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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노랫소리2018 제2회 투머로우 마인드 에세이 콘테스트 '마음쓰기' 수상작
백이슬 | 승인 2018.05.03 12:00

그날의 노랫소리
차상 백이슬

그해 가을, 나는 미국 뉴욕에 위치한 음악원 연습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음악을 전공한 나에게 연습실은 집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연습실 공기가 겨울바람보다 차가웠다. 한참 연습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왼손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져서 연습을 중단했다. 혼자 있던 연습실에서 누군가 내 왼손을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순간 너무 당황했지만 얼른 다시 악기를 잡았고, 연습을 시도하다가 결국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악기를 무릎에 내려놓고 앉아 왼손을 품 안에 넣고 한참동안 악기를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냥 조금 무리한건지도 몰라.’

하지만 이 당황스러운 통증은 야속하게도 더 잦아져서 결국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점점 괜찮아질 거라 믿었던 손의 통증도 더욱 심해져갔다. 원인은 ‘염증’이었다. 의사는 염증이 큰 병은 아니지만 완치가 어렵기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했다. 내가 삶에서 ‘가야 할 길’이 송두리째 뽑히는 기분이었다.

내 삶과 함께했던 음악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고, 내 세상은 빛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죽을병에 걸리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할 만큼 나에게 있어서 음악은 전부였다.

‘너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연주를 할 때 살아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루하루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라도 할 것 같이 숨이 막혔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염증의 크기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치료를 받았다. 전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연습을 했는데, 염증이 생긴 이후부터는 하루 30분 악기를 잡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그냥 음악을 포기하거나 내가 처한 상황을 회피했다가는 이 절망이 더 커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반갑고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게는 어렸을 적부터 나를 지도해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선생님은 내게 해외로 나가 아이들을 가르쳐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도미니카 공화국이라는 나라로 떠났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정수리를 뚫고 들어오는 따가운 태양빛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중에서야 도미니카 공화국이 ‘중남미의 아프리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에 보이는 구두닦이 소년, 위험한 차도 위에 서서 구걸하는 소년소녀들, 맨발로 삐쩍 마른 소를 모는 아이. 딱 봐도 학교에 갈 나이인 아이들이 모두 세상에 서 있었다. 그렇게 내게 충격적인 첫인상을 안겨준 이 나라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도미니카의 열악한 경제나 교육 수준은 내가 받은 첫인상보다 좀 더 충격적이었지만 아이들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맑았다. 도미니카에서 생활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공립학교로 ‘찾아가는 음악회(음악을 접하기 힘든 아이들에게 직접 찾아가 연주를 해주는 프로그램)’를 열었다. 이곳에선 아시아인이라면 당연히 중국 사람인 줄 알고, 치나China(스페인어로 중국 여자)라고 장난치며 부른다. 내가 방문한 공립학교는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유독 나를 신기해하고 반가워했다. 나를 줄지어 따라오는 아이들은 한마디라도 더 걸어보려고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새카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느 샌가 나도 같이 웃고 있었다.

공연시간이 다가와 나는 연주를 준비했다. 악기를 오래 전공했지만 염증이 생긴 후에는 연습도, 연주도 많이 할 수 없었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대 위에서 하는 연주를 참 좋아했는데 이제는 무대 위에 서면 곧 죽을 사람처럼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면서 벌벌 떠는 겁쟁이가 돼버렸다. 이날도 어김없이 ‘정신 나간 사람마냥 벌벌 떨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됐다. 관객석에는 약 50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연주는 시작해야 했다. 연주를 하는 내내 나는 벌벌 떨었고, 연주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들이 “오뜨라, 오뜨라(앵콜 앵콜)!”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앵콜곡으로 나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생각했다. 연주를 시작 하려는 순간 왼손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바이올린을 놓칠 뻔했다가 다시 바이올린을 꽉 쥐었다. 정말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그 짧은 15초 동안 내 머리 속에선 천만 가지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500명 넘는 사람들로 꽉 찬 강당 맨 뒤편에서 어떤 백발의 할아버지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도입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할아버지의 노랫소리는 뜨거운 공기로 가득한 강당 허공을 가로질러 나에게 용기를 전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선생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손에 꽉 쥐고 있던 바이올린이 저절로 올라왔고, 뭔가에 홀린 듯 연주가 시작됐다. 그리고 연주를 하는 내내 전혀 떨리지 않았다. 너무 벅찼고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가슴으로 울었다. 연주를 할때마다 통증은 내게 걸림돌이었다. 혼자 힘으론 절대 연주할 수 없던 순간마다 나는 포기했다. 그런데 이날 연주는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다줄 만큼 내게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그날의 노랫소리가 가져다 준 용기는 아직까지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수상소감
먼저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대중에게 글을 공개하기는 처음인데요, 결과가 지나치게 좋아 앞으로 글 쓰는 부분에 더 좋은 엔진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응모한 ‘그날의 노랫소리’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될 만큼,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적은 글입니다. 음악가로 살아야 하는 인생에 연주가 걸림돌이 된다는 건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인데요,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없었던 고통을 아이티 사람들이 불어넣어 준 용기로 넘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예상치 못한 큰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때 혼자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 나보다 더 큰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본다면,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백이슬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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