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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목숨 걸고 그리는지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다만화계의 큰 스승 이두호 화백
정성미 기자 | 승인 2018.05.16 11:31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재미나게 표현한 만화 <머털도사>의 작가 이두호 화백은 우리나라 국보급 만화가이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면 '선생님' 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린다. 부천에 자리 잡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작업실을 찾아, 이 화백의 작품과 인생 속에 흐르는 스승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털도사>에 ‘제자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크게 되는 것’이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국보급 만화가가 되신 화백님 또한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구 남산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미술선생님이셨던 남무오 선생님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납니다. 전교생 사생대회를 했는데 제가 3천 명 중에 전교 1등을 했어요. 며칠 뒤에 담임선생님이 수업 마치고 청소시간에 아이들이 다 듣는 데서 “이두호는 오늘부터 청소하지 말고 책보 챙겨갖고 미술실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 일을 계기로 남무오 선생님께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종이와 물감이 정말 귀했어요. 국산 물감은 없고 일본에서 수입해 오던 때라, 보통 사람은 구경도 못하던 시대였어요. 선생님이 저에게 매일 종이와 물감도 내주시고 팔레트도 주시고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보라는 거예요. 꽃병도 그리고, 의자도 그리고, 밖에 나가서 나무도 그리고, 초가집도 그리고, 은행나무도 그리고…. 그림 그리는 것이 얼마나 재밌던지, 날마다 그림을 그렸어요. 선생님은 제 그림에 한 번도 덧칠을 하거나 손을 대신 적이 없어요. “구도는 이렇게 잡아야 한다” “수채화를 채색할 때는 멀리 있는 것부터 칠해라” 같이 말로만 설명해 주셨어요. 그렇게 원칙을 설명해 주시고선 “그런데 네가 먼저 칠하고 싶은 것부터 칠해도 괜찮아” 하고 자유롭게 연습하도록 해주셨어요. 그림을 그리다가 좀 지루해서 만화 같은 그림을 끼적여도 “하지 마라”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지켜봐 주셨어요.

한번은 제가 그린 ‘풍로’ 그림을 선생님이 미술대회에 출품하셨는데, 장려상을 탔으니 가보라는 거예요. 큰 전시장에 여러 작품들이 걸려 있는데 한쪽에 제가 그린 그림이 자그맣게 붙어 있더라고요. 대상을 받은 커다랗고 화려한 그림을 보니까 어찌나 부끄럽고 속상하던지, 잔뜩 실망해서 돌아왔어요. 선생님이 “가 봤나? 어떻드나?” “제 그림이 초라해서 속상했습니다.” “다른 그림은 다 선생님들이 손을 대준 기다. 니는 니가 다 그렸잖아. 계속 그렇게 그려 나가면 된다. 잘했다.” 그런 선생님의 격려를 받고 힘을 얻었어요. 그 뒤로도 선생님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으시고 제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다 지원해주셨습니다.

남무오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겠네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남무오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시고 화실을 차리셨어요. 워낙 약주를 좋아하셔서 술을 즐기던 이태백의 이름을 딴 ‘태백화실’이었죠. 저는 선생님 화실에 다니고 싶어서 일부러 야간중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16살 때, 만화를 그려서 책으로 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울의 큰 출판사에서 저를 서울로 데려가려고 대구까지 찾아오셨어요. 만화가로 키워주겠다고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니까 어머니가 “남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드노?”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러면 가지 마라는 거지” 해서 안 갔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가라마라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은 서울에서 찾아온 출판사 직원에게 “인생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두호는 아직 기본을 더 배워야 한다”고 하셨더라고요. 그때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커서야 선생님은 누구보다 저를 생각하시고 장래를 고민하셨는데, 직접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배려하신 것을 알았어요.

세월이 많이 지나 제가 서울로 올라온 뒤로는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나면서 자주 뵙진 못했어요. 그 사이 제가 잡지사에서 삽화도 그리고 만화도 그려서 이름이 나온 것을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이 아가 내 제자야!” 하면서 흐뭇해하셨다고 들었어요. 돌아가실 때 저를 그토록 보고 싶어 하면서도 사모님께 “두호에게 연락하지 마라” 하셨대요. 바쁜 사람 불편하게 할까봐 그러신 것이지요. 그분이 제게 베풀어주신 배려와 사랑은 정말…. 말로 다 못하겠어요.

이 화백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 듯, 이 화백은 사무실에 일찍 나왔다가 오후 4시면 퇴근을 서둔다.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으면 마주치는 후배나 학생들이 불편할까봐 일부러 피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미술선생님이 좋아서 그림을 시작했던 그는 당시 경쟁이 치열했던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합격했다.

