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는 슬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고통을 부르고, 슬픔은 슬픔을 부르며, 미움은 미움을 부릅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을 부릅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반대로 기쁨은 기쁨을 부르고, 행복은 행복을 부릅니다. 마음의 DNA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따라서 삶이 그렇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생명공학 박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분이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냉동 보관해 두었다가, 그 사람이 눈이나 장기가 나빠지면 복제인간에게서 필요한 부분을 떼어 내어 그의 몸에 이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가 고장나면 부속품을 갈아 끼우듯이 말입니다.

인간 복제에 대해 그분이 제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단세포를 이루고, 그 세포가 두 개로 분열하고 다시 네 개로 분열합니다. 그처럼 2배수로 빠르게 분열해서 복잡한 구조를 지닌 인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포들이 같은 모습으로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나 코 등 각기 다른 형태를 이루는 것은, DNA의 지시를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포 속에는 핵이 있고 그 안에 DNA가 들어 있어서, 그 DNA가 세포들에게 “너는 코를 만들어라. 너는 눈을 만들어라. 너는 귀를 만들어라.”라고 지시하는 것입니다. 세포들이 분열하면서 DNA의 지시를 받아 머리도 되고 손도 되고 발도 되는 것입니다.

복제인간을 만드는 과정은, 먼저 난자 세포를 마구 흔든 후 뒤집으면 세포에서 핵이 빠져나온답니다. 그 다음에 복제할 사람의 세포에서 뽑아낸 핵을 그 세포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포가 새로 이식된 핵 속에 들어 있는 DNA의 지시를 받아서 분열하기 때문에, 복제할 사람과 똑같은 모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복제하고자 하는 사람과 같은 모양과 체질을 가진 ‘제2의 아무개’가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실제로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술은 다 갖추어졌지만 윤리적인 문제가 있어서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DNA는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DNA가 있어서 사람마다 각기 고유한 성격, 고유한 사고방식, 고유한 태도나 행동양식 등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이든 꼭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 있는 DNA를 뽑아낸 후 좋은 마음의 DNA를 이식하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 받아들인 DNA를 이미 가지고 사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쁨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DNA를 이식하면, 우리 마음에서 그러한 것들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좋지 않은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더럽고 추하고 가증스럽고 음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따라서 마치 짐승처럼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쁜 마음들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혹은, 삶이 이미 어느 정도 망가진 경우에도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젠 도박하지 말아야지!’
‘이젠 마약을 하지 말아야지!’
‘이젠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이젠 간음하지 말아야지!’
‘이젠 부모님을 공경해야지!’

이렇게 결심하고 각오하지만 대부분 곧 무너지고 맙니다. 형편없는 마음이나 모습을 고치려고 하지만 되는 것 같다가 안 됩니다. 마음의 DNA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DNA가 자신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려면 마음의 DNA를 바꾸어야 합니다. 좋은 마음의 DNA가 들어오면 새로 들어온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혜롭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평화롭게 되는 일이 펼쳐집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DNA를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열아홉 살에 거듭났습니다. 그 전까지 가장 괴로웠던 것이 마음에 소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기술학교에 다니는 것도, 공무원 시험을 치는 것도, 작은아버지가 사업하시던 일본으로 가는 것도 다 안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술하사관으로 입대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부러진 앞니 때문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1962년에 제 인생에는 실패뿐이었습니다. 생각 속에서는 언제나 잘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잘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제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늘 저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그 점수는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점수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 냉정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 나는 안 되는 인간이구나!’ 그동안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알았습니다.

잘살려고 했던 데에서만 실패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서,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하루가 시작되면 입을 다물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어느새 말을 하고 있고, 어김없이 어떤 일들을 그럴 듯하게 부풀려서 말했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라던 시절이라 친구들과 서리도 많이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 도둑질을 하게 되기에 친구들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저녁이 되면 마음이 허전해서 발걸음이 저절로 친구들이 모이는 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러고는 또 남의 것을 훔쳤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죄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점점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착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부정확한 내 생각을 따라가면 분명히 망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음에서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내 마음의 DNA가 빠져나간 것입니다. 빈 그 마음에 성경에 담겨 있는 새로운 마음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마음을 받아들이려면 자신의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DNA를 바꾸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자신이 잘났고 뛰어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마음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이질적이기 때문에 배척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마음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마음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원함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집니다.

이제, 자신의 마음이 형편없는 것을 발견해서 그 마음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마음의 DNA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게임에 중독되어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게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실패해서 여전히 게임에 빠져서 사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해보았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자신이 각오하고 최선을 다하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은 무너졌지만, 이제는 ‘나는 안 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만날 때 안 된다는 그 마음을 다시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 새로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인 새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의 DNA가 되어서 새로운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변화는 좋은 마음의 DNA를 받아들이는 데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의 DNA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마음을 누군가가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이 변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나눠주려고 합니다. 그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마음의 DNA 앞에서 ‘내 생각을 고집할 것인가, 내 생각을 버리고 새 마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변한 경우를 한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979년 겨울에 저는 대구에서 살고 있었는데, 대구와 가까운 영천에 있는 나환자촌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꼭 와야 합니다!”
“예, 가겠습니다.”
“안 오면 안 됩니다!”
“간다니까요.”
“사실은,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갖기로 해서 성도들이 즐거워하며 마음을 쏟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집회 일주일 전에 강사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바빠서 못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성도들이 ‘바쁘긴 뭐가 바빠? 우리가 문둥이라 더러워서 안 오는 거지! 문둥이들은 하나님 말씀 들을 자격도 없나?’라고 소리를 지르며 교회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만일 박 목사님까지 안 오면 우리 교회 성도들은 정말 크게 시험에 들 겁니다.”
“제가 약속할게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갈게요.”

