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나라 제12편

신드바드가 보물을 찾아 떠난 ‘세렌디브 섬’, 태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물방울 모양의 섬, 인도양의 진주이자 인도양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스리랑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숨어있는 다섯 가지의 보물을 찾으러 떠나보자!

실론티 홍차
실론티의 나라, 스리랑카
가끔 ‘홍차의 꿈 실론티’ 캔 음료수를 즐겨마시곤 했는데 이 실론티의 나라가 바로 내가 지내는 스리랑카였다. 실론은 1972년까지 스리랑카의 옛 이름으로, 실론티는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홍차를 통칭한다. 전 세계 소비되는 차 중 75%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홍차 수출국이며 최고의 홍차 생산국으로 꼽힌다. 세계 3대 홍차인 우바를 비롯해 딜마, 믈레즈나, 베질루르 모두 스리랑카의 대표적 티 브랜드이다.

실론 섬은 원래 커피를 재배했으나 1869년 이후 병충해로 커피농장이 전멸하였다. 당시 스리랑카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대대적으로 스리랑카 내륙 산간지역에 차를 심었고 병충해를 잘 이겨냈다. 기후와 지형도 한몫차지한다. 적도와 가까워 전형적인 열대기후에 속해 수분이 충분하고 해발 1,000~2,000미터의 고산지대는 실론티의 터전이 되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립톤의 창업주 토마스 립톤은 스코트랜드 출신으로, 스리랑카에 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와 차맛에 푹 빠졌다. 그곳에서 차 재배지를 구입해 차 무역을 했는데, 그의 소유지에서 재배된 것이 1890년 브랜드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출시되는 홍차라인 립톤 옐로우 라벨이다. 1892년에 배합과 포장을 위해 공장을 건설했으며 ‘차농장에서 찻주전자까지’라는 그의 슬로건은 매우 유명하였다.

립톤홍차는 당시 중국차와 일본 녹차만 있던 미국에서도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홍차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저렴하고 간편한 패키지로 된 립톤 홍차는 영국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유럽 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스리랑카 중부의 산간 마을 하푸탈레에는 립톤 경이 의자를 놓고 앉아서 차밭 풍경을 감상했다는 ‘립톤 시트Lipton Seat’가 있는데, 이곳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환상적인 스리랑카의 기차여행
‘인도양의 눈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리랑카는 영국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50’ 중 하나다.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이라고 극찬했으며 천혜의 자연경관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풍부한 고대 유적도 볼 수 있다. 또한 서핑, 스노클링, 하이킹, 사파리, 고래관광, 코끼리 공원, 폭포 등 지역마다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과 엑티비티 스포츠들이 많아 전 세계인들이 많이 찾는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건 기차 여행이다. 스리랑카 기차여행을 해본 사람들 대부분은 스리랑카를 기차여행의 파라다이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기차는 초원, 폭포, 계곡, 마을, 그리고 끝없는 차밭을 통과해 달리는데, 보통 여행객들은 창밖 광경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이 철도는 19세기 중반 영국 식민지 시절에 고산지대에서 수도 콜롬보까지 차와 커피를 실어 나르기 위해 놓였다. 기찻길을 따라 실론 왕조 최후의 수도 캔디Kandy, 작은 영국이라 불리는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 배낭 여행자에게 사랑받는 엘라Ella 등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홍차로 유명한 도시들을 통과한다. 지금도 운행하는 이 구간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코스이다. 스리랑카 기차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환상적인 풍경을 여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편안한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스리랑카 기차여행을 적극 추천한다.

스리랑카의 역사
오랜 식민지 이후 눈부신 독립
스리랑카의 역사는 북부 인도의 아리안계 민족 유입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543년 인도 아리안계의 왕자의 자손인 윈자야 왕자가 북인도에서 700명의 싱할리인을 거느리고 와서 원주민 벳다를 정복하고 최초의 왕조를 세운다.

1505년 포르투갈인이 들어와 연안지대를 차지해 육계肉桂 무역 등에 종사하며 유럽 문명을 스리랑카에 정착시켰다. 1640년 무렵에는 네덜란드인이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총독을 두어 식민지 경영을 시작한다. 1796년에는 영국이 싱할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화했다. 영국인은 산지를 개척해 커피농장을 개척하다가 병해에 괴멸하자 품종을 홍차로 전환했다. 20세기에 들어서 고무, 코코넛 나무 농장을 시작했고 단일재배 경제의 기반을 구축했다. 스리랑카는 영국 통치하에서 점진적으로 정치적 자치를 획득해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자 인도, 파키스탄의 독립과 함께 1948년 2월 4일 영국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450년 간 계속된 식민지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1972년 5월 22일 신헌법 제정에 의해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 (눈부시게 빛나고 아름다운 땅)로 변경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들어왔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불교국가라고 불릴만큼 불교의 영향력이 크다. 정부청사, 대학교, 도심의 거리 어디든지 승복을 입은 승려들을 쉽게 볼수 있다. 중요한 불교의식 으로 포야가 있는데 매월 음력 보름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금욕과 참회를 한다. 이날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마트에서도 고기를 살 수 없다. 특히 5월 베삭 포야 데이는 부처의 탄생, 득도, 열반을 기념하는 날로 일주일에 걸치는 이 축제기간 동안 거리에서는 한두 시간 줄을 서 공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

해산물의 천국
풍부한 해산물 잡기 놀이
스리랑카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풍부한 해산물을 절대 빠뜨릴 수 없다! 사면이 바다인 스리랑카는 그야말로 해산물 천국이다. 새벽 수산시장에 가면 그날 잡은 싱싱한 참치에서부터 크레이 피시(가재), 꽃게, 새우, 굴뿐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돈 주고도 사먹기 힘든 생참치회를 아주 싼 값에 먹을 수 있다. 한번씩 방문하시는 한국분들에게 그날 잡은 신선한 생 참치회와 크레이 피쉬, 꽃게 등을 대접하면 최고의 대접이 된다.