<이두호의 한국사 수업>. 아직도 이 화백은 수작업을 고집한다. 그래서 한국적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궁궐 처마, 서민들의 옷매무새 등을 묘사하기 위해 공부하는데, 만화 <임꺽정>은 100종에 가까운 책을 참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만화가로 전향하셨나요?
형편상 미술학원에 다닐 수도 없고 데생연습을 할 석고상 하나도 사기 어려운 상황이라 대학진학을 바라지 않았는데, 친구에게 ‘대학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간다’ 하고는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응시해서 합격했습니다. 다방에서 구두도 닦고, 극장 간판도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에 환경미화판 만드는 것도 하면서 온갖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가 영장이 나와 군대에 갔는데, 밥도 주고 옷도 주는 게 얼마나 좋던지. 군생활을 잘 마치고 나왔는데 복학할 등록금이 없는 겁니다. 고민하다가 만화 30장을 그려서 신촌에 있는 출판사를 불쑥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저에게 조금 더 바탕을 닦고 책을 내면 좋겠다면서 만화가 한 분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시사만화가로, 중앙일보 편집국 고문으로 계시는 박기정 선생님이십니다.

그분의 화실에 찾아가서 그림을 보여드렸어요. 데생부터 시키시더라고요. 보통은 청소하고 선 지우는 것부터 하는데, 선생님이 제 실력을 잘 봐주신 거죠. 일년 남짓 했더니 등록금이 마련되었어요. 그런데 기한이 지나서 복학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잘됐다. 공부하기도 싫은데’ 하고는 학교를 그만뒀어요.

“다른 그림은 다 선생님들이 손을 대준기다. 니는 니가 다 그렸잖아. 계속 그렇게 그려 나가면 된다. 잘했다.” 선생님께 격려를 받고 힘을 얻었어요.

박기정 선생님께는 어떤 가르침을 받으셨나요?
그분은 만화 작업이라도 기교 부리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만화 한 컷을 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정확하게 그리라고 하셨어요. 저는 지금도 만화를 컴퓨터로 그리는 것보다는 손으로 일일이 선을 긋고 채색하는 것을 좋아해요.

한번은 제가 선생님께 큰 잘못을 했어요. 선생님이 그리신 책이 나왔는데 제가 잘못 관리해서 잃어버렸어요. 선생님께 실토하고 사죄를 했어요.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따라 나와!” 하셨어요. 그러고는 명동극장 옆에 있는 호프집에 데리고 가셨어요. 아무 말없이 술잔을 한 잔 두 잔 기울이다가 취하니까 제 입이 열리더라고요. “선생님, 두고 보이소. 제자 중에 괜찮은 놈 한 놈 나옵니다.” “그래? 그게 누군데?” 그래서 제가 큰소리를 쳤어요. “바로 앞에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셨겠습니다.
저도 제자들을 몇 년씩 데리고 가르치기도 했는데요, 가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렇게 같이 일하다가 헤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다시 보고 싶고 다시 쓰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그게 참 중요한 거다.” 이런 게 다 제가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배운 거죠. 인생에 있어서 만남이 정말 중요해요. 선생님들 좋으신 분들 만났지, 지금도 무슨 일 있으면 달려오는 친구들 있지, 저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이죠.

<머털도사>에는 머털이가 누더기 도사를 ‘도사님, 우리 도사님’ ‘스승님, 우리 스승님’이라고 살갑게 부르는 말이 곳곳에 나온다. 1984년에 잡지 <새벗>에 연재될 때 원작의 제목은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 이었다. 주인공인 머털이보다 스승인 도사님을 제목으로 삼은 데에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고 했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이 화백의 마음에 스승의 의미가 특별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84년에 발표한 <머털도사>의 원제는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으로, 스승과 제자의 신뢰 관계를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1989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인 54.9%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선생님이 되신 화백님은 어떤 선생님이신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특별히 해 준 게 없어요. 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런 얘기는 자주 했어요. “테크닉을 익히려면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24시간 같이 생활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을 잘 배우고 익힐 수 있다. 그러나 문하생은 자기 개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는 단순히 기교를 부리는 단거리 만화가가 아니고, 작품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개성이 중요하다. 학교에서는 여러 교수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다 듣고 판단은 너희가 해라. 남이 성공한 것을 따라가지 말고 자기만의 개성을 찾아가라. 예술에는 등수가 없다. 어디 가서 높은 등수를 받은 것을 나에게 자랑하지 말아라.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그림을 그려오는 것이 나는 더 좋다.” 그러다보니 저는 학생들 작품에 점수 매기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다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인데, 그걸 점수를 주고 등수를 정해야 하는 게 저로서는 정말 괴로운 작업이었죠.

