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크리스텐 씨가 한국으로 봉사 온 지 1년이 됐다. 유독 한국 문화를 좋아했던 그가 한국으로 봉사 와서 영어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스승의 날을 맞아 학생들이 카네이션으로 그를 축하했다. “선희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전의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의 수업시간.

“Can you understand?!!”
“선생님, 모르겠어요.”
“영어 좀 써. 잉글리시 클래스잖아!!”

학생들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영어회화 선생님은 결국 한국어를 내뱉었다. 영어로 여러 번, 그리고 한국어로 떠듬떠듬 설명하고 나서야 학생 한 명이 알아들었고 이를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영어능력 순으로 나눈 그룹 중에 가장 초급에 해당하는 레벨1 수업의 모습이다. 크리스텐은 이 수업을 전담하고 있으며, 교실에서 가장 큰 소리로 가장 많은 말을 하고 동작을 하지만 가장 지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영어를 어려워하는 학생이라도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받다 보면 조금씩 영어로 말을 꺼내게 되고 즐기게 된다.

이렇게 한 학교의 원어민 선생님이면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는 이곳에서 봉사 중이었다.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미국에서 태어나 언어학을 전공한 그가, 세계 경제순위 15위 안에 드는 국가인 한국으로 봉사하러 왔고 ‘김선희’라는 친근한 한국이름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호기심 많은 소녀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자란 크리스텐은 누구보다도 호기심 많고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하는 소녀였다. 책을 좋아해서 책벌레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가 성적이 좋은 학생은 아니었어요. 굉장히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쳐서, 책을 읽지 않을 때는 정해진 시간동안 가만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소풍을 가거나 견학을 하는 활동적인 수업을 좋아했고 방과 후에는 치어리딩, 체육, 덤블링, 댄스 등 여러 가지를 즐겼어요.”

그리고 그가 흥미를 가졌던 것은 다른 국가의 문화였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미국 사회에서 그에게 다문화는 낯선 일이 아니었고 초등학생 때부터 재미로 외국어를 배우곤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그의 배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줄어들지 않았고 외국인 교환학생 동아리와 언어연구 클럽, 봉사활동까지 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생 영어캠프에서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 아이들보다 선생님이 더 신나보인다.
초등학생 영어캠프에서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 아이들보다 선생님이 더 신나보인다.

파파걸의 슬픔
그가 그렇게 활발하게 사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족구성원을 물었을 때 자신에게 7명의 동생이 있다고 소개했다.

“제가 저희 남매 중에 가장 맏이예요. 제 밑으로 카일리, 키에라, 킨달, 칼린, 캄론, 미셸, 미아 이렇게 모두 2남 6녀예요. 이렇게 동생이 많은 이유는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각각 재혼하셨기 때문이에요. 10살 때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파파걸이었던 저에게 아주 큰 상처가 됐어요. 저는 아빠를 정말 사랑했거든요. 지금은 아버지쪽, 어머니쪽 가족들과 모두 잘 지내고 순수 멕시코 인이신 새어머니와도 재미있게 지내지만, 아버지가 저를 버리고 떠났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생이 돼서도 항상 제 마음은 외롭고 슬펐어요.”

아버지에게 사랑 받지 못했다는 슬픔에 마음이 늘 허전하고 외로웠다. 때문에 자신의 만족을 채워줄 다양한 호기심거리들을 찾은 것이다.

미친 듯이 책 속에 빠져들기도 하고, 지칠 때까지 운동하고 춤도 춰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어봤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더욱 더 감동시키고 즐겁게 할 만한 것을 찾았다.

아이티 영어캠프에서 만난 귀여운 아이들.
아이티 영어캠프에서 만난 귀여운 아이들.

나는 슬픈 사람이 아니야
2014년 가을, 그는 대학 캠퍼스에서 ‘크리스마스 칸타타 자원봉사자 모집’ 전단지를 받았다. 한국에서 설립된 국제청소년연합 산하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봉사자로 일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크리스텐은 주저 없이 봉사자로 신청했고,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한국에서 온 합창단의 노래는 굉장히 감동적이었고 관람객에게 정말 큰 기쁨을 선물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전해진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던 이야기를 듣고 제 마음이 무척 따뜻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단체의 봉사활동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멕시코로 가서 영어캠프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며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이티로 가서 영어캠프를 진행했다.

