자 선정과 관련된 영어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1학년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싱가폴에 다녀올 수 있었다. 끼니 때울 돈을 아껴 박물관, 미술관, 예술 거리를 돌아다녔다. 내가 아는 곳 말고도 훨씬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값진 경험이었다.

2학기, 또 한 번의 국가장학금을 받은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2학년 1학기, 전액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성적장학금과 국가장학금, 학자금대출로 마련된 소중한 시간 동안 무리 없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있었다. 한국장학재단 덕에 내가 웃는 시간이 많아져서인지, 동생의 재롱이 날로 늘어난 덕분인지 우리 가족의 화목함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에겐 또 하나의 작은 목표가 생겼다. ‘두 동생의 앞길을 값진 경험들로 채워줄 것.’ 4.39 학점을 받아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 조금씩 모아둔 아르바이트 급여를 막내와 우리 가족이 소소한 경험을 쌓는 데에 쓸 수 있었다. 동생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접어두지 않아도 되도록 사소한 것들부터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큰 경험을 하는 데 바탕이 되어 더 높은 꿈을 꿀 수 있도록 말이다.

‘가난’ ‘어려움’으로 알게 되었다. 작은 경험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 값진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그리고 그 경험들이 꿈꿨던 왕관으로 가는 무게를 버티고, 또 새로운 왕관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누군가 나처럼 자신을 위한 왕관을 찾았을 때 그 무게를 버틸 각오를 다져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그 버팀이 버거워질 때 누군가는 함께 들어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기에. 한국장학재단이 있기에. 나 역시 빛나는 왕관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했고, 두 동생 역시 각자의 왕관을 찾아 힘차게 달려가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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