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아이들은 내 마음에 다가와 사랑을 주었다. 나는 거기서 사람들과 마음 나누는 법을 배우고, 마음껏 사랑을 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도미니카에서의 1년, 이제 나는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

“다니엘라 선생님, 이거 드세요!!”

돈이 없어 잘 사먹을 수 없는 과자를 나에게 내미는 아이들. 한국어 무료교습 아카데미를 진행하면서 만난 도미니카 아이들의 첫 모습이다. ‘하나뿐인 과자를 왜 나한테 주지? 내가 뭐라고….’ 나는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이 낯설었다.

도미니카에 가서 제일 먼저 아카데미 수업을 진행했다. 낯선 나라에 와서 낯선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너무나 부족한 언어실력 탓에 아카데미 스케줄이 있는 토요일만 되면 나는 머리에 쥐가 났다. ‘이렇게 가르치면 아무리 무료라도 안 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 올 것 같았던 내 수업은 항상 어느 수업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실수를 할 때면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는 나에게 “괜찮아요, 선생님. 우린 선생님을 사랑해요”라고 해주며 아이들은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에 나는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족한 스페인어로 아이들에게 조금씩 내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눈에서 애정을 읽고 아이들이 웃으면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내 마음의 잠금장치를 풀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마음을 닫고 살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집에서 함께한 시간은 내가 친구들과 보낸 시간보다 적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데리고 온 배다른 큰언니가 있다. 나이 차이가 있는 큰언니는 내가 어렸을 때는 나를 무척 예뻐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언니는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나에게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과 밝게 놀고 있다가도 큰언니의 연락이 오면 표정이 어두워졌고 빨리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집 안과 밖에서 다르게 지내는 내 모습을 보면 스스로가 이중인격자처럼 느껴져서 괴로웠다. 학교에서 심리검사를 할 때면 분노, 우울, 짜증지수가 더 이상 높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나왔다.

수시로 학교 상담실에 불려가서 부모님께 꼭 말씀드리라는 당부를 들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큰언니와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상담실에 가고 싶지도, 걱정스런 눈빛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앞에서 괜찮은 척해야만 했고 내 슬픔, 어려움을 아무도 모르게 혼자 견뎌왔다.

그러던 중 남동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해 학생들의 학부모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엄마를 더욱 힘들게 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동생은 분노조절장애, 피해망상, 우울증 등의 병명을 받았고 그 원인은 큰언니였다. 그 후로 큰 언니는 동생을 조심스럽게 대했지만 이미 동생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병은 깊었다. 동생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외국계 기업에 취업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이런 어두운 가정환경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돈을 버는데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정형편은 변하지 않았고, 직장에서도 상사나 동료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되자 나는 모든 걸 멈추고 싶었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엄마 친구 분의 소개로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알게 됐다. 집에서 나가고 싶었던 나는 해외봉사를 결심하고 도미니카 공화국에 갔다.

웨슬린은 더 이상 처음 보았던 어두운 얼굴의 아이가 아니었다. 한국어 아카데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고 말하는 아이를 나는 꼭 껴안아 주었다.
웨슬린은 더 이상 처음 보았던 어두운 얼굴의 아이가 아니었다. 한국어 아카데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고 말하는 아이를 나는 꼭 껴안아 주었다.

사실 누군가 다가와주길 바랐던 것이다
도미니카에서 영어캠프를 하던 중, 어느 보호소를 방문했다. 그곳은 아동학대를 일삼는 부모로 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 었다.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부모는 감옥에서 형을 마치고 나온 뒤에도 재범률이 높기 때문에 아이들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도에서도 숨겨놓은 곳이다. 그 보호소에서 아카데미를 진행했다.

처음 그곳에서 아카데미를 한 날, 나는 보호소 아이들을 보며 도미니카에 처음 왔을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아무리 아이들을 향해 웃어도 아이들은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가족으로 인한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이들의 마음에 있을 상처가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그중에서 아카데미 시간에 산만하고 집중을 못하던 아이가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던 내 남동생 같았다. 아이는 “안녕?” 하는 내 인사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웨슬린이다. 나는 수업을 갈 때면 제일 먼저 웨슬린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고 웃으며 다가갔지만 그 아이는 항상 뒤돌아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웨슬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웨슬린은 아카데미 시간에 항상 말썽만 피우고 인사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그 아이가 조금씩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웨슬린은 겉으로는 말썽을 부리고 모나보였지만 사실 누군가가 다가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를 따라 웃는 웨슬린을 보면 너무 행복했다. 웨슬린은 어느덧 우리에게 먼저 인사하며 다가왔고 아카데미가 끝나고 돌아가는 우리를 마지막까지 배웅해주었다.

어느 날 웨슬린은 나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며 인사를 했다.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며 메일을 보내겠다고 메일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는 웨슬린은 더 이상 처음 보았던 어두운 얼굴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카데미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고 말하는 아이를 나는 꼭 껴안아 주었다. 서툰 스페인어로 한국어를 가르쳤을 때, 아이들이 나에게 “선생님, 괜찮아요, 우린 선생님을 사랑해요”라고 했던 말들이 나를 녹였던 것처럼 나도 “난 너희가 너무 좋아”라고 말했을 때 아이들이 행복해했다.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변화
한국에 돌아온 지 2주일, 우리 가족은 이제 서로를 마주보고 웃고 있다. 나의 변화만큼이나 우리 가족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둘째 언니는 가족들에게 마음을 닫아 2년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해외봉사를 가기 전 나는 둘째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해외봉사를 통해서 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도미니카에서 틈틈이 언니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한국에 돌아와서 언니에게 줬을 때, 가족들에게 안부도 묻지 않던 언니가 “밥 먹었어?”라고 내 안부를 물었다. 남동생에게도 도미니카에서 틈틈이 연락을 했는데, 동생의 병도 좋아졌다.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던 내가 이제는 먼저 가족들 안부를 묻게 됐고, 항상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가족들도 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대로 인사도 못하던 나에게 도미니카의 아이들은 서슴없이 내 마음에 다가와 사랑을 주었다. 덕분에 나는 거기서 웃음을 알게 됐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우고, 마음껏 사랑을 받았다.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도미니카에서의 1년, 이제 나는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

김도연
2017년 굿뉴스코 16기로 도미니카에 해외봉사를 다녀왔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때 더 큰 행복을 느낀 그녀는 제2의 고향인 도미니카로 다시 갈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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