“그곳에서 한없이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을 봤어요. 아이들 중에는 지진으로 부모님이나 형제를 잃거나 잘 곳도 제대로 없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자신들의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가 영어를 가르쳐주러 와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아이들보다 더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했거든요. 그저 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슬픔 하나에 빠져서 그곳에서 헤어나오려고 노력했었어요.”

아이티에서 시간은 그에게 많은 것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했다. 자신이 그동안 불행했던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딸을 사랑하고 있으며 새로 생긴 가족들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자신은 어느새 행복한 사람이 돼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크리스텐은 이와 같은 마음의 변화를 더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1년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한국으로 봉사 가기로 결정했다.

대안학교의 회화수업 중인 모습.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선희 선생님을 따라하면 어느새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 쑥쑥 일어난다.
대안학교의 회화수업 중인 모습.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선희 선생님을 따라하면 어느새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 쑥쑥 일어난다.

한국에서 봉사하다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한국 친구 덕분에 크리스텐에게 한국은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대학생이 돼서 접했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을 보고난 후에는 아름다운 한복과 궁전에 매료되어 한국 역사까지 공부했었다. 이후 국제청소년연합의 한국인 봉사자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한국어도 제법 익혔고 2016년에 한국에 한 번 다녀오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에서 1년은 전혀 특별할 것 같지 않았다.

“제 예상은 빗나갔어요. 한국이 얼마나 단일민족성이 강한 나라인지, 말 그대로 한국인들만 99% 이상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식사 중에 장난으로 저를 툭툭 치거나 제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신기하다고 마구 만지는 사람들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죠. 하지만 한국 사람들만의 따뜻한 정과 문화 덕분에 한국을 향한 제 사랑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특히 한국 과일은 무척 맛있어요. 배는 정말 달아서 노란 사과라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는데, 명절에 주로 먹는 비싼 과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의 봉사활동은 주로 영어공부에 힘들어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회화수업을 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개최되는 영어캠프 교사로 가고, 주부들을 위한 영어수업, 직장인 주부를 위한 주말수업, 대안학교 학생들 회화수업, 대학교에서 영어클럽 등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선생님이 된다. 영어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들이 쉽게 다가와서 말을 걸고 친구가 됐으며, ‘김선희’라는 이름도 생겼다. 사람들이 크리스텐을 잘 기억하지 못해 ‘써니텐’이라는 별명이 생겼는데 그 이름이 순수 한국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면서 무언가 조금씩 할 수 있는 용기를 찾는 모습을 볼 때 가르치는 저도 무척 행복해져요."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면서 무언가 조금씩 할 수 있는 용기를 찾는 모습을 볼 때 가르치는 저도 무척 행복해져요."

다시 한국으로 오고 싶어요
대안학교의 고등학생 회화수업을 처음 맡았을 때는 자신이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하고 긴장도 했지만 이제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도 배우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영어를 배우고 있고 또 영어를 말했을 때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느껴요. 영어캠프에서 어린 아이들이 ‘Hi’라고 말할 수 있었을 때 무척 즐거워하고 영어에 자신감을 얻더라고요. 그리고 대안학교에서 수업 첫날에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는데 한 학생이 ‘왜 영어를 배우고 싶냐’라는 질문에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서’라고 적었어요. 그 학생은 정말 정말 조용한 아이였거든요. 그런데 교실 앞까지 나와서 영어로 말하려고 노력하더라고요.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면서 무언가 조금씩 할 수 있는 용기를 찾는 모습을 볼 때 가르치는 저도 무척 행복해져요.

제가 좋아하는 은사님은 미세스 마틴이라는 여선생님이에요.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보고 학생 스스로 할 수 없는 수준 이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밀어붙이셨어요. 무엇이든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배울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셨죠. 저도 그분처럼 가르치고 싶어요. 학생들의 개인적인 성향과 특성을 연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도울 거예요.”

작년 5월에 한국에 오고 나서 이제 1년이 지났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또 다시 한국에 올 거라고. 계속해서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의 좋은 책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생들 사이에 껴서 한문도 배웠다던 크리스텐, 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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