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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오스카 모네, 살아있는 빛을 그린 화가"베껴야 한다면 가장 위대한 것을 베껴야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이가희 기자 | 승인 2018.04.19 13:59
1872년작, <인상, 해돋이Impression-Sunrise>

캐리커처 초상화를 그리다
1840년 프랑스 태생인 클로드 오스카 모네는 15살부터 사람들의 얼굴의 특징을 잡아 그리는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모네의 아버지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모네는 캐리커처 그림을 팔아 용돈을 벌기로 했다. 모네는 그림에 직접 사인을 해서 화구상, 문방구 등에 팔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들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주변 사람들의 주문이 밀려 들어왔고 당시 유명한 연극 배우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면서 그는 그림 한 장에 20프랑을 받았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다.

그는 한 미술 재료상의 진열장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했는데 그곳에서 외젠 부댕이라는 풍경 화가를 알게 되었다. 모네는 별볼일없어 보이는 부댕의 풍경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부댕의 그림이 자신의 그림 옆에 걸려있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부댕은 모네의 그림을 보며 짧은 순간에 사람들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묘사하는 그의 즉흥성, 신속함에 큰 감명을 받았다. 부댕은 모네를 만나고 싶어했지만 모네는 번번히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부댕은 자신을 무시하는 어린 화가인 모네에게 계속 다가갔고 결국 모네는 그의 진심에 마음을 열고 부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외광外光 회화를 해보라고 권했다. 모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야외에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연의 ‘빛’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고, 자연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는 위대해질 것이다”
19세기 초 까지만 해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풍경화를 저급한 장르로 여겼다. 하지만 부댕을 만나 외광 회화에 눈을 뜬 모네는 자연속의 빛을 그려내는 데에 심취해 야외에서만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붓을 빠르게 놀려 그림을 그렸다. 당시에는 그런 화풍이 생소했고 꼭 덜 그린 그림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모네의 풍경화는 잘 팔리지 않았고 돈이 없어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결혼한 후에는 형편이 더 어려워졌고 밥을 굶기 일쑤였다. 하지만 모네는 매일 10시간 이상 밖에서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모네의 그림을 사고 싶어도 수 억 달러를 호가하는 그의 작품을 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 모네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가난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모네는 ‘나는 위대해질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신념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첫인상First Impression, 인상주의의 시작
1872년 어느 날 아침, 모네는 르 아브르 항구의 해돋이 광경을 그렸다. 마치 눈을 지긋이 감고 그린 듯 해가 돋는 찰나의 순간을 재빠르게 그려냈다. 그리고 1874년 4월의 봄, 모네와 친구들은 파리의 카퓌신 거리에 위치한 사진사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단체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5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 중에는 1872년 아침에 그린 그림 <해돋이>도 있었다. 전시회 목록 담당자는 제목이 평범하다며 모네에게 다시 써줄 것을 요구했고 그는 앞에 ‘인상’이라는 말을 붙여 ‘인상, 해돋이Impression-Sunrise’ 라고 바꿔 다시 제출했다.

당시에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매일 8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반면 모네와 친구들의 전시회에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에는 54명만이 방문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전시작품들을 비웃었고 ‘이들은 붓질조차 서투른 아마추어’라며 비난했다.

특히 ‘르 샤리바리’의 예술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인상주의자들의 전람회’ 라는 머리기사를 붙이고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벽지문양의 밑그림만도 못한 막연한 인상에 불과하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루이 르루아의 기사가 실리고 며칠 후 평론가 가스타냐리는 “만약 그들의 의도를 한마디로 묘사한다면 인상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풍경 속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을 그리려 한다는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들이다.”라며 호평했다.

비록 처음에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는 인상주의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고 르루아가 모네의 그림을 비난하며 쓰인 이 말이 결국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름이 된 것이다.

인상주의는 모네의 빛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세기 초반까지 물감을 돼지방광이나 유리병에 담아서 써야했기 때문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1841년 튜브 물감이 생기면서 장소의 제약이 없어졌고, 또 사진기가 발명된 후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회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모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첫 번째 전시회는 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90 ‘여름 끝자락, 저녁’
‘오전의 건초더미, 눈의 효과’
1890 ‘여름 끝자락, 아침’
‘해질녘의 건초더미, 서리 내린 날씨’

‘연작의 아버지’
모네의 그림의 주인공은 늘 ‘빛’이었다. 그는 빛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의 순간순간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재빨리 붓을 놀리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 빛에 의해 변하는 순간들을 캔버스에 기록했다. 그는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기보다 자신의 두 아내와 아이들, 그가 머문 장소 등 평범한 것들을 소재로 삼았다.

또 그는 같은 소재를 연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제작 기법을 만들었다. 그는 1884년부터 1890년까지 ‘건초더미’ 연작시리즈를 제작했다. 사물은 동일하지만 단 한 장도 똑같은 그림이 없었다. 새벽녘 동이 트기 시작할 때, 한낮에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저녁 무렵 해가 어둑해질 무렵…. 다양한 시간대에서 건초더미를 관찰하면서 빛의 명암과 색채를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얼마나 빠져들었던지 그는 1초 사이에 변하는 빛의 색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 종일 빛을 보면서 작업하느라 그의 시력은 크게 손상되어 백내장에 걸렸고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붓을 놓지 않고 자신의 집 연못에서 ‘수련’ 연작을 제작했다. 그 수는 무려 250여 점에 이른다.

모네는 ‘베껴야 한다면 가장 위대한 것을 베껴야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화려한 소재를 찾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모네는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고, 늘 존재하기 때문에 하찮게 여기기 쉬운 자연풍경 속에 숨겨진 보화, ‘빛’의 위대한 세계를 발견한 화가였다. 평생 동안 끊임없이 위대한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는 동안 그는 저절로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빛’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가희 기자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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