학생들에게 꼭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즘은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려는 학생들보다, 사람들이 좋아할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저는 지금까지 만화를 하면서 독자들 눈치를 안 봤어요. 독자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성심껏 그렸는데 독자들도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제가 조선시대 그림만 그린다고 사람들이 ‘바지저고리 작가’라고 불러요. 제가 다 잘 그릴 순 없어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통적인 그림은 제대로 그리니까 그걸 좋게 평가해주시는 거죠. 아무리 현대물을 잘한다고 해도 우리는 한국 작가들입니다. 저는 학생들이 한국의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제대로 그려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국민속촌에 데리고 가서 기와집이나 초가집 등 전통가옥을 찍어서 사실묘사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도 학생에게 한복을 입혀서 모델을 세우고 자세히 살펴보게 합니다. 실물을 보며 그리면 쉽게 안 잊어버리거든요. 옷고름이 어느 방향인지, 어떻게 여미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국 작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 구미에 맞는 그림만 그리면 반짝하고 뜰 수는 있지만 반짝하고 사라집니다. 프랑스나 일본은 아직도 수작업 만화가 많고 전통을 지켜가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우리는 변화를 추구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쉽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모든 부분에 기본부터 가르치고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림을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어른을 심어주는 겁니다. 학교에서는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도 꼭 인사를 하도록 가르칩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허용하지만, 어른이 지나갈 때는 끄거나 뒤로 숨기라고 하지요.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을 때는 내가 가차없이 용서 않겠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만화를 하면서 독자들 눈치를 안 봤어요. 독자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성심껏 그렸더니독자들도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여름방학 때마다 열리는 ‘만화지옥캠프’는 어떤 프로그램인지 궁금합니다.
1997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만화 작업이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목숨 걸고 만화를 그릴 학생들에게 어떻게 목숨을 거는지 알려주기 위해 만화캠프를 시작했어요. 방학 한 다음 날부터 6박 7일 동안 외진 곳에 허름한 숙소를 빌려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게 했어요. 저도 연재 중이던 그림을 가져가 작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보여주고요.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11시간 동안 만화에 몰두하는 거예요. 학생들이 처음엔 좋다고 왔다가 텔레비전도 없지요, 술도 못 마시게 하지요, 화장실은 엉망이지요, 샤워실도 없지요, 모기는 들끓지요…, 그때 참가한 학생 중에 하일권(웹툰 작가)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아, 지옥 같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아침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 어떻게 그리는지 보고, 제 작업실에도 와서 어떤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도 배우면서 많은 힘이 되었다고 해요. 캠프를 마치고 완성한 작품을 모아서 책을 냈다고 가져왔는데, 책 이름이 <지옥캠프>더라고요. 지금은 이현세 교수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하는데, 최근에는 네이버와 함께 9박 10일 동안 열고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 캠프는 ‘만화가 아니면 할 일이 없다, 만화에 목숨을 건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지금도 제자들을 만나면 지옥캠프 얘기를 많이 합니다. 이번 여름에도 그림 그릴 것 챙겨서 그 캠프에 가야 돼요.

2001년에 시작하여 17회에 이른 일명 '지옥캠프'. 만화 문하생들에게 목숨 걸고 만화를 그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시작한 캠프다. 위의 사진은 초기에 열렸던 지옥캠프의 모습이다. 2011년부터는 지옥캠프에서 만들어진 단편선들을 네이버에 연재하고 있다. 올해도 6월 말 캠프가 열릴 예정이다.

교권이 무너지고 지식교육이 한계에 이른 요즘, 참된 사제동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학생들이 일찍부터 그림을 시작해서 그런지 테크닉이나 지식은 정말 대단한 경지입니다. 더 가르쳐줄 게 없을 정도로요. 간혹 쉽고 편한 길로 가려고 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건 아닌데’ 싶지만 ‘가라, 마라’ 하지 않고 제자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 길이 좋은 길인지 아닌지는 조금 가보면 본인이 느낄 거니까, 제 스승님들이 제게 그러하셨듯, 저도 그걸 본인이 느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같이 가주기도 해야겠지요. 같이 살아가면서 학생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진정한 사제동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문과 지식을 가르쳐주는 교사는 많지만, 사리를 분별하여 이끌어 주는 스승은 흔치 않은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의 뜻을 존중하고 그들의 인생을 사랑하는 이 화백에게서 누더기도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 반갑다. 독일의 실존주의 교육학자 볼노오는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고 했다. 이 화백도 인터뷰 내내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강조하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미소 지었다. 독자 팬으로서 몇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취재진도 그의 묵직한 가르침에 마음으로는 이미 그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이두호
1943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했다. 열여섯 살에 만화 <피리를 불어라>로 데뷔하고 60년 째 바지저고리 만화에 매진하여 <머털도사> <임꺽정> <객주> 등을 발표했다.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 세종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는 등 한국의 국보급 만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성미 기자  jungs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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