작년 9월 한국에서 온 친구와 봉사단 10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우리 집에서 5분만 걸어가면 바로 바닷가가 있어서 해질녘에 함께 바닷가에 가서 바람도 쐬고 해수욕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친구가 백사장에 손을 집어 넣었는데, 한국에서 즐겨먹던 바지락이 5개나 걸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너 나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손을 넣어 바지락을 캐기 시작했다.

30분쯤 흘렀을까? 1주일은 먹고도 남을 만큼의 바지락이 나왔다. 알고 보니, 스리랑카 사람들은 조개를 먹지 않아, 백사장이 엄청난 조개밭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린 심심할 때마다 운동할 겸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바닷가로 가서, 바지락을 캤다. 얼마나 많은지 그냥 손만 넣어 잡았는데, 한국에 있을 때 갯벌에 가서 기구로 바지락을 캤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바지락을 얻었다.

밤에는 손전등을 들고 바닷가에 나가면 백사장을 뛰어다니는 엄청난 수의 꽃게 떼를 볼 수 있다. 스리랑카 꽃게는 속도가 빠르다. 현지 친구들은 그물로 잡지만 그물이 없던 우리는 빨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잽싸게 낚아채곤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
스리랑카 사람들의 순수한 매력
스리랑카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을 꼽으라고 하면 순수하고 겸비한 마음과 지혜를 가진 스리랑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번은 내가 콜롬보에 살았을 적에 옆집에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배를 타고 나갔다 들어온 날 양손에 다금바리, 문어, 성게 등 이름 모를 물고기들을 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 어리둥절한 난 “얼마예요?”라고 물어봤고 그는 씩 웃으며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가 기쁘면 나도 기뻐요” 하며 나에게 잡아 온 해산물을 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우리도 한국 음식을 만들어 그의 집에 가져다 주곤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전쟁의 아픔을 딛고 반세기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오른 대한민국이 자기들의 롤 모델이라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 사람 아니세요?’라고 유창한 한국말로 말을 거는 스리랑카인들이 있다. 이들은 3~5년간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인데 다들 한국에 대해 고맙게 여긴다

(현재 한국에는 약 3만 여 명의 스리랑카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그럴 때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애국심이 생긴다. 스리랑카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들이 이렇게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게 된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리랑카는 450년 동안 받은 식민지 지배, 싱할라족 스리랑카 정부군과 소수 타밀족(힌두),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반군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 2004년 많은 사상자를 낸 인도양 쓰나미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한국전쟁 직후 지하자원도 없는 남한의 작은 땅에서 지독한 겨울의 추위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들이 온몸을 던져 배우고 일했던 우리 역사가 생각났다. 한국과 비슷한 아픔을 겪은 스리랑카는 그 고난을 딛고 성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듣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게 아닐까? 그래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스리랑카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
스리랑카의 아픔 치유하기
스리랑카는 사회민주주의로 모든 교육이 무상이다. 그래서 문맹률이 아주 낮다. 전에 인도에서 거주할 때 만난 삼륜차 운전사들은 거의 영어를 못했는데 스리랑카 삼륜차 운전사들은 영어를 무척 잘하는 걸 보고 놀랐다. 이런 현상은 복지와 분배 지향 사회주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들어가는 인원은 10퍼센트도 안된다. 90퍼센트 넘는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좌절하고 쉽게 인생을 비관한다고 한다. 실제로 대학교 및 대학원을 나오지 않는 사람의 한 달 수입은 10~20만원 정도이고 실업, 빈곤, 높은 부채 부담에 시달린다.

작년 한국에서 개최한 세계장관포럼에 참석한 스리랑카 국회의원 겸 교육부 정무 장관은 마인드교육을 통해 변화된 한국 청소년들을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스리랑카 청소년 및 교육계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도움을 청했다. 대학 진학을 못한 학생들을 위해 기술훈련소를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기술훈련뿐 아니라 마인드 교육을 실시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스리랑카에서 만난 지역개발부 차관과 국회의원은 “산지의 차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 너무 어려워요. 정부에서 이들을 위해 일하려고 하지만 본인 스스로 가난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부족해요”라며 호소하듯 이야기했다.

스리랑카 현지친구는 “불교 및 힌두교의 윤회사상 때문에 이들은 ‘전생에 저지른 잘못의 업보로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게 내 운명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 변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밝고 순수한 얼굴 이면에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과 아픔이 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다. 스리랑카로 해외봉사를 와서 한국어, 태권도, 컴퓨터, 노래 등 전공분야를 통해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고 대화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희망을 주길 바란다.


​콜롬보(스리랑카)=최현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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