그 목사님이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어느 음식점에서 커다란 팬에 갈비를 잔뜩 올려놓고 구웠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서 갈비는 구경도 못하고 그냥 제 옆구리 갈비만 만질 때였기에 갈비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안 봐야 할 광경을 보았습니다. 제 앞에 앉은 목사님이 기분이 좋아서 계속 말씀하는데, 입술이 약간 들려서 침이 갈비에 툭툭 떨어졌습니다. 그분도 나환자였기에 갈비 맛이 싹 달아났습니다. 그분이 더 먹으라고 자꾸 권해서, 침이 덜 떨어진 내 앞에 있는 갈비 몇 개를 뒤집어서 굽고 또 구워서 먹고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로 돌아오니까 한 목사님이 저를 보고 “목사님, 나환자촌에 가신다면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조심해야 한다며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나병에 걸려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삶은 달걀을 까서 먹으라고 주면서 먹는지 시험해 본대요. 그러면 잡수실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했습니다.

집회를 사흘 앞두고 새벽에 눈이 뜨여 생각에 잠겼습니다. ‘진짜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달걀을 까서 줄까? 그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거기 가면 잠은 어떻게 잘까? 같이 잘까, 따로 잘까? 밥은 같이 먹을까, 따로 먹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제가 살던 방에서 문만 열면 예배당이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에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환자의 집에 가셨는데, 내가 뭐라고 나환자촌에 가는 것을 주저하리요?’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이 들자 나환자를 꺼리는 마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어서 ‘나환자가 따로 있나? 나병에 걸리면 나도 나환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과 내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젠 나환자들과 입을 맞추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사흘 뒤에 나환자촌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분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후로도 나환자 분들과 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제가 전혀 거리낌 없이 지내니까 하루는 그분들이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한테만 사실대로 말하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뭘요?”
“목사님도 문둥이 맞죠?”

제가 웃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니었는데, 제 마음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자동차 엔진을 고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엔진을 고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차가 오래되면 엔진의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마모되어서 피스톤과 실린더 사이에 공간이 생겨 연료가 폭발한 힘이 그 사이로 새어나가 동력이 떨어지기에, 피스톤에 쇠를 붙이고 실린더를 거기에 딱 맞게 깎아서 공간을 없애는 작업을 합니다. 그것을 ‘엔진 보링’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차들은 그런 작업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쇠를 다루는 기술이 모자라서 쇠를 여물게 만들지 못해 실린더나 피스톤이 마모되었지만, 요즘은 쇠를 여물게 잘 만들기 때문에 차를 오래 타도 엔진이 마모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좋지 않은 쇠로 만든 엔진을 보링해서 사용하는 것보다 마모되지 않는 새 엔진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좋지 않은 마음을 조금씩 고쳐서 사는 것보다 마음 전체를 좋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인드교육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는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서 행복해지는 길을 아는데, 그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르쳐 주면 사람들이 변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행동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변화에서 행동을 바꾸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쁜 마음의 DNA를 가지고 있으면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마음이 계속 일어나고, 삶이 그렇게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마음의 DNA를 받아들이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좋은 마음이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쳐서 밝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이 잘났고 똑똑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습니다. 다른 생각, 다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잘못된 것을 경험하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마음을 받아들일 줄 압니다. 안 될 것 같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받아들여서 발을 내딛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주는 힘으로 걷게 됩니다. 좋지 않은 내 마음을 버리고 새 마음을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새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굉장히 신기합니다.

마음을 교체하면 새 마음이 기쁨을 만들고, 평안을 만들고, 행복을 만듭니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이나 삶이 망가진 이유도 아무 마음이나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좋지 않은 마음을 받아들여서 마음과 삶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선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버리고 새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 나 자신도 변하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DNA가 바뀌어서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이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서 밝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박옥수
국제청소년연합의 설립자이며 목사이다. 세계 최초로 마인드교육을 창시한 청소년 문제 전문가로 전 세계를 다니며 강연한다.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길, 곧 마음의 세계를 성경에서 찾은 그는 젊은이들에게 물질세계가 아닌 마음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나를 끌고가는 너는 누구냐>에 이어 <마음을 파는 백화점>을 냈고, 지난해엔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나>를 집필했다. 잠비아에서 마인드교육 교재로 사용하는 <나를 끌고가는 너는 누구냐>의 콘텐츠를 만화로 옮겨 올초에 <신기한 마음여행> 